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가 세상 모든 역경과 고난을 짊어진 사람처럼 홀로 썩어갔을 때, 엘리베이터 옆에 있던 문이 큰 소리와 함께 열렸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건 수해의 뒤처리를 맡은 헌터였다. 얼굴이 아주 새파랬다. 보통 심상찮은 일이 아님을 셋은 직감했다.
“무슨 일이야.”
사결의 물음에도 헌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벌벌거리며 벌어진 입이 한 음절을 반복했다.
“마, 마, 마,”
“마?”
“마족이 나타났습니다!”
투드득.
여원이 사결을 밀어내며 얼결에 잡고 있던 옷자락이 그대로 뜯어졌다. 정장 조끼는 물론이고 안에 있던 흰 와이셔츠까지 찢겼다. 사결은 당황했다. 그러나 여원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소식을 가져온 헌터에게 붙박여 있었다.
종속의 계약.
사결의 뇌리에 한발 늦게 그 사실이 떠올랐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 사결이 너덜거리는 옷을 벗어 던졌다. 이현수가 집무실과 연결된 별실로 가서 여분의 셔츠를 꺼내왔다.
사결이 힐긋 여원을 훔쳐봤다. 평소였으면 가장 먼저 나왔을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그럼에도 섭섭하긴커녕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여원.”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고개가 삐걱거리며 자신을 돌아본다.
“여기 있어.”
“아니. 나도 간다.”
사결은 화를 한 번 눌렀다. 대신 여원을 남길 가장 효과적인 말을 내밀었다.
“혹시 그 새끼가 넘어왔으면 어쩌려고.”
“그럴 리 없어.”
여원은 단호했다.
“정말 넘어온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야.”
더 말려봤자 듣지 않을 기세였다. 말은 삼킨 사결이 헌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안내해.”
* * *
급한 이동이라 인원수는 적었다. 당장 움직일 수 있는 크레딧의 최상급 전력만 동행하게 됐다. 윤혜리 팀장과 신재현이었다.
유성은 다른 도시에 파견을 나간 상태다. 수해가 해결되고 그리샤 내의 게이트가 전부 사라져 인원을 차출했던 게 문제가 됐다.
‘이제 와서 생각해봤자 의미 없어.’
대신 의외의 인선이지만 마족이 관여됐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를 사람이 한 명 추가됐다. 크레딧 연구팀의 게이트 파트에 배치됐던 윈슬럿이다.
등급 문제로 드론도, 레프타도 이용하기 어려웠던 그는 결국 여원과 함께 레프에 탔다. 사결의 눈에서 잠깐 불똥이 튀었다 사라졌다. 그러곤 흥분했는데 안 한 척하는 삽살개처럼 레프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허리 꽉 잡지 마라, 옷만 살짝 쥐어라, 달라붙지 마라 등등 근엄한 표정으로 전혀 근엄하지 못한 첨언을 하다 여원에게 쫓겨났다.
어슬렁거리는 맹수에게 노려지는 것 같은 반응이던 윈슬럿은 사결이 사라지자 그제야 혈색이 돌았다. 그는 이동 중에 여원과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게이트였다.
여원은 윈슬럿의 생각도 저와 같은 걸 듣고 술렁거리던 마음을 다소나마 진정시켰다.
마족이라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다시 말해, 강한 놈들은 쉽게 넘어오기 힘들다는 것. 마왕의 계보를 뒤져도 상위에 위치할 크라투스는 힘든 걸 넘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윈슬럿의 의견이었다.
“게이트를 넘어오는데 고려해야 할 건 크게 두 가지입니다. 대상이 가진 힘과 물리적인 크기.”
연구팀에 들어간 후 진전이 있었는지 윈슬럿의 설명엔 거침이 없었다.
“차원을 넘을 때 힘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물리적인 크기도 만만찮게 방해가 되는 요소입니다. 거대한 벽을 젤리처럼 바꿔 통과하는 힘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수해에 있던 거대형 S급들은 아마 어릴 때 넘어와서 20년간 성장한 케이스일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사결이 말을 거들었다.
“확실히. 게이트에서 S급이 튀어나온 적은 있지만 거대형이 나온 적은… 적어도 내 기억엔 없군.”
“덩치가 큰 놈들은 낮은 등급에서도 출현 빈도가 낮을 겁니다. 그만큼 크기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습니다.”
“크라투스는 보통 인간형으로 생활해. 그럼 넘어올 때 별 의미가 없지 않나?”
“아뇨. 여긴 아직 추측의 영역이지만 차원의 ‘젤리 벽’은 분명 본체를 기준으로 작용할 겁니다.”
이쪽 분야에선 어지간히 뛰어난 연구원도 한 수 접어주는 사람의 발언이다. 맹신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의 위로 정도는 됐다. 윈슬럿이 화제를 돌렸다.
“혹시 용마족의 본체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초상화로만 봤다.”
“전 있습니다.”
놀라 윈슬럿을 돌아봤다.
“제가 막 문관으로 일을 시작한 무렵, 거대한 용이 영지로 날아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영주가 바뀌었죠.”
“…….”
어쩐지 기억에 있는 이야기였다.
여원은 측근이었던 기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 전전대 영주가 왕족이었다고 했다. 게이트에 관심이 있어 문서까지 남겼는데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고.
크라투스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문서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지금 와선 그게 일레이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거대했습니다. 뭘 상상하시든 그 이상일 겁니다. 그런 몸으로는 절대 게이트를 넘어올 수 없어요. 마계에 있는 게이트석 대부분을 손에 넣는다면 모를까.”
