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알려줬다.
자신의 의지로는 죽을 수 없다는 것. 존재의 목적이나 이유도 없다는 것. 그저 남겨졌고 의식이 있기에 거기 있는 것뿐 유일한 욕망이라고 해봐야 원래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인데.
“아들을 죽일 순 없으니 아쉬운 대로 [공허]를 불렀다. 그 공허가 설마… 아들의 연인일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그리샤에 벌어진 대재난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으시다는 거군요.”
일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폭주와 대규모 게이트 사태는 분명 같은 시간 선에 있었다. 서로 연관이 없을 수가 없는데, 모른다니.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공허를 회수하지 못하게 된 건 안타깝지만 다행인 것도 있구나. 새아가. 네게 전할 말이 있다.”
제발 새아가 소리는 그만둬달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얼마 전부터 마계에 있는 내 형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일레이스의 형제.
“크라투스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 심장에 있는 것에 대해선 묻지 않으마.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거니까.”
“…….”
“녀석이 마계의 파편을 미친 듯이 쓸어 모으고 있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넘어오려 하는 것 같구나.”
그녀가 손을 뻗었다. 창백하고 차가운 손가락이 내 손등을 덮었다.
“내 [시간]을 가져가렴. 그리고 나 대신 크라투스를 막아다오.”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를 꽉 물었다.
“제 심장에 뭐가 새겨져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안다.”
일레이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네 공허를 가져가면 너는 죽어버리고 말아. 새아가인 걸 몰랐으면 모를까. 그럴 수야 없지. 나는 일레이스가 아니야. 그러니 허울뿐인 흔적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보단 사결과 함께 살아갈 널 지키는 게 옳다.”
자신이 일레이스가 아님을 주장하면서, 그녀는 누구보다 어머니 같은 말을 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일레이스는 대답 없이 웃었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날 제외한 주변 공간의 밀도가 높아졌다. 단단하고 투명한 젤리에 갇힌 기분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하다못해 사결은 보셔야죠! 아니, 당신의 시간을 그에게 넘기면 되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여기 들어올 수 없어. 이렇게 짙은 마기는 혼혈의 몸이 견딜 만한 게 아니야.”
나보다 긴 시간을 고민했을 일레이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거기엔 어떤 체념도, 슬픔도 없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안도만이 가득했다. 더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부디 내 남은 흔적을 그 아이에게 전해주겠니.”
데운 물처럼 따뜻한 기운이 그녀에게서 내게로 흘러왔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이자마자 나는 그녀의 손부터 꽉 맞잡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목이 메는 것도 같아서 그 이상의 말은 하지 못했다. 일레이스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결을 잘 부탁한다. 새아가.”
지금이 저 말을 정정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는 대신 빛 입자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하는 그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예. 제가 꼭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놀란 듯 조금 크게 뜨였던 눈이 둥글게 휘었다. 미처 듣지 못한 말이 가슴에 닿았다. 긴 세월 홀로 수해의 심부를 다스렸던 얼음 여왕이 떠났다.
파앗.
온 세상이 빛에 잠겼다.
* * *
여원과 사결이 떠나고 얼마 후, 레프가 홀로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헌터들은 당연히 사색이 됐다. 뭔가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졌다는 걸 모두가 직감했다.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일단 물러나서 재정비해야 한다는 이들과 당장 두 사람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전자는 다른 길드의 정예들이었고, 후자는 크레딧 소속 S급들이었다.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종래엔 개처럼 서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재정비 파의 저항이 거셌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상황을 냉정하게 봐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이현수는 대뜸 크레딧의 S급 두 명을 호명했다.
“전유성. 신재현.”
이름이 불린 두 사람이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개처럼 차렷 자세를 취했다.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원인은 헤스티아 사건이었다. 보통 때였으면 적당히 갈궈지고 말았을 걸 하필 그런 일이 벌어져 일주일간 철저하게 물어뜯긴 탓이다. 그 기간 제일 신나게 채찍질을 해 댄 인간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출발.”
번개처럼 튀어 나간 두 사람이 한가로이 마물을 질겅거리던 레프타의 등에 올랐다. 기세가 어찌나 사나운지 신경질을 내던 레프타가 찔끔해서 묵묵히 달리기 시작했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뭐가요?”
