104화
그는 더욱더 강하게 여원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여원의 눈매가 살짝 떨렸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사결은 그가 울고 있다고 느꼈다.
두 사람의 몸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아스팔트가 바로 코앞까지 이르렀다. 사결이 몸을 비틀어 자신을 아래로 두고 얼음을 발출하려는데, 검은 빗살이 순식간에 두 사람을 낚아챘다.
“…레프?”
크르릉.
사결은 바로 알아봤다. 레프였다.
“이런 미친. 너 날 수도 있었어?”
레프가 개소리하지 말라는 듯 투레질을 했다. 너무 빠른데다 순간적으로 높이 뛰어올라 그렇게 보인 것뿐. 레프타는 날 수 없다.
“아무튼 잘했어.”
사결의 앞에 앉은 여원은 갈기로 옴짝달싹 못 하게 감겨 있다. 심지어 입도 막혔다. 여원이 사결을 물어뜯는 걸 본 것이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주인을 이런 식으로 구속하는 레프도 괴로울 게 틀림없었다.
사결은 이 말 못하는 짐승을 조금 더 좋게 보기로 했다.
비록 여태 여원에게 치대면 으르렁거리며 방해하고, 데이트할 때마다 튀어나와 난리 치고, 가끔 시내까지 쫓아와서 매스컴에…
“…….”
좋게 보는 건 보류하고 그냥 애완동물로 인정해 주는 선에서 끝내자. 그렇게 생각했을 때 갑자기 아스팔트를 내리찍은 레프가 급하게 방향을 틀었다. 사결은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실제로 엉덩이가 살짝 들렸다.
“야! 너 운전 똑바로-”
콰자작!
그 자리로 얼음칼이 무수히 날아와 꽂혔다.
“-하고 계시는군요.”
크릉!
닥치고 있어라.
분명 짐승의 울음인데 목소리가 들렸다. 레프는 헌터와 그림자의 격돌로 불바다가 된 빈 도시를 가로질렀다. 수해와 맞닿은 곳에서 전투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도심지까지 순식간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멀어졌겠지 싶어 사결이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안심하려는 사결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마치 가오리를 닮은 거대한 그림자가 노을을 가리며 길게 늘어졌다.
콰작.
레프의 발이 얼음에 묶였다. 검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사결과 여원이 튕겨 떨어졌다.
제법 아프게 구른 사결은 당장 여원부터 찾았다. 아무리 멀어도 근처에 있어야 할 그가 보이지 않았다.
배회하던 그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거대한 드래곤이 빌딩을 휘감듯 내려앉았다. 어찌나 큰지 40층짜리 빌딩이 빈약한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여원은 드래곤의 어깨에 서 있었다.
자신을 향한, 아무것도 담지 못한 눈을 보며 사결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를 아주 먼 곳에 뒀어야 했다. 외곽지역의 별장… 아니, 아예 그리샤 밖의 다른 도시에라도 숨겼어야 했다. 반대할 때 억지로 재워서라도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사결은 실소했다.
일전의 대화가 떠올라서다.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가정인지 알면서도 자꾸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뜻이다.
죽여. 네 공허로. 흔적도 없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명령이 여원의 뇌리를 움켜쥐었다. 멍해진 여원의 손에서 거대한 공허가 열렸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규모였다. 어지간한 3층 주택쯤은 쉽게 들어갈 크기의 검은 공간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점점 몸집을 불렸다. 표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크라투스가 멈추라고 명하기 직전, 공허가 사결을 삼켰다. 그리고 뒤이어 바로 앞까지 온 구체를 향해 여원이 뛰어들었다.
크라투스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종속의 계약을 활용한 명령은 그 명령 외의 다른 행동은 못 하도록 기본적인 제약이 깔려 있다. 말 그대로 대상을 말 잘 듣는 인형이자, 명령자의 수족으로 만드는 계약이다. 그런데 아무리 명령과 연관되었다지만 이런 행동이 가능했다는 건, 미약하게나마 계약을 거스르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다.
백색 정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어찬 건 핏빛 분노였다. 그가 휘감고 있던 빌딩이 통째로 얼어붙었다. 얼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잠식하듯 바닥을 따라 도심으로 뻗어나갔다. 거대 도시 그리샤의 절반이 순식간에 얼음 도시로 변했다.
그래서 죽겠다고?
저 녀석을 죽이고 내 곁에서 사느니, 차라리 같이 죽겠다고?
“예니스…!”
머리끝까지 분노한 크라투스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공허 속으로 몸을 던졌다. 뒤늦게 따라붙은 그림자가 턱을 떨어뜨렸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한참을 멍청하게 있던 그는 구체가 점점 떠오르기 시작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섣불리 건드리지 마라. 일단 주변을 마저 정리한….”
“어딜 정리한다고?”
사나운 목소리가 그림자의 말을 잘랐다.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의 폐허 너머, 눈 폭풍을 뚫고 한 무리의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들이 분명 처리했다고 생각한 헌터들이었다.
“여긴 우리 터전이야.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친 새끼들이 그런 말을 하면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그들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처리했다고 생각한 게 마냥 착각은 아닌 듯 어디 한 군데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수는 처음의 삼분지 일이었다. 나머지는 계속 그 자리에 쓰러져 있다는 뜻이다.
퉤.
