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레프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무리한 속도로 달린 탓인지 짧은 거리였음에도 피로도가 이미 한계에 달한 듯 보였다. 여원은 그런 레프의 목덜미를 문질러 격려했다. 안쓰러워도 지금은 쉬게 해줄 수 없었다.
쿠구구.
콰르릉.
현장에 도착하자 허공에 뜬 인영이 보였다. 익숙한 복식, 익숙한 기운. 여원이 입 안의 살을 세게 물었다. 피 맛이 혀를 자극하자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등에 있던 도끼를 손에 쥔 여원이 레프 위에 섰다. 갈기가 기다렸다는 듯 움직여 여원의 발목과 허리를 휘감아 고정했다.
여원은 분명 레프를 철저히 애완동물로 대했다. 하지만 레프는 타고난 맹수이자 싸움꾼이었고, 무엇보다 똑똑했다. 그는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유려한 근육을 가진 마수는 검은 번개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한 건물의 외벽을 타고 올랐다. 마족이 둘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뒤통수가 쪼개진 후였다.
비명도 못 지르고 절명한 시체가 아래로 추락했다. 뒤늦게 여원을 알아차린 다른 마족들의 운명도 같았다.
콰직!
콰곽!
레프가 옆을 스칠 때마다 여원은 정확히 머리를 찍어 내렸다. 순식간에 밖을 지키던 세 마족이 죽었다. 남은 건 내부를 헤집고 있는 다섯.
개중 익숙한 인기척을 발견한 여원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크릉.
레프가 의아함을 표했다. 여원은 잠깐 갈등했다. 사결은 이제 막 도시에 진입한 상태다. 그래도 레프타를 탔으니 몇 분 기다리면 여기까지 오겠지만 놈들은 이미 지하 깊숙한 곳에 가 있었다. 저기서 게이트를 열어 되돌아가면 모든 게 끝장이다.
크라투스는 부족한 게이트석을 일레이스의 시신으로 충당해 이곳으로 넘어오겠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손을 아래로 향한 여원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힘을 개방했다.
새까만 공허가 시추 기계처럼 바닥을 단숨에 뚫어 지하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냈다. 마족들의 바로 머리 위까지 떨어지는 최단 경로였다. 레프는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에 의심도 없이 몸을 날렸다.
콰드득.
콰지직.
어느 정도 떨어지자 갈기가 사방으로 퍼지며 벽에 박혔다. 돌가루와 함께 속도가 줄었다. 바닥에 당도한 레프타가 앞발로 아래를 내리찍었다.
얇은 층이 무너지며 둘은 매끈한 통로로 떨어졌다.
파직. 파지직.
스파크가 튀는 형광등이 희미하게 주변을 밝혔다. 터진 수도관에서 흘러나온 물로 바닥이 흥건했다. 이미 한차례 전투가 있었는지 쓰러진 헌터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물에 섞여들었다.
여원이 레프에서 내려섰다.
차박. 물에 닿은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통로에는 다섯의 인영이 그림처럼 서 있었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여원의 목덜미는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이 뒤의 밀실에 일레이스의 시신이 있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한 마족이 앞으로 나섰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후드를 뒤로 젖히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보자 작은 충격이 일었다. 여원이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그림자.”
그림자는 정말 놀란 것을 봤다는 듯 눈썹을 위로 들었다.
“세상에, 말을 다 하시네요?”
“…….”
“하긴, 여기서 생활하려면 하긴 해야죠. 그래도 의외긴 합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고작 몇 년 만에 입이 트이시다니.”
“…….”
“그래도 가능하면 제게 말 거는 건 삼가주세요. 예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그림자인 저도 당신이랑 말을 섞었다간 뒤를 장담할 수가 없거든요.”
그림자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눈은 어둡고 공허하다.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 피폐해진 눈에 여원은 크라투스의 만행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두려움에 구역질이 났다. 그는 마른침과 함께 많은 걸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당신의 죽음이 꾸며진 일이었고, 사실은 도망이었다는 걸 안 왕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죠.”
“너야말로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 시간을 끄는 중인가?”
“이상한 소릴 하시네요. 그건 오히려 예니스 님 아니십니까.”
해묵은 이름이 귀를 자극했다.
오래된 노래에 이끌리면 그 노래를 듣던 순간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처럼, 저 이름으로 불리던 무렵의 감각이 거대하고 질긴 천처럼 한 꺼풀 여원을 덮었다.
양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떨리는 손끝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이건 좋지 않았다.
그림자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마네킹처럼 서 있던 마족들이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이 일제히 여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네 개의 후드 망토가 펄럭이자 좁은 복도가 꽉 들어찼다.
“레프. 물러나!”
레프가 위로 뛰어올라 들어온 구멍으로 되돌아 나갔다. 강하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물의 기준일 뿐. 마족, 그것도 정예 중의 정예인 마왕의 그림자를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레프는 영리했고, 자신의 존재가 여원에게 오히려 방해만 될 거란 걸 알았다. 녀석은 안절부절못하며 전투를 지켜봤다.
여원은 등에 갈무리했던 도끼를 뽑아 들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힘은 이미 사용했다. 아까부터 화상을 입은 것처럼 가슴팍이 화끈거렸다. 흐릿하던 계약이 강해지고 차원 너머 제 영혼을 틀어쥔 주인이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무시했다. 허공에 생겨난 둥근 공허들이 후드들의 신체를 잡았다. 하지만 정말로 잡힌 건 딱 한 명뿐이었다.
