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여원.”
“…….”
“여원!”
“아.”
넋을 놓고 있던 그가 할 말이 있냐는 듯 자신을 돌아봤다. 사결은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을 밟아 눌렀다.
“생각하지 마.”
“뭘.”
“지금 생각하는 거. 뭐든 간에 그만둬.”
여원은 대답이 없었다.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사결이 으르렁거리며 따라붙자 한참 후에야,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라고 했다. 그러곤 다시 멍해진다. 사결의 손가락이 안으로 말렸다. 옹졸한 손끝처럼 속도 곱았다.
그림자가 돌아갔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전령이 다녀간 뒤론 계속 저 상태다.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이 먼 곳에 간 느낌. 사결은 그게 싫었다.
어떻게든 붙들어 보려고 몇 번씩 이름을 불러도 눈동자에서 사라진 빛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여원에게서 사결은 어떤 움직임을 읽었다.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몸짓이다.
사결은 그에 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의심만 하는 것과 그걸 직접 확인받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그는 대신 틈날 때마다 여원을 침대로 밀어 넣었다.
막 성에 눈을 뜬 애송이도 이렇진 않겠지. 자조하면서도 멈추진 않았다. 오히려 강압과 폭력의 아슬아슬한 선에서 줄타기를 하며 그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팔로 단단히 끌어안아도 마음은 공허했다. 이전과 달리 여원이 여기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몸은 열기로 후끈거리는데 가슴은 차게 식었다. 사결은 그럴 때마다 더욱 여원을 파고들었다.
일정하게 뛰는 심장 위에 입술을 대고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체온을 맨살로 느끼고 있으면 그의 부재는 그저 확률 낮은 가설로 전락하고, 대신 근거 없는 믿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건 물리적인 거리로 마음의 거리감을 억지로 메운 것에 불과했다.
아흐레, 몽롱하던 여원의 시선이 점점 어느 한 곳을 향했다. 수해와는 정반대 방향. 백담이 있는 곳이었다.
사결은 폭발했다.
“이러지 마. 네가 이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발출된 감정은 붉은색보다 푸른색에서 가까웠다. 여원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사결은 그런 여원의 양어깨를 쥐었다. 피로와 불안이 섞인 눈동자를 그는 가만히 마주 봤다.
여원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먼 곳을 보고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던 그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닫았다.
* * *
어제인지 오늘인지 모를 새벽.
여원은 조용히 눈을 떴다. 청회색 공간에 선 그는 기척 없이 침실을 벗어났다. 맨발로 향한 곳은 거실의 유리창 앞이었다. 아직 어둑한 하늘 아래 번화한 도시가 펼쳐져 있다. 정적이고 고요하다.
“몰래 갈 생각이라면 그만둬.”
여원이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일어난 사결이 침실 문가에 기대 서 있었다.
“아무리 너라도 백담까지 드론으로 갈 순 없어. 비공정을 타도 나흘은 걸려.”
하지만 레프타는 갈 수 있다. 마음먹고 달린다면 저녁이 되기 전엔 백담의 외벽이 보일 것이다. 여원은 그걸 알면서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에 가까운 한탄을 뱉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 생각하면 어떻게 가지를 뻗어도 한 가지 결론밖에 떠오르지 않았거든.”
그의 손이 유리창을 짚었다. 아직 밖보다 안이 더 밝은 시간. 창에는 잔뜩 굳은 무표정의 사내가 보였다. 강인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가 유리를 긁듯 손을 움켜쥐었다.
“내가 가야 해. 그게 맞아.”
타협의 여지가 없는 통보였다. 이미 결정된 걸 전하는 것에 가까운 어조다. 사결은 그 결정이 오래된 걸 알았다. 전령이 다녀갔을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일 수도 있다.
사결이 알 수 없는 어느 순간부터 지금까지. 여원은 홀로 생각하고 고민해서 답을 냈다. 대화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정수리로 용암이 쏟아진 기분이다. 사결은 여원이 잘못된 답을 도출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과정에서 자신이 완전히 배제된 사실이 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
“같이 고민하자고 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네게 나는 대체 뭐야. 이렇게 홀로 결론 내릴 거면 뭘 위해 우린 얽혀 있는 거지? 내가 네 연인이라는 사실이 네 안중에 있기는 했나?”
팔짱을 푼 사결이 천천히 다가왔다.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도 않고 걸음도 차분했다. 여원은 그 정적인 움직임에 주춤거리며 저도 모르게 발을 물렸다. 두 걸음 만에 등이 유리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어지자 그의 낯이 밖의 새벽처럼 창백해졌다.
사결은 여원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더는 어떤 말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한 질문의 대답을 기다렸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눈에 띄게 당황한 여원이 나지막이 입을 뗐다.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건 대답이 될 수 없어.”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건 대답이 아니라 변명뿐이다. 정말 모르겠으니까.”
“너 진짜-!”
사결의 분노를 정면에서 맞으며 여원이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넓은 어깨가 안으로 말리고 그의 상반신이 쥐며느리처럼 안으로 굽었다. 사결은 더 소리치지 못하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여원은 고요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평온한 건 아니었다. 용암을 품은 호수처럼 고요히 끓어오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놈을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어. 대가가 아무리 잔혹해도 지불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매 순간 느낀다. 그런 내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정말 몰라. 고민하고 생각하고 다시 고민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어.”