윤혜리가 피 섞인 침을 뱉었다. 그녀가 날이 나가버린 도전을 다시 한번 크게 휘둘렀다. 분명 지치고 피곤한 기색인데 칼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는 심상치 않다. 그림자가 혀를 찼다.
“멀쩡한 몸으로 덤벼도 안 됐던 걸 그런 몸으로 덤벼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취미가 자살인가?”
“덕분에 둘은 죽였잖아. 너희 이제 겨우 넷이거든?”
“…….”
그림자 넷의 기도가 변했다. 그림자답게 음울하고 선뜩한 살기가 그녀를 향했다. 윤혜리는 피 묻은 입술로 웃었다. 날 선 반응은 저들의 상황도 썩 좋지 못하다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이제 너희 싸움 방식은 다 파악했어. 이승이랑 미리미리 작별 인사하고 목이나 내밀어. 이 검은 쓰레기 봉지 같은 새끼들아.”
검은 쓰레기 봉지가 정확히 뭔지 모르는 그림자들이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윤혜리가 표정을 구긴 그림자들을 향해 턱짓했다.
“야. 조져.”
“아니 팀장님. 조져가 뭡니까 조져가. …물론 조질 거지만.”
입은 낄낄거려도 눈은 살벌한 피투성이 팀원들이 각자 무기를 움켜쥐고 달려 나갔다. 피해는 이쪽이 더 크다. 분노도 그랬다.
그림자는 하던 대로 맞대응했다. 침착하게 피하고 속성으로 공격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나가떨어지던 헌터들이 버티기 시작했다.
기세도 기세였지만,
“그렇게 쳐서 조져지겠냐!”
“그럼 네가 치든가 이 새끼야!”
“뭘 너희들끼리 싸우고 있어 이 미친놈들아!”
지금 덤벼드는 이들은 헌터 풀이 넓고 상질인 그리샤에서도 가장 독한 이들이었다. 싸우다 말고 자기들끼리 치고받다가 다시 그림자를 향해 달려든다.
선두에 선 윤혜리가 핏빛 웃음을 지었다.
“호랑이… 이 경우엔 용인가? 아무튼 잘난 놈 앞세우고 잔뜩 날뛰었겠다. 어디 용 없는 산에서도 기세가 사나 보자. 이 새끼들아!”
콰광!
* * *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공허. 허무. 그 밖에 모든 텅 빈 것을 뜻하는 단어들이 사결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우선 제 몸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보이는 건 없지만 팔과 다리를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잠깐 잊고 있던 수족의 존재가 뚜렷해졌다.
약간이지만 감이 왔다. 그는 다음으로 바닥을 인지했다. 마비된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발바닥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사결은 공허 속에 서서 앞을 응시했다. 빛도 없고 온통 검은 공간이다. 하지만 조금 전과 달리 어쨌든 보인다는 건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상한 감각이긴 했다. 보이는 게 없는데 ‘보인다.’니.
“여원!”
사결은 모든 생각과 의문을 뒤로 미뤘다. 대신 곧바로 여원을 찾기 시작했다. 이곳에 삼켜질 때 구를 향해 뛰어내리던 그를 봤다. 불안에 묻힐 듯한 마음을 꽉 잡고 소리 높여 여원을 불렀다.
메아리조차 없다. 내지른 소리는 그대로 공간에 삼켜지듯 순식간에 스러졌다. 희미한 절망이 피어올랐다.
사결은 그런 기분을 애써 떨쳐내고 걷기 시작했다.
일단 자신은 멀쩡하지 않나. 그러니까 분명 그도 무사할 거다. 그 두 가지 생각만 반복하며 끝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공허의 공간에선 그도 쉽지 않았다.
계속 머릿속으로 의문이 들어찼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이렇게 걷는 게 맞긴 하나? 그냥 그 자리에 있는 편이 낫지 않았나. 왜 걸어도 걸어도 계속 어둠밖에 없는가. 여긴 대체 뭐 하는 곳인가.
어느새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 얼마나 걸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한 달 같기도 했고 일 년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저 몇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몸은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걸었으면 S급 헌터라도 지칠 법한데 멀쩡하다. 사결은 뒤늦게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의 기본욕구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동하지 않는다.
그걸 잊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도 놀랐다. 이곳은 아무래도 정신에도 구멍을 내는 것 같다.
공허.
그 울림에서 오는 거대한 공포가 뒤늦게 해일처럼 덮쳐왔다. 사결이 걷던 걸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손이 가슴팍을 쥐어뜯고 할퀴었다. 고통에 자신을 놓아 버리려는 때, 그가 구원을 바라는 구도자처럼 중얼거렸다.
“…여원.”
속삭임에 가까운 혼잣말은 부름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향해 던지는 동아줄이기도 했다.
잘못 보지 않았다. 그때 분명 여원은 자신을 향해 당장 안겨들 것처럼 몸을 던졌다.
“…….”
하지만 만에 하나. 잘못 본 것이었다면.
설령 본 게 맞다 해도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뛰어들려는 게 아니라 그냥 조금 들썩인 것뿐이었다면.
이토록 허망한 끝을 받아들이지 못한 뇌가 멋대로 그 장면을 확대해석한 것이라면. 가슴팍을 몇 번이고 아프게 쥐어뜯었다. 가슴이 아니라 그 아래 심장을 잡으려는 것처럼.
피폐한 공간은 거기 속한 사람까지 피폐하게 만들었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지를 열었다.
그냥. 죽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