여원은 그 하나만이라도 허리를 끊어 죽이고, 바로 앞까지 짓쳐들어온 나머지 셋을 상대했다. 도끼날이 휘둘러질 때마다 검은 반월이 벽을 할퀴었다. 날에 스민 공허가 치명상을 예견했다.
스치기만 해도 전투 불능이 될 가능성이 컸다. 뒤에서 지켜보던 그림자가 혀를 찼다.
“그분을 제하면 마계에선 아마 당신이 가장 강할 겁니다. 그만한 전투 특화는 저도 본 적이 없어요. 군단장이라는 직급이 아깝지 않을 힘인데, 왕의 총애 때문에 손에 쥐인 꽃 신세라니. 솔직히 안타깝군요.”
개소리였다.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았나?”
“당신에게만 적은 편이었죠. 실수로라도 대답했다간 무슨 험한 꼴을 당할 줄 알고요.”
“그런 것치곤 나불나불 잘도 떠드는군. 아까는 겁이 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당연히 거짓말이죠. 당신을 잡아다 진상하기만 해도 면죄부가 될 텐데 뭐 하러.”
콰곽!
소리 없는 단도가 옆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누가 저놈 수하 아니랄까 봐, 후드들의 공격은 은밀하고 섬뜩했다. 앞에서 날아드는 현란한 공격에 정신을 뺏기면 척추를 노린 칼날이 어느새 등 뒤에 와 있곤 했다.
여원은 오랜만에 옛 추억에 잠겼다. 크라투스를 만난 것보다도 더 오래전, 수많은 죽음이 무가치하게 널려 있던 전장의 감각이 세례처럼 정수리부터 퍼부어졌다.
콰드득!
“크윽!”
희미하게 남아 있던 망설임이 사라졌다. 여원의 손속이 잔인해졌다. 거대한 도끼가 단검이라도 된 것처럼 좁은 복도를 사납게 휘저었다. 좁고 숨을 곳 없는 공간은 후드들에게 불리했다.
몰아치는 협공으로 그 사실을 감추고 수적 우위를 점해보려 했으나, 그것도 여원이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기 시작하자 늑대의 습격을 받은 토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겨우 다시 달려들길 반복했다.
콰자자작!
타이밍 좋게 사결까지 나타났다. 여원의 생각보다는 조금 늦은 당도였다.
“한참 헤맸네. 이 구멍 설마 네가 뚫은 거야?”
여원은 고개만 끄덕이고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사결은 그 상대에게 얼음을 날리며 나른하게 웃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내 애인은 진짜 능력도 좋다니까.”
대답은 그림자에게서 나왔다.
“연인이 있으셨습니까.”
전투로 피가 조금 끓었을 뿐, 내내 잠잠하던 심중이 미친 듯이 파도쳤다. 여원은 반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니야.”
“…아닙니까?”
사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원을 돌아봤다. 그게 다였다. 쓸데없는 말은 없이 나중에 설명하라고 눈짓했을 뿐이다.
“흠. 뭐 그러시다니 그렇다고 치죠. 전 그냥 거슬리는 놈이 주변에 있더라 정도로만 보고 하겠습니다.”
보고 대상이 누군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여원은 ‘접근 저지’였던 목표를 좀 더 능동적인 것으로 수정했다.
“사결.”
“음?”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새끼는 죽여야 한다.”
“잠깐. 너 방금 욕한 거야?”
눈을 크게 뜬 사결이 대치하던 후드를 얼음덩어리로 후려쳐 벽에 처박곤 여원의 곁으로 달려왔다. 옆에 선 그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속삭였다.
“미쳤네. 존나 섹시해! 나중에 둘만 있을 때 다시 들려줘.”
“…….”
할 말 많은 표정이 된 여원은 도끼를 쥐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골이 다 지끈거렸다. 그림자가 시원하게 웃었다.
“역시 거짓말이었잖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지.”
도끼를 꼬나쥔 여원이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었다. 사결이 아래로 뛰어내리며 얼음을 발출했다. 여원을 향해 달려들던 후드들이 복도 벽과 하나가 되어 얼어붙었다.
콰직.
빠캉!
마물과 달리 단순히 얼린다고 해치울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잠깐 움직임을 저지하는 걸로 충분했다. 그림자를 향해 쇄도하던 여원이 가볍게 도끼를 휘둘렀다. 단검처럼 가볍게 스친 도끼가 고정된 이들의 목을 반쯤 잘라냈다.
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살아남은 건 다른 동료보다 한발 먼저 얼음에서 벗어난 한 명뿐이었다. 사결이 허공에 띄운 얼음칼이 그에게 쉼 없이 날아갔다.
그 사이 바로 앞에 당도한 여원이 한 손엔 공허를, 다른 손엔 도끼를 들고 그림자를 공격했다. 그림자는 망토 아래 어둠과 그림자를 두르고 여원을 맞상대했다.
공허가 어둠을 삼키고 어둠은 그때마다 다시 태어났다. 그림자는 제 그림자로 차크람을 만들어 손에 쥐었다. 도끼와 차크람이 부딪칠 때마다 검은 스파크가 튀었다.
우세한 건 여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