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사결이 드론을 타고 다시 뛰어 들어왔다. 다른 헌터들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여기 오지 않은 S급들은 밖에서 그림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크라투스의 시선이 정확히 사결을 향했다.
“저건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 남겨주려고 했는데. 역시 가짜는 필요 없지?”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피부가 하얗게 변한 사결이 허, 하고 소리를 냈다. 절로 입가가 비틀렸다. 진심에서 나온 비웃음이었다.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일이 여기까지 왔는데 모르면 머저리고, 알면서도 현실을 부정하는 거면 찌질이지. 어느 쪽이든 좋을 대로 선택해.”
크라투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가셨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 스친 헌터들이 흠칫거리며 몸을 떨었다. 노란 눈동자에 잠깐 담긴 것만으로도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마침내 사결을 똑바로 응시했다. 약했다. 동시에 희미하지만 익숙한 기운도 느껴졌다. 속성도 핏줄도 확실히 저와 비슷하다.
하지만 만난 건 자신이 먼저였다. 그렇게 도망치고 여원은 저 녀석을 만나 어울렸다. 그게 뭘 의미하는가.
크라투스는 분노를 갈무리하고 하얗게 웃었다. 하찮은 벌레의 말에 흥분하다니. 저답지 않았다.
사결은 대놓고 비웃었다.
“망상을 아주 병 수준으로 하네. 내가 왜 연애 초반에 그 개고생을 했는지 이제 알겠다. 네놈 때문이었구나. 이 하얀 멸치 새끼야.”
백담에서 만났을 때를 말하고 있었다. 여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걸 연애 초반이라고 하기엔 좀… 그가 떨떠름해 하고 있을 때, 크라투스는 충격에 굳었다.
“지금, 뭐라고?”
살면서 처음 들어보는 모욕이었다. 너무 놀라니 분노보단 그냥 멍해졌다. 멍청하게 눈을 깜박거리는 그의 앞에서 사결은 그간 눌러온 걸 전부 터뜨렸다.
“이제 보니 이명환도 이명환이지만 진짜 이유는 네놈이었어. 이 좆같은 새끼. 대체 얼마나 자기 객관화가 안 되면 네가 싫어 도망친 녀석을 상대로 그딴 생각을 할 수 있지? 내게서 널 비춰 본다고? 하, 시발. 덕분에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아냐 이 새끼야? 어쩐지 나 같이 잘생기고 몸 좋고 섹시한 남자를 별 이유도 없이 피하더라니!”
“…….”
너야말로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것 같… 아니. 여기선 말을 얹지 말자.
사결이 원색적인 욕을 쏟다 말고 불시에 공격했다. 멍때리던 크라투스는 별거 아닌 공격에도 대응이 한발 늦었다. 얼음이 창백한 피부에 상처를 만들었다. 하나는 뺨을 가격했다. 그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여원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크라투스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봤다. 아니, 애초에 공격이 통하는 상대라는 걸 지금 처음 실감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그도 어쨌든 생명체고, 용마족도 마족이다. 회생 불가의 상처를 입으면 죽고 세월이 흐르면 늙고 쇠한다.
여태 구름 위의 신전에 기거하던 존재가 돌연 땅으로 끌어 내려져 제 앞에 선 기분이다. 쾌감과도 흡사한 그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살짝 꺾였던 고개를 바로 한 그는 사결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예니스.”
이번엔 평범한 부름이었다. 그럼에도 억압이 학습된 여원은 흠칫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크라투스를 봤다.
“네가 많이 아끼긴 하나 봐. 저딴 말에 동요를 다 하고.”
여원은 절감했다. 땅에 끌어내려졌어도 그는 여전히 일개 신자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입만 열면 헛소리네. 더 못 들어주겠군.”
사내의 전능을 알지 못한 채, 연인의 해방을 꿈꾼 사결이 얼음 창을 높이 들었다. 그의 지휘에 따라 상황을 주시하던 S급 마력운용계들이 각자의 속성을 띄워 올렸다. 엄청난 기세였다. 열기와 냉기가 좁은 공간 안에서 폭발할 듯 얽히며 번개가 내리쳤다.
크라투스는 무감했다. 온갖 적의와 악의가 자신을 향했음에도 미동조차 없다. 오히려 이 상황을 지루해하는 기색이다. 헌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노란 동공이 잔혹함을 담고 빛났다.
예니스.
“예.”
이리 온.
자성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여원은 자연스럽게 용마족의 옆에 가 섰다. 안 그래도 동요하던 헌터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그 사이, 아주 작은 소리로 배신에 대한 의심이 싹텄다.
