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콰득.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자국이 생기고 그림자가 뒤로 밀렸다. 차크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눈만 굴려 무기 상태를 확인한 그림자의 시선이 여원의 뒤편을 향했다.
두 사람과 달리 사결과 후드의 공방은 후드가 우세했다. 여원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결이 이를 악물고 신음할 때마다 온 신경이 그에게 쏠렸다.
흐트러진 집중은 틈새를 만들었다. 도끼에 재차 차크람을 맞댄 그림자가 불쑥 물었다.
“그림자의 본분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주인의 발치에 얌전히 붙어 있다가, 주인이 죽으면 같이 죽는 것.”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군요.”
그림자의 표정이 일순 오묘해졌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주인이 원하는 바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그게 대대로 용마족을 섬겨온 저희의 존재 의의입니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그림자가 이런 건 또 안 변하셨다며 키득거렸다. 불길한 웃음이었다.
“제 주인께서 바라는 게 뭔지 잊으신 건 아니겠죠?”
여원의 뇌리에 섬광이 스쳤다. 그림자는 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렇다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시간이라도 끄는 거냐고, 별생각 없이 던졌던 말이 뒤늦게 뒤통수를 잡아챘다.
스아아-
그림자는 순식간에 그림자로 변해 사라졌다. 사결을 맞상대하던 놈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딱 붙은 검은 형체들은 좁은 문틈을 가볍게 비집고 들어갔다. 견고한 철문은 제 쓸모를 다하지 못했다.
“사결!”
“제기랄!”
그가 다급하게 단말기를 패드에 댔다.
삐리릭.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철컹, 철문이 열렸다. 문을 부술 듯 밀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환하게 쏟아지는 빛에 시야가 방해받았다. 피로 새겨진 마법진 속 인영은 이미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예니스 님.”
콰아아!
여원이 빛 속 그림자를 향해 있는 힘껏 도끼를 던졌다. 회전하며 날아간 도끼는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를 지나쳐 반대편 벽에 맞고 떨어졌다.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남은 건 쓰고 남은 마법진뿐이었다.
끝났다.
완벽하게 당하고 말았다. 여원이 문 옆의 벽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쿵!
특수합금으로 제작된 벽이 움푹 팼다. 그 한 방으로 터진 주먹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아픈 줄도 모르고 두 번을 더 쳤다.
그들은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었다. 밖에 있던 이들은 안에 들어간 자가 일레이스의 시신을 챙기고 게이트를 열 준비를 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남아 있던 것이다. 여원이 침통함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뒤에 있던 사결이 얼른 달려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왜 죄 없는 주먹을 혹사해.”
흠칫한 여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뭐가?”
“내가… 판단을 잘못했다.”
사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여원의 손을 살피며 미간을 찌푸린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꼼꼼히 지혈했다. 그게 끝나자 다른 데는 어디 상한 곳이 없는지 여기저기 더듬거렸다. 나중엔 한 바퀴 돌아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지은 죄가 있어 여원은 고분고분했다. 팔을 살짝 벌린 채 제자리에서 빙 돌았다. 사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상태에서 팔 조금만 올려봐. 살짝 둥글게 벌리고….”
뭔가 미세조정을 한 사결은 조각상을 감상하듯 이리저리 신중하게 살펴보더니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가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네 어머니의 시신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사결은 벌어진 팔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여원을 마주 끌어안았다. 당황한 여원의 팔에 사결의 등과 허리가 딱 감겼다.
“네 잘못 아니야. 수해에 가자고 한 건 나였어.”
그의 삶을 여기까지 견인해 온 어머니의 시신이 사라졌는데, 사결은 오히려 차분히 자신을 위로했다. 여원은 그게 견딜 수 없었다. 뒤늦게 그를 밀어냈다. 그러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움직임은 품 안의 바르작거림으로 끝났다.
사결은 연인이 좀처럼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흠, 어떡하지. 일부러 들려주려는 것처럼 중얼거린 그가 굉장한 해결책을 제시하듯 시원스레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네. 역시 내가 그놈을 죽여줄게.”
여원의 뇌리에서 무언가 뚝 끊겼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있는 힘껏 사결을 밀쳤다. 순식간에 떨어진 몸이 두어 발짝 물러났다. 사결은 물끄러미 여원을 봤다. 드물게 격양되고 일그러진 낯이었다. 그가 여태 봐온 것 중 가장 크게 동요한 모습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요소로 그렇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넘어갔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나…!”
숨까지 헐떡이며 그렇게 말한 여원은 금방이라도 울 기세였다. 몸의 떨림도 그대로다. 진정하려고 하는데,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듯했다.
물러났던 사결이 다시 여원을 향해 다가갔다. 두 번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자리 잡은 그가 평온하게 말했다.
“네 말대로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같이 죽어줄게.”
“……!”
