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크라투스에 관한 화제를 꺼낼 때마다 여원의 안쪽에 가라앉아 있던 퇴적물이 휘적휘적 떠올라 심중을 흐렸다. 탁해진 마음이 이성적인 사고를 방해했다.
“당신이… 내가 당했던 것보다 더한 걸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건 온전히 저 때문이다. 여원은 그런 상상을 할 때마다 그토록 힘겹게 도망쳐 온 크라투스에게 자신을 던지고 싶어졌다.
“사결. 당신이 너무 좋아져서 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당신을 만나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 접점 자체를 없앨 겁니다. 당신이 날 몰랐으면 하니까.”
사결은 욕설을 삼켰다.
저건 반칙이다. 알고 보면 절절하기 짝이 없는 고백을 저렇게 미운 말로 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는 머릿속으로 말을 골랐다. 신중하게. 그러나 헝클어진 머릿속은 신중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돌아가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사결이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던 여원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새벽 별이 지듯 그의 눈에서 빛이 사라진 순간.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해서 네가 몇 번이고 되돌아간다고 해도. 우린 결국 여기였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을 테니까.”
해가 떠올랐다.
어제인지 오늘인지 모호하던 하루의 경계가 단숨에 허물어졌다. 창백한 세계를 몰아낸 겨울 햇살이 두 사람을 함께 비췄다.
“넌 이제 나한테서 못 벗어나.”
햇살을 정면으로 받으며 사결이 여원을 꽉 끌어안았다. 숨 막히는 압박감 속에서 여원은 안정을 느꼈다. 빤히 보이는 파멸로 함께 걸어가고 싶어졌다. 그는 소리 없이 울었다. 품이 젖어가는 걸 모른 척하며, 사결은 온전히 해가 떠오른 도시의 가장자리를 응시했다.
약속한 날이었다.
* * *
오후 여섯 시.
백담에 게이트가 열렸다. 그건 통상의 게이트는 물론이고, 일회성인 이레귤러 게이트와도 궤를 달리했다. 온통 황금색인 게이트는 열리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물을 일그러뜨리고 땅과 건물에 균열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다 찬란한 색에 멈칫하며 뒤돌아봤다. 게이트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도 그 게이트는 낯선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안에서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바위처럼 보이던 그것은 점점 커지며 얼굴이 되고 거대한 몸통과 날개가 됐다.
새하얀 얼음 드래곤이 차디찬 숨을 뱉었다. 근방에 있던 건물 몇 채가 통째로 얼어붙었다. 그 뒤로 온통 검은 그림자들이 뒤따랐다. 선명한 대비다.
주변을 둘러본 드래곤이 눈을 감았다. 눈부신 빛과 함께 거체가 줄어들었다.
윤기가 흐르는 은백색 머리칼이 사르륵 떨어졌다. 늘씬한 몸매에 뾰족한 귀를 가진 용마족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예니스는?”
그림자는 대답이 없다. 크라투스가 웃었다. 예쁜 얼굴이 수정처럼 빛났다.
“온종일 기다려도 안 와서 이렇게 직접 오게 만들었으면, 적어도 마중은 나와야지. 하하. 너무 예뻐만 했더니 이런 일이 다 벌어지네. 이번에 손에 넣으면 한 몇 년은 지하에 넣어두고 안쪽부터 범해야겠어. 정신 깊숙한 곳을 아주 철저하게 헤집어서 두 번 다시 이런 건방진 짓을 못 하도록.”
“…….”
“일단 그 전에 해야 할 일부터.”
크라투스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얇고 흰 서리 막이 주변으로 퍼졌다. 한 꺼풀 천이 덮이듯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막에 닿은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차, 건물, 가로수 그리고 인간까지.
눈을 뜨고 죽은 이들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표정이었다.
그림자들은 제 피부를 타고 오른 서리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뿜는 입김만이 살아 있다는 걸 알려왔다.
크라투스는 조용하고 고요해진 주변을 만족스럽게 둘러봤다. 하얗고 긴 손가락이 멀리, 그의 얼음이 닿지 않은 도심을 가리켰다.
“쓸어버려.”
* * *
백담의 비보가 전해진 건 반나절하고도 반이 지나서였다.
달이 높이 뜬 자정. 크레딧 길드 건물은 거의 모든 층이 환하게 불을 밝혔고 그 빛은 밖의 시위대를 고스란히 비췄다. 사람은 두 배로 늘어났고 피켓은 세 배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커다란 스피커를 틀고 고함을 지르며 크레딧 길드를 향해 아우성쳤다.
평화 시위가 아니었다. 상대를 비난하고 압박해 원하는 걸 한시라도 빨리 쟁취하기 위해 그들은 과격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저번 사건을 반추해 이번엔 헌터 없이 오직 일반인들만 행동에 나섰다.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로비로 내려와 있던 헌터가 혀를 찼다.
“저것들 그냥 다 쓸어버리면 안 되나? 발길질 한 번이면 우수수 나가떨어질 놈들이 법 믿고 나대는 거 보니 짜증 나네.”
