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근방의 모든 도시가 발칵 뒤집혔다.
특히 귀환자를 둘이나 보유한 그리샤는 금방이라도 폭동이 일어날 기세였다. 크레딧 길드 앞에는 피켓을 든 시위대가 진을 쳤다. 문구는 자극적이었고 퍼포먼스는 불을 동반했다.
유리창 너머로 그 꼴을 보던 사결은 상당히 어이없어했다. 이현수는 더욱 분개했다. 태도가 어떻게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거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수해 토벌 사실은 어떻게든 감췄어야 했다고 소리쳤다.
“이제 겨우 쉬나 했더니 일거리가… 일거리가 늘어났….”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여원의 귀에 닿았다. 그는 못 들은 척했다.
언론에선 연일 ‘전령’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가 지목한 게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진 게 없다고 둘러댔지만,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이수영을 제물로 바칠까.”
마계 이름 윈슬럿. 본명 이수영인 남자가 구석에서 고개를 홱 돌렸다. 동공은 강도 9의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이수영 씨 저기 구석에 계십니다만.”
“아.”
이현수의 지적에 사결이 정말 몰랐던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당황은 잠시였다. 그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 건은 나중에 이야기하지.”
본인이 없을 때 그를 저 성난 시민들에게 던질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윈슬럿이 동아줄을 찾아 매달렸다.
“여, 영주님. 살려주세요!”
무릎을 꿇은 그가 팔로 여원의 허리를 휘감았다. 문제는 여원보다 체격이 작다 보니 얼굴이 애매한 위치에 비벼지게 됐다는 거다. 여원은 난감해하며 윈슬럿을 떼어내려 했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의 악력은 꽤 대단했다.
이현수는 생각했다. 저 인간은 꼭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눈치 때문에 단명했을 거라고.
그가 잡은 동아줄은 아주 튼튼한 줄이었지만 그 줄과 연결된 건 사람이 아니라 식인 호랑이였다. 사결은 화를 내는 대신 해사하게 웃었다.
“저 새끼가 미쳤나.”
* * *
크레딧 길드는 조용했다. 그들이 나서는 건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신 협회가 나섰다. 반파된 건물을 수습할 새도 없었다. 비교적 멀쩡히 살아남은 직원들이 시민들 앞에 섰지만 큰 효용은 없었다.
사람들은 끓는 물처럼 득시글거렸다. 내내 쌓여만 가던 불안이 폭발한 탓이다.
이제 게이트는 더 열리지 않는다.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마족이 남긴 말 때문에 이제 시민들도 게이트의 원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알게 됐다.
게이트의 본체는 마계에 있으며, 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여닫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건 마소 중독 환자들 전원의 목숨이 저쪽에 잡혀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환자 본인이나 가족에게 진정하고 기다리라는 말이 통할 리 없다.
시위는 벌써 엿새째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나흘 남은 건가.”
크라투스가 준 유예는 열흘이었다. 장소는 백담의 어딘가. 정확한 좌표까지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여원은 그곳이 마왕성의 깊숙한 곳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결은 윈슬럿에게도 재차 확인했다. 백담이 맞다. 여원을 믿지 못해 한 행동이지만 그에 관해선 사결도 여원도 말을 얹지 않았다. 특히 잠깐 다른 곳을 말할까 고민했던 여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상황은 급류에 휩쓸렸다. 물살은 거칠었다. 저항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정도만 다를 뿐 모두가 좁은 운명의 강폭을 따라 흘러갔다.
시위는 하루가 갈수록 과격해졌다. 화염병이 던져지고 불법 총기류가 등장하더니, 오늘 드디어 과격파가 크레딧을 공격해 들어왔다. 선두에 선 건 헌터들이었다.
육체강화계 헌터들이 저지선을 무너뜨렸다. 뒤이어 마력운용계의 속성 공격이 이어졌다. 땅에선 폭죽처럼 불길이 쏘아지고 바닥은 얼어붙었으며 신기루와 같은 공기의 칼날이 쇄도했다.
그 꼴을 상층부에서 내려다보던 사결이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멍청이들.”
시위대의 헌터는 기세등등해서 1층으로 진입했다. 깨진 유리를 밟고 거칠 것 없이 밀고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범상치 않은 기세의 헌터들이 시위대를 맞았다. 카운터에 걸터앉거나 기둥에 기대서는 등 제멋대로 흩어져 있음에도 마치 대열을 맞춰 선 것 같은 느낌이다.
기세와 위압감 때문이었다.
크레딧 헌터들은 탐스러운 먹잇감을 보는 맹수의 눈으로 유리 조각을 밟고 선 시위대 헌터들을 훑어봤다. 그들 사이로 윤혜리가 나섰다.
“저지선을 넘은 과격 시위 인원을 제압한다. 가능한 부상자 없이.”