듣고만 있던 사결이 묵묵히 손을 뻗었다. 그가 여원의 손목을 쥐었다. 손을 치우자 저항 없이 딸려온다. 다시 드러난 여원은 울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떨어진 눈물방울이 바닥을 두드렸다. 여원이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아는 건 하나야. 네가 중간계에 없었으면 내가 이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거란 거.”
분노한 사결이 잡은 손을 확 당겼다. 여원의 몸이 휘청 앞으로 쏠렸다. 당황한 그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금방이라도 부딪힐 것처럼 가까운 곳에 상대의 얼굴이 있었다.
“그래서. 감격하기라도 하라고? 고마워하기라도 하라고? 빌어먹을. 서여원. 대체 그 예쁜 머리통으로 뭘 생각하는 거야! 널 마계에 던지고 살아남으면 내가 남은 평생을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는 건 아니겠지?”
“…….”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그가 끔찍한 꼴을 당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여원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지만 머리는 점점 이성을 찾았다. 고개를 돌려 사결의 시선을 피했다. 정제되지 않은 말이 쏟아졌다.
“마계에 보내지기 전에 나는 그냥 숨만 쉬고 있었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딱히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돌이켜보니, 나는 아마 죽고 싶었던 것 같다. 삶이 온통 무채색이라 그 감정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했을 뿐이지. 그런데….”
여원이 말끝을 늘였다. 사결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저 뒤에 이어질 말이 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널 만나고 세상에 색이 입혀졌다.”
여원의 고백은 여느 때처럼 묵묵하고 담담했다. 고요하기까지 하다. 오직 거기 담긴 감정만이 격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너는 혜성 같았다. 네게서 내게로 떨어진 색색의 별이 크고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 게 통탄스러울 정도로. 나는 뒤집히고 섞여서… 지금의 내가 됐다.”
널 좋아하는 내가.
마지막 말은 연보랏빛 안개처럼 흐리고 비현실적이었다. 사결은 문득 여원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게 처음이라는 걸 알았다. 동시에 그의 어휘가 이렇게 풍부하다는 것에도 놀랐다. 백담에 있을 때만 해도 주머니에 사전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던가.
‘아니. 오히려 그래서….’
쓸데없는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그는 다른 걸 머릿속에 넣을 여유가 없었다. 여원은 사결로 인해 깨달았다. 새롭다는 게 얼마나 빛나는 말인지. 눈앞의 사내가 눈부시다.
사결은 얼떨떨했다. 싸움의 전초전에서 갑자기 세상 절절한 고백을 받았다. 그렇다고 자존심도 없이 기뻐할 리가 있나?
‘시발.’
그는 제 자존심이 휴지 조각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여태 잡고 있던 양손을 다시 한번 힘주어 당겼다. 앞으로 쏠린 그의 몸을 휘감은 사결이 여원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췄다. 여원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남은 눈물이 사결의 뺨에 묻었다. 그 자리가 불에 댄 듯 뜨겁다.
여원은 사결을 혜성에 비유했지만, 그는 여원이야말로 별과 같다고 느꼈다.
밤하늘이 온통 깜깜한 어둠으로 들어찬 멸망의 날에도 홀로 빛날 것 같은 굳건하고 시린 별.
사결은 온통 여원으로 휘감겼다. 무수한 생각의 시작과 끝을 맺을 때마다 그가 있었다.
자연히 그와 남은 삶을 영위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사결은 여원의 심정을 이해했다. 미치도록 살고 싶어졌다.
“내가 사는 것보다도 네가 아무 일 없이 행복하게 살길 바라게 됐어.”
타이밍도 좋게 여원이 말했다.
“둘이 함께 고민한다고 예정된 결과가 변하진 않아. 끝은 결국 파멸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너까지 끌어들일 순 없다.”
“그래서 널 던지겠다고? 차라리 저항해. 내가 함께….”
“안 돼.”
벽과 말하는 것 같다. 사결은 여원을 처음 본 2년 전보다 지금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려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자신과의 관계를 쉽게 놓아버린 것에 화가 났다.
“넌 아무것도 몰라.”
“당연히 모르지. 네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이건 말실수였다. 사결은 멈칫했지만, 말을 수정하거나 사과하거나 잘못 말했다고 하지 않았다. 여원은 뭐라고 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네 말이 맞다. 말하지 않았지. 앞으로도 아마 말 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까… 나와 헤어져 주십시오.”
사결은 숨이 막혔다. 존대로 돌아온 말투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 같았다.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때로. 여원의 제안은 일방통행이었고 한 방향으로만 돌아가는 오르골이었다.
“부탁합니다.”
“같이 죽어주겠다고 했잖아. 이제 와 죽기 두려워졌어?”
사결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렸고,
“죽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여원은 웃었다. 모든 걸 내려놓은 웃음이었다. 사결은 여원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자조적으로 휘어진 눈동자에서 그의 영혼에 뿌리박힌 공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