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갈비뼈에 압박이 느껴질 만큼 강한 힘인데도 아프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여원은 오히려 뼈가 부서져도 좋으니 더 세게 자신을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고생을 하게 했네. 미안해.”
네가 왜 사과를 해. 사과할 사람은 난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목이 메어 미처 말하지 못했다. 달군 돌이 목구멍에 들어앉은 것 같다.
구속구를 찼어도 크라투스의 명령은 건재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무방비하게 노출된 사결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움직일 수 없다. 마주 안아줄 수가 없다. 여원이 결국 손을 늘어뜨린 채 어깨를 떨며 울었다.
“아니. 내가 잘못된 판단을 한 거야. 넌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소리만 했다.”
여원이 여기 있는 건 저 스스로가 원해서다. 크라투스의 압도적인 강함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이런 전력으론 용마족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한 손이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의 눈에 띄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허로 지원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이 모든 상황은 자신의 오판이 만든 거다.
“미안하다.”
“사과하지 마.”
자기는 한 주제에 사결이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사과하지 마.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를 왜 해. 할 거면 저 뒤의 미친 새끼가 해야지.”
“…넌 방금 했잖나.”
여원이 그 부분을 지적하자 사결이 뻔뻔하게 말했다.
“난 네게 잘못한 게 맞으니까 사과했지. 넌 아니잖아?”
“그건… 사소한 거다.”
“사소한 ‘잘못’이지. 그러니까 난 사과해도 돼.”
“…….”
이 녀석을 말로 이기려 들다니. 여원은 이상한 곳에서 자신이 정신적으로 몰려 있다는 걸 자각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뒤늦게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와중에도 얼음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거기 삼켜진 헌터들의 공격이 한동안 번쩍거리더니 지금은 잠잠하다. 사결은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 여차하면 이대로 여원을 데리고 도망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네가 떠난 게 그 인간 때문이냐?”
훅.
폭풍이 걷힘과 동시에 고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음 폭풍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무수한 얼음 입자가 크라투스 주변으로 벌떼처럼 모였다. 다시 드러난 공간은 절망적이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헌터가 대부분이었고, 그중 반은 미동이 없었으며 나머지 반은 신음을 흘린 채 꿈틀거렸다.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소수였다. 운 좋게 폭풍의 범위 바깥에 있던 자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안색을 보니 이후로도 별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추가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에서 여원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죽이려고 물으시는 겁니까. 절 해방 시켜 주시려고 물으시는 겁니까.”
크라투스는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린 채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긴 여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얼음용의 심장에 용암 같은 열기가 들어찼다.
그는 기본적으로 해맑고 잔혹했다. 상식을 벗어난 강함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성격을 양립하게 했다.
크라투스는 여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아왔다. 그가 눈썹만 살짝 들어도 모든 마족이 바닥에 엎드렸고, 기분이 상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강한 자가 곧 법이고 정의인 마계. 그는 그곳에서 가장 강한 마족이었다.
마왕은 거칠 것 없는 삶을 살았다. 여원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여원은 그에게 ‘예외’가 뭔지 알게 했다. 미치도록 예쁘다가도 별것 아닌 일에 속이 왈칵 뒤집힐 만큼 거슬리는데, 또 죽이고 싶진 않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는 일 같은 게 그랬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오늘 저녁 메뉴를 어떤 걸로 할지, 기사 훈련과 마왕성의 병력 배치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일상적이고 사무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말들마저 눈에 거슬렸다.
난생처음 겪는 불합리한 감정 기복이 당황스러웠다. 애당초 아무리 신기하고 예뻐 보여도 그렇지, 종속의 계약을 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긴 했다.
용마족으로 태어나 수백 년. 마족의 기준에선 짧은 삶이다. 크라투스는 그 모든 게 경험이 부족해서라고 여겼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자 종속의 계약이 새삼스러웠다.
누군가에게 메인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게 주종관계에서 주인이 된 입장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순간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순순히 충동에 따른 결과가 지금이다. 긴 노끈처럼 타래에 타래를 엮은 시간이 이 순간으로 이어졌다.
이제 하얀 용은 마계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만한 거체를 돌려보낼 게이트석은 중간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여원을 다시 손에 넣기 위해 살던 세계를 버리고 이곳에 왔다.