“‘가능한’이란 말이죠? 가능한.”
낄낄거리는 웃음이 곳곳에서 터졌다.
“…내가 말을 잘못했다. 최대한. 부상자 없이.”
“라져.”
곧 폭발과 함께 헌터들이 밖으로 튕겨 나갔다.
“크윽!”
“아악!”
시위대에 속한 헌터의 공격이 먹힌 건 급습했던 처음 한 번뿐이었다. 크레딧의 헌터들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들었다.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고 있음에도 상대가 일반인 혹은 하급 헌터라 여태 소극적인 자세만 취하길 엿새째. 그들은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차라리 마물을 상대하는 게 낫다고 하면 옆 사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게 바로 오늘 아침이다. 헌터가 이렇듯 선을 넘어주니 그들로선 오히려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답답해 뒤지는 줄 알았네!”
“감사함을 담아 두들겨 패 주마!”
아주 고삐 풀린 짐승이 따로 없었다.
제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시위대 헌터들은 전원 제압당하고 구속구가 채워졌다. 여기저기 피멍이 들었지만 그들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보듯 원망과 분노가 들어찬 눈으로 노려봤다.
“거 뭐시냐. 좀 심하게 때린 감이 없잖아 있긴 한데 그렇다고 그렇게 볼 것까지야….”
“너희에겐 이 모든 게 장난인가?”
그 질문에 이번엔 크레딧 길드원들이 발끈했다.
“장난이라니. 우린 진지하게 일하는 중이다.”
“맞습니다. 지금은 엄연한 근무 시간이고 저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난이라뇨. 선을 넘은 발언입니다. 당장 사과해 주십시오.”
“웃기는군. 우리는 피눈물을 쏟으며 여기까지 왔다.”
맨 앞에서 달려왔다 가장 먼저 포박당한 헌터가 사납게 뇌까렸다.
뻔한 소재가 뒤를 이었다. 가족이었다. 그들 모두가 마소 중독 환자와 가까운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크레딧 헌터라고 다르지 않다. 곧바로 반박하려던 이들은 이어진 말에 입을 다물었다.
“너희는 괜찮겠지. 크레딧 길드 소속이잖아.”
“그게 무슨 소리지? 마정석을 가공할 수 있는 기술과 설비가 있는 곳이 적어 크레딧이 가져가는 비율이 높을 뿐, 중화제로 가공된 후엔 균등하게 분배-”
“그만 말하지? 가증스러우니까. 그건 게이트가 사라지기 이전에나 통하던 논리고. 너희가 계속 침착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줄까? 크레딧 소속이니, 수틀려도 가장 마지막까지 마정석을 공급받을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있어서야. 어디 한 번 부정해 보시지. 머릿속 어딘가에서 무의식으로라도 생각한 적 없다고 한번 말해 보라고!”
비난하는 말에도 지목당한 헌터는 화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순간 멈칫하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도 몰랐던, 정말로 크레딧을 ‘믿는 구석’으로 여기고 있던 걸 알게 돼서다.
사내가 신랄하게 비웃었다.
“크레딧 길드의 마정석은 많을 뿐 무한하지 않아. 과연 이 빌어먹을 길드에 보관된 마정석이 다 떨어져 갈 때, 너희끼리 어떻게 사람을 걸러낼지 아주 궁금해.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한데 우린 너희보다 절박해서 말이야. 귀환자를 내놔. 그럼 모든 게 깨끗하게 해결된다.”
“절박함을 무기처럼 내세우지 마. 이 좆같은 새끼들아. 그건 그냥 네 쓰레기 같은 감정에 불과해. 설령 그따위 것에 어떤 정당성이 있다고 한들, 남을 제물로 바치는 데 그게 계속 남아 있을 것 같아?”
부서진 복도 너머에서 사결이 걸어 나왔다. 무표정으로 신랄한 말을 쏟아낸 그가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발을 굴렀다.
“너흰 그냥 저급한 깡패 새끼들이야.”
콰자자작!
그의 발치에서부터 하얀 뱀처럼 뻗어져 나간 얼음이 시위대 헌터 앞에서 폭탄처럼 터졌다. 뒤로 튕겨 나간 헌터가 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아무렇지 않게 상반신을 일으킨 그가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무저항인 상대에게 공격이라니. 드디어 본성이 나오네.”
“닥쳐 새끼야.”
퍼억!
어느새 앞에 나타난 사결이 발로 명치를 깠다. 남자는 그대로 기절했다.
“입에 얼음을 처넣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말은 바로 하라고, 내 본성은 이제 나온 게 아니야. 난 원래 이랬어.”
맞는 말인데 좀. 사장님 제발 좀.
헌터들이 우울한 낯으로 현장 정리에 나섰다. 사결은 여전히 속이 끓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거슬렸지만, 가장 짜증 나는 건 따로 있었다.
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