사결이 큰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런 저급한 잔재주가 아니면 그의 대답을 들을 수도, 그를 곁에 부를 수도 없나? 그러면서 싫다는 사람을 놓지는 못하고? 뭐 이렇게 찌질한 새끼가 다 있어?”
마계를 다스리는 마왕을 찌질한 스토커 취급할 수 있는 건 아마 사결 뿐일 것이다. 실제로 주변 헌터들은 미묘한 표정을 짓다가 그가 작정하고 기운을 내뿜기 시작하자 찬 서리 맞은 새싹처럼 그대로 얼어붙었다. 유일하게 입가만 씰룩일 뿐이었다.
무섭긴 한데, 와중에도 사결의 말에 공감한 탓이다. 크라투스를 보던 공포 섞인 시선에 다른 것이 희미하게 섞였다. 애매하고 한심한 걸 보는 눈이다. 그건 보는 사람보다 시선을 받은 대상이 더 선명하게 느꼈다.
크라투스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그때마다 공기가 진동하며 주변 온도가 쭉쭉 내려갔다.
“마음대로 떠들어라. 그럴 수 있는 것도 지금뿐이니까.”
그가 곁에 선 여원의 목을 손가락으로 감쌌다. 앞으로 숙인 고개가 여원의 목덜미에 닿았다. 사결은 튀어 나가려는 발을 억지로 붙들었다.
충동과 분노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비아냥거리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지만, 그는 지금 매우 이성적이었다. 정수리를 찌르는 열기에 결정을 내맡기면 영영 여원을 찾을 수 없다. 사결은 그 문장을 심장에 새겼다.
그런 와중, 황금빛 눈을 가늘게 뜬 크라투스가 여원의 귀에 속삭였다.
예니스. 무슨 수를 쓰든 저 녀석을 죽여라. 나머지 잔챙이는 내가 처리하겠다.
여원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비명을 지르는 마음과 다르게 입술은 차분히 “예.”하고 답했다.
도끼를 움켜쥔 그가 앞으로 튀어 나감과 동시에 크라투스가 양손을 휘둘렀다. 휘몰아친 얼음 폭풍과 나머지 속성들이 충돌했다.
콰과광!
엄청난 충격파가 발생했다. 벽면에 금이 가고 근방의 유리란 유리는 전부 부서졌다. 헌터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개중엔 운 나쁘게 건물 밖으로 날아간 경우도 있었다. S급이니 죽진 않겠지만 못해도 중상이다. 전투에 다시 참여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인상을 쓴 사결이 여원의 위치를 확인하려 어떻게든 눈을 부릅떴다. 그때, 폭풍의 한중간을 가로지르는 검은 선이 있었다.
콰앙!
사결에게 일직선으로 쇄도한 선의 끝에서 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를 향해 내리찍어진 도끼를 간신히 피한 사결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찾을 필요 없어서 좋네. 그렇지?”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씻은 듯 사라졌다.
“도망쳐라.”
“…너 얼굴이 왜 그래.”
눈은 실핏줄이 터졌고 코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설마 그 짧은 사이 얻어맞은 건가? 아니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이 예쁜 걸 때려?!
분노가 척추를 태웠다. 그 빤한 생각을 읽은 여원이 부정했다.
“맞은 게 아니다.”
“아니면.”
그가 다시금 도끼를 휘두르며 대답했다.
“명령에 저항하고 있다.”
“…그럼 이 도끼는?”
“…하고는 있는데 쉽지 않다. 속성 공격을 누르는 게 최선이다.”
사결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진 여원의 표정에 오장육부가 요동쳤다. 제게는 너무 예쁘고 귀해서 매스컴에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열흘 밤낮을 고민했는데. 누가 봐도 좋아하고 집착하는 새끼가 사람을 이렇게 다뤄?
분노는 안에서 깊게 폭발시켰다. 사결은 겉으론 다정한 연인을 표방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거 영혼을 건 계약이라며. 그런데 저항하는 거야? 역시 내 애인은 대단하네. 나였으면 눈 까뒤집고 달려들었을 텐데.”
자신이 불안해하고 흔들리면 여원은 더욱 힘들어질 거다. 사결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며 그를 몰아붙였다. 미리 대련해 보길 잘했다.
신체의 제어권을 두고 저항하는 중인 여원은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사결은 어렵지 않게 그를 제압해 바닥에 눌렀다.
쿠웅!
“구속구!”
사결의 외침에 드론을 타고 상황을 주시하던 이현수가 구멍으로 준비해 둔 구속구를 던졌다. 헤드셋에 이어 종속의 계약 대응책 그 두 번째였다. 여원의 팔목에 두꺼운 팔찌가 채워졌다.
그의 몸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졌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은 여원의 손에서 도끼를 뺏은 사결이 그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