“죽이려고. 하지만 그게 넌 아니지.”
크라투스의 살의가 여원을 껴안은 사결을 향했다. 여원의 등이 흠칫 떨렸다. 곧 퍼덕거리며 사결에게서 떨어지더니 그를 등지고 크라투스를 마주했다.
누가 봐도 제 것을 지키려는 몸부림이다.
크라투스는 통증을 느꼈다. 속이 아플 만큼 꼬였다. 그런데도 역시 통증의 원인인 여원을 죽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 손을 들어 제 명치를 짚은 그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제 손짓 한 번에 유명을 달리한 마족들이 봤다면 어이가 없어서 두 번 죽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떠올려 봐도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발견했을 뿐이다.
뒤늦게.
제 삶에 그어진 선을.
그 선은 길고 거칠었으며 분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변적이었다.
어느 날은 먹처럼 짙더니, 또 어느 날은 파스텔처럼 흐지부지했다. 구름처럼 한없이 부풀었다가 얇은 실뱀처럼 내장을 칭칭 감아 오기도 했다. 크라투스는 죽은 줄 알았던 여원을 다시 만나 앞에 둔 지금도 그 선의 이름을 몰랐다.
예니스. 내 말을 들어.
“예. 듣고 있습니다.”
참혹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달리, 여원의 입은 주인의 부름에 착실하게 대답했다.
명령이다. 지금 네 등 뒤에 있는 자. 네가 비호하는 놈을 네 손으로 죽여라.
생각은 했다. 크라투스라면 이런 명령을 할지도 모른다고. 분명 가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정말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에 대한 각오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
여원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물었다. 예. 알겠습니다. 혀끝까지 올라온 대답을 고통으로 눌렀다. 당장이라도 뒤에 선 자의 목을 부러뜨리고 뼈를 부수고픈 충동과 그걸 거부하는 이성이 부딪혔다.
왜 대답이 없지? 나는 명령이라고 했다. 헷갈린다면 분명히 말해주지. 네가 가장 아끼는 자를, 네 손으로 죽여라.
조건이 선명해지자 압박도 덩달아 강해졌다.
“예.”
여원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살기를 품고 사결을 돌아봤다.
사결은 망설임 없이 뚫린 구멍 밖으로 몸을 던졌다. 품에 챙겨둔 큐브를 쥠과 동시에 하얀 새 모양의 드론이 추락하던 그의 몸을 허공에 띄웠다. 그는 빠르게 날아갔다. 이게 과연 옳은 판단인가. 그딴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 순간 최선이라고 판단된 걸 이행한다. 그래도 사태는 해결될까 말까였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말을 섞은 건 겨우 몇 마디뿐이다. 그것만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행동 패턴을 ‘여원’에 한정한다면 추론 정도는 가능했다.
자신이 놈의 입장이라면 죽여야 할 대상이 없어진 순간 여원을 데리고 어디론가 훌쩍 가버리겠지만.
‘저놈이라면.’
여원을 손에 넣겠다고 제 세계마저 버리고 여기까지 온 놈이라면.
콰직!
드론에 구멍이 생겼다. 둥근 공허의 구체가 드론의 절반을 집어삼켰다. 중간이 뭉텅 사라진 기계가 추락했다. 와중에도 사결은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린 여원이 보였다.
저 멀리 구멍 가장자리에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 손에 부서진 구속구를 든 크라투스가 있었다. 그래. 저놈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여원이 자신을 죽이도록 만들 거다. 그래야 무너질 테니까. 어디 기댈 곳 없이는 홀로 설 수 없게 마음이 허물어질 테니까.
사결은 팔을 벌려 여원을 끌어안았다. 꿈쩍도 못 하고 갇힌 여원이 몸을 비틀다 사결의 목덜미를 물었다. 이가 살을 파고들었다. 사결은 재차 웃었다.
사람의 치악력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동맥쯤 물어뜯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여원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저항하고 있었다.
“사랑해.”
움찔.
크게 몸을 떤 여원이 양손으로 사결의 어깨를 세게 밀쳤다. 크라투스의 명령과는 다소 동떨어진 행동이다. 어떻게든 그와 멀어지려는 움직임. 사결은 바닥이 가까워짐에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