윈슬럿은 불가능하다는 걸 전달할 취지로 저런 말을 했겠지만, 듣는 여원은 철렁했다. 반대로 말하면 게이트석 대부분을 손에 넣었을 땐 크라투스가 이쪽으로 건너온다는 뜻이었다.
그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눌렀을 때, 옆에 바짝 붙은 사결이 물었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는데, 그 새끼가 용이라고?”
“본체는 그렇다. 평소엔 마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용? 드래곤?”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
사결은 잠깐 말이 없었다. 여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룡을 닮은 놈들이 수해를 헤집고 다니는 마당에 용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아니, 뭔가 판타지의 상징 같은 녀석이라 여태 판타지로 생각했다고 해야 하나? 근데 마물은 현실이잖아.”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여원은 그냥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다 와 갑니다!”
내내 뒤에 있던 이현수가 소리쳤다. 사담은 그만두고 경계하라는 뜻이었다. 레프가 천천히 멈춰 섰다. 현장은 시체로 가득했다. 발견 당시만 해도 비교적 멀쩡했던 저택이 반파되고 화마에 휩싸여 있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여원의 낯이 굳었다. 주변 어디서도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확인할 필요도 없는 전멸이다.
그때, 여기까지 일행을 인도한 헌터가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사, 살려준다고 했잖습니까! 살려주….”
퍼억.
벌벌 떨던 헌터의 머리가 갑자기 터졌다. 전기가 끊긴 안드로이드처럼 남은 몸뚱이가 맥없이 쓰러졌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죽음에는 익숙하다. 여원에게 낯선 것은 ‘당했다’는 감각이었다.
당했다.
“빌어먹을!”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사결이었다. 그가 재빨리 방향을 틀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원도 윈슬럿을 챙겨 레프의 갈기를 쥐었다. 레프는 앞서가는 사결을 단숨에 따라붙었다. 남은 일행도 뒤늦게 말머리를 돌렸지만 두 사람을 따라잡진 못했다. 여원은 레프의 등에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생각해라.
생각해.
저들의 목적은 내가 아니었나? 왜 굳이 이런 짓을 한 거지? 전력의 대부분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대체 뭘 하….
불길한 깨달음이 갈고리처럼 뒤통수를 긁어내렸다.
“사결. 네 어머니, 지금 어디 안치되어 계시지?”
“길드… 지하.”
사결의 목소리가 떨린 건 바람 탓이 아니었다. 여원의 질문에서 모든 걸 이해한 그가 이를 악물었다.
“레프. 더 빨리.”
여원이 레프의 등을 문지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네 한계를 보여줘.”
크르릉.
레프가 앞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을 둘이나 태웠는데도 동료보다 빨랐다.
“잠깐. 여원! 속도를 늦춰!”
여원은 못 들은 척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지금 막아야 했다.
“여원!”
레프가 앞으로 쏘아졌다. 사결은 레프타의 갈기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재촉해도 이게 이 녀석의 한계임을 안다.
수해 틈새로 여원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 뒷모습에서 이상하게 비공정에서 몸을 던지던 모습이 겹쳤다.
‘아니야.’
그때와는 다르다. 여원은 떠나려는 게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지.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별 소용은 없었다. 갈기를 움켜쥔 사결이 이를 악물었다. 사납게 부딪친 이에서 불편한 소리가 났다.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얼마 후 레프가 도시에 다다랐다. 격벽 너머에서 봐선 알 수 없었다. 레프는 멈추지 않았다. 벽면을 평지처럼 달려 드높은 격벽을 넘었다.
다른 곳에 비해 짧고 좁은 외곽을 지날 때까지도 별 이상은 없었다. 눈 덮인 평야, 차가운 아스팔트, 가끔 도로를 지나는 차체. 아무 일도 없다.
멀리서 솟구친 검은 연기가 여원의 신경을 거슬렀다. 크레딧 길드 본관과 헌터 협회가 있는 곳이었다.
시가지가 가까워지자 상황은 일변했다. 비명이 들렸다.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 파편과 불타는 자동차가 보였다. 시체와 부상자는 도로에 널브러져 있다.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망연히 앉아 있거나 흐느껴 울었다. 소화전이 터지고 곳곳에 불이 났다.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도 무섭도록 단말기에 열중한 몇몇을 발견한 여원이 레프 위에서 단말기를 켰다.
수해에선 정말 필요한 기능 외엔 먹통이던 단말기가 곧 그가 원하던 정보를 토해냈다.
속보로 올라온 새빨간 글씨의 기사. 거기엔 크레딧 길드가 마족에게 습격당했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여원의 낯이 어두워졌다. 사실 진작 보였어야 할 길드 건물 상층부가 보이지 않았다. 건물이 있어야 할 자리엔 매캐한 연기와 빈 허공뿐이다. 거기서 두 블록을 더 가고서야 겨우 철골이 드러난 끄트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콰광!
그마저도 곧 무너졌다. 빗금이 그어진 것처럼 사선으로 쪼개진 몇 개의 층이 아래로 떨어졌다. 여원은 레프를 멈춰 세웠다.
“윈슬럿. 넌 여기서 내려라.”
윈슬럿은 순순히 내렸다. 두렵기도 했고, 상대가 마족이라면 가 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걸 알아서다. 그는 대신 불안한 표정으로 여원의 무운을 빌었다.
“영주님, 조심하세요.”
여원은 ‘나는 영주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그래.’하고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