“예?”
“전 ‘출발’이라고만 했는데요.”
“그, 그걸 말이라고!”
이현수가 펄쩍 뛰는 다른 길드 S급을 향해 삐딱하게 섰다.
“당신들이야말로 여기까지 오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우리 길드장이랑 귀환자님 없이 심부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당장 겁먹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징징거리는 당신네가?”
“이건… 잠깐 재정비를 하자는….”
“재정비하고 나면?”
타 길드의 S급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현수가 웃는 낯으로 이죽거렸다.
“도움 안 될 거면 닥치고 가만히 있어. S급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뭐? 이게 미쳤나?!”
그는 씩씩거리면서도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화난 척해도 이성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다. 주변에서도 어설프게 말리는 척만 했다. 아주 가관이었다.
그 꼴을 보는 이현수의 인내심이 아주 가늘어질 무렵, 굉장히 모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몇 명 더 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희만으로는 말리기 역부족입니다.”
“……?”
누군가가 위험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묘하던 둘의 표정이 숫제 떨떠름해졌다.
“위험한 게 있냐고 물으시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긴 한데.”
“그 위험한 게 저희 길드장이라서요.”
“……??”
결국 S급 대부분이 레프타에 올랐다. 유성과 재현을 선두로 현장에 도착한 S급들의 입이 벌어졌다.
콰아아.
가까이서 본 심부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저 보는 것뿐인데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여태 그들이 겪었던 미로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콰광!
콰지직!
사결도 있었다. 그는 서슬 퍼런 기세로 마기의 벽을 향해 공격을 쏟아냈다. 그때마다 스파크와 함께 심부의 일부가 거칠게 꿈틀거렸다. 기겁한 S급들이 일제히 사결에게 달려가다…가 멈췄다.
눈이 돌아 있다. 함부로 접근했다간 그대로 갈려 나갈 거란 게 느껴졌다.
“사, 사장님. 일단 진정하세요! 진정!”
“공격이 통하지도 않잖아요!”
사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반응이 없었다. 무표정하게 공격을 때려 박다가 가끔은 아예 블랙미스트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저런 미친!”
하지만 실패였다. 통상의 블랙미스트와 달리, 심부는 밀도 있는 젤리처럼 그를 튕겨냈다. 사결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걸 보자마자 튀어나온 이현수가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섰다.
“이게 대체….”
사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숨을 몰아쉬며 이를 까드득 갈았다. 숨이 차다니. 대체 얼마 동안 이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를 돌아본 이현수가 멈칫했다.
이 상황이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워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사결은 여태 이현수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으로 심부를 응시했다. 자세히 보니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 번은 안 돼.”
이현수는 알아들었다. 그는 ‘첫 번째’가 뭔지 아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이 심부를 향했다. 최악이다. 저 안에 여원이 있는 게 확실해졌다.
“왜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허망한 읊조림에 뭔가 말하려던 이현수가 입을 다물었다.
“머저리도 아니고 왜 씨발, 같은 일에 두 번이나 당하냐고!”
사결은 이제 아예 심부에 달라붙었다. 양손으로 꿈틀거리는 마기의 덩어리를 쥐어뜯었다. 누구도 말릴 생각을 못 했다. 절규하며 허우적거리는 그를 감히 비웃지도 않았다. 눈이 벌게진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그때, 심부 안에서부터 뻗어 나온 손이 미친 듯이 표면을 긁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다. 슬그머니 손가락을 가져다 댄 것에 가까웠다.
거짓말처럼 움직임이 멎었다. 반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사결이 허겁지겁 그 손을 마주 움켜쥐었다. 쑥 당기자 당황한 여원의 상반신이 심부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결?”
“…….”
“괜찮나?”
전혀 괜찮지 않았다. 사결이 그를 와락 끌어안고 뒤로 쓰러졌다. 당근처럼 뽑힌 여원이 그의 몸 위로 엎어졌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눈만 끔벅이던 여원은 가늘게 떨리는 사결의 몸에 비로소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됐다.
“걱정 끼쳐 미안하다.”
사결은 대답이 없었다. 꽉 얽은 팔에 말없이 힘을 더할 뿐이었다.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일도 잘 해결됐다. 무슨 말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여원은 입을 다물고 사결을 도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