얼마나 놀랐는지 떨림까지 멎었다. 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약속했잖아. 끝을 보면 그 후에 뭘 할지 같이 고민해주겠다고. 다시 말하지만 난 그 새끼 죽일 거다. 솔직히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뭐, 네 말대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널 순순히 넘기는 짓은 안 할 거야.”
속내를 털어놓은 사결의 목소리는 후련하기까지 했다.
“죽음 같은 건 사실 조금도 두렵지 않아. 정상은 아니지. 나도 알아. 최근 들어 조금 무서울 때도 있었는데… 그게 내 죽음은 아니었어.”
“같이 죽는다며.”
“음, 그럼 살짝 먼저 죽는 걸로 할게. 하지만 넌 살 수 있으면 살았으면 좋겠다.”
그게 뭐야.
무언가 견딜 수 없어진 여원이 이를 악물었다.
“헛소리하지 마. 차라리 내가 발버둥 치겠다. 가슴의 가죽을 다시 뜯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저항하겠다. 그러니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 나보다 먼저 죽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사결이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그래. 바로 그 말을 기다렸어.”
* * *
그로부터 이틀 뒤.
주변 모든 대도시에서 게이트가 열렸다. 일레이스의 시신을 강탈하러 온 걸 봤을 때, 정보원이 있을 거란 건 예상했다. 이미 다른 도시로 빠져나갔는지 색출 작업에도 걸리지 않았는데, 지금 중요한 건 일개 정보원의 소재가 아니었다.
게이트에선 마족이 나왔다. 일전의 그림자와 달리 평범한 마족이었고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바로 알아봤다. 노예들끼리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신경에서 스파크 같은 것이 튀었다.
“저 녀석. 나와 같아.”
사결은 그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종속의 계약을 새긴 마족은 왕의 전령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왕의 말을 전했다.
길게 늘여 말했지만, 요지는 단순했다. 왕이 원하는 건 하나뿐이다.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누군가를 돌려받는 것. 유예는 열흘. 그가 지정된 장소로 온다면 다시는 중간계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도움이 필요하다면 협력하겠다. 적당한 마물을 끊임없이 공급해주겠다.
“거부한다면 대군을 이끌고 차원을 넘어가 중간계를 멸망시키고, 마땅히 내 손에 있어야 할 걸 직접 되찾겠다. 현명하게 판단하는 게 좋을 거다.”
전언이 끝난 후 마족은 자살했다. 촬영하던 이들도, 용기를 낸 구경꾼도, 맨 앞에 선 헌터들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가 죽은 자리엔 양피지가 한 장 남았다. 녹지 않는 얼음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시일과 장소였다. 둘 다 마계가 기준이다.
결국 이걸 알아보고 장소를 유추할 수 있는 건 나나 윈슬럿 정도다.
‘놈은 윈슬럿에 대해 모르니까. 나를 겨냥하고 보낸 거야.’
전언은 중간계 모두를 향한 경고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정확하게 날 짚어 전한 말이었다. 네가 오지 않으면 네 세계는 멸망한다.
생각해라. 생각해.
여원은 파업을 시도하려는 뇌를 어떻게든 움직였다. 한 번 발동한 게이트는 일방통행이다. 넘어온 마물은 다시 넘어갈 수 없고, 게이트를 닫는 방법은 그 마물을 죽이는 것뿐이다.
크라투스가 넘어오면 그는 되돌아가지 못한다. 그만한 질량을 되돌려 보낼 게이트석이 중간계엔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건 뭘 의미하는가.
여원의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 곧이라도 속에 있는 걸 게워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왕성에서 보낸 매 순간 그의 광기를 절감했지만, 지금 다시 한번 그가 미쳤다는 걸 뼈에 새겼다.
넘어온다는 말은 진심이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크라투스는 정말로 넘어올 셈이다. 일레이스의 시신을 탈취한 건 바로 그걸 위해서다.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거야.’
아예 여기 눌러앉아서 중간계의 새로운 주인이 될 생각이다. 심지어 그건 덤에 가까운 계획이다. 진짜 목적은 하나.
자신이다.
턱. 단단한 손이 어깨를 움켜쥐었다.
“안 돼. 생각도 하지 마.”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냐고 묻진 않았다. 기이한 침묵 속에 누군가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 시선은 마족이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두고 있던 곳으로 향했다. 헌터가 포진한 방어선의 맨 뒷줄. 사결과 나란히 선 여원이 거기 있었다.
“귀환자.”
누가 맨 처음 그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원은 조금 놀라웠다. 패닉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철저히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석해 정답을 도출한 사람이 있다니.
마냥 감탄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동한다.”
사결의 제안에 여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속하게 몸을 빼기 무섭게 현장에서 소란이 일었다. 거친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굳이 귀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불안에 잠식당한 군중은 모두 한 사람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