윤혜리가 그 헌터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묵직한 한 방이다. 헌터의 몸이 앞으로 홱 쏠렸다. 도끼눈을 뜨고 몸을 틀었던 헌터는 때린 사람이 윤혜리라는 걸 확인하곤 멈칫했다.
“말조심해. 우리가 지켜야 할 그리샤의 시민들이다.”
“…저쪽에서 우릴 먼저 적대하는데, 그래도 지켜야 할 대상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거, 시발. 약한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됩니까.”
윤혜리가 온화하게 웃었다.
“벼슬이지. 네 새끼가 약하니까 내가 적당히 때린 거 아냐.”
아니었으면 넌 3초 전에 뒤졌다는 뜻이다. 헌터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멀찍이 서 있던 유성과 재현이 소곤거렸다.
“와, 저 새끼 미쳤나 봐.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윤혜리 팀장을 건드려.”
“성질머리론 길드장에 비견될 사람인데. 뭣 모르는 신입인가?”
“하하. 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길드장 하위호환 성질머리라고 하자. 하위호환.”
윤혜리가 메고 있던 망나니 칼을 풀어 손에 쥐었다. 스르륵 돌아보는 얼굴이 지옥의 악귀 같다.
“당신들이 배정된 곳은 여기가 아닐 텐데?”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계속 지나가겠습니다!”
유재 세트가 후다닥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탔다. 철문이 닫히는 걸 본 윤혜리가 그제야 도전을 갈무리했다. 뒤늦게 앞을 보니 말린 명태처럼 굳은 헌터들이 보였다. 특히 시위대를 두고 한 소리 했던 헌터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뭐야. 어디 아픈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각 잡힌 대답이 돌아왔다. 어째 아까보다 바짝 졸아 있었다.
* * *
소식을 전해 들은 헌터 협회와 길드의 수뇌부는 대개 비슷한 반응이었다.
파랗게 질리거나 위통에 배를 움켜쥐거나. 혹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헌터 협회의 협회장은 드물게 욕부터 뱉었다.
탈모의 고민이 있는 중년인은 양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그는 지금 시민단체와 크레딧 길드 사이에 껴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크레딧 길드는 귀환자를 넘겨줄 생각이 없고, 도시정부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세졌다. 불안해진 다른 길드들도 은근히 압력을 넣고 있었다. 협회장은 그럴 거면 그냥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막말로 그렇게 되더라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제력 행사? 대체 뭘로 강제할 건데?
그리샤 무력의 대부분이 크레딧에 몰려 있다. 대형 길드가 연합해 전면전을 벌여도 오히려 질 확률이 높다. 심지어 저쪽엔 하나하나가 A급 헌터에 필적하는 마물까지 우글거린다.
정보전이라도 걸어보려 포섭을 시도해도 소용없었다.
써먹으려면 크레딧의 중간 간부는 돼야 하는데, 찔러본 이들은 전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태도로 거절했다. 이유도 다 똑같았다.
‘뭐가 됐든 사장님 손에 죽는 것보단 낫다.’
콰앙!
협회장이 양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옆에 서 있던 비서가 조용히 단말기 통신을 열었다.
“새 책상 하나 올려보내요.”
[예.]
평온한 주문이었다. 대답한 상대도 무덤덤했다. 침착하지 못한 건 협회장뿐이었다.
“아오 씨발. 내가 진짜. 아오!”
“열 내시면 혈압 올라갑니다.”
“아오!”
“탈모에도 좋지 않습니다.”
“…….”
협회장은 진정했다.
“사결은. 크레딧 길드장은 어쩌고 있대.”
“대비하고 있다는 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현재 길드 건물 내에 칩거 중입니다.”
“하아… 나 진짜. 뭐 먹을 게 있다고 이 자리에 앉아서는. 애초에 은퇴해서 어디 외곽지역 전망 좋은-”
비서는 저거 또 저런다는 표정으로 짜게 식었다. 물욕보다 명예욕이 강한 네가 퍽이나 그랬겠다. 협회장이라는 자리가 딱 저런 사람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라는 게 역설적이긴 하다.
삑.
그때 비서의 단말기가 울렸다. 손목에 차고 있는 메인 단말기가 아니라 주머니에 보관한 서브 단말기였다. 거기 저장된 목록을 떠올린 비서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가 다급하게 단말기를 확인했다.
그는 더 이상 협회장을 욕할 수 없었다. 무감하던 표정이 하얘졌다 파래지길 반복했다.
“용….”
“뭐?”
“용이 오고 있답니다!”
비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 협회장에게 설명 대신 자신이 전해 받은 영상을 보여줬다. 정말로 용이 오고 있었다. 새하얀 용이 얼음을 뿜자 작은 군락 하나가 통째로 얼어붙었다.
정식 도시는 아니고 백담과 그리샤 중간쯤에 아우터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다, 당장 크레딧 길드에 연락해!”
연락을 안 넣은 게 아니다. 막말로 지금도 넣고 있다. 확인은 하지만 답장이 온 적은 없었다. 한 박자 늦게 떠올린 협회장이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아니 여태 잘 해오다 왜 갑자기 x랄 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