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끼익.
양손에 힘을 줘 문을 열어젖혔다. 내부는 본래 무도회라도 열렸을 것 같은 거대한 홀이었다.
정렬된 기둥과 높은 천장, 물결을 그리듯 2층에서 안쪽으로 난 테라스. 벽면은 높은 아치형의 거대한 창문이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샹들리에가 있어야 할 자리엔 별 무리가 모여 화려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너머는 밤하늘이었다. 어둡게 빛나는 구름이 천장 가장자리를 떠돌았다.
“드디어.”
머리가 아닌 공기를 통해 목소리가 날아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의 중간. 양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자리한 공간에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왼쪽엔 정장을 입은 백골이 널브러져 있었고, 오른쪽엔 마찬가지로 정장을 입은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
색감도 생기도 없다. 드라이플라워 같던 밖의 식물이 떠올랐다. 그녀에 대한 느낌도 정확히 그와 같았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
그녀는 긍정했다.
“박제된 저택의 주인이 산 자인 것도 우습지 않나.”
“말을… 굉장히 잘하시는군요.”
조각난 단어만 툭툭 던지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유창함이다.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졌으니까.”
무표정으로 답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조이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익숙한 기시감이었다. 그 이유가 곧바로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혼돈의 용마족. 일레이스 레기아투스다.”
“……?!”
상상도 못 한 정체였다. 이름 자체는 익숙했다. 정확히는 몇 번 들어본 것뿐인데도 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잊을까. 무려 ‘레기아투스’라는 성을 쓰고, 내가 중간계로 되돌아오는 데 큰 도움을 준 마족인데.
하지만 내가 몰랐을 뿐, 그녀와의 인연은 그보다 이르게 이루어졌다.
“네가 마계에 넘어가며 삼켰던 건 내 파편이었다. 나는 거기에 공허를 넣어두었다.”
그녀가 일레이스라는 것보다 이게 더 놀라웠다. 그럼에도 나는 역시 그랬구나, 하고 납득했다.
고작 F급이던 여덟 살짜리 어린애가 마계에서 살아남았는데 이유가 없는 편이 더 이상했다. 중간계에선 있는 줄도 몰랐던 속성이 마계에서 갑자기 개화한 것도 그랬다. 그 모든 게 눈앞의 용마족의 힘이었다니. 오히려 그럴듯했다.
“미안하지만 그걸 돌려받아야겠구나.”
그녀가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바닥이 작게 진동했다. 크라투스에 비견될 자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결을 가진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두렵지는 않았다.
“이유가 뭡니까.”
차분하게 물었다. 존대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입을 열자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나왔다. 계단 중간에서 멈춘 일레이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꼭 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두렵지 않느냐.”
두렵지 않다. 분명 두려워야 할 상황이라는 걸 아는데 그렇지 않아 당황스러운 한편, 그 이유도 짐작이 갔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냐.”
“사결을 아십니까?”
일레이스의 무표정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녀의 머리칼이 사방으로 솟았다. 내려오던 계단의 중간이 쩍 갈라졌다.
“그 아이와 무슨 관계지?”
평정을 잃은 그녀가 처음으로 적의를 표출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답이 됐다.
“일레이스. 당신이 그의 어머니였군요.”
마력운용계가 마물을 맨몸으로 찢고 다닐 수 있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사결은 마족, 그중에서도 왕족인 용마족의 핏줄이었다.
‘아마도… 혼혈.’
“죽었다고 들었는데 살아계셨던 겁니까.”
“떠보지 마라.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무표정으로 돌아간 일레이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강대한 힘은 간혹 그 자체로 의지를 갖게 되지. 나도 그렇다. 나는 일레이스 크라투스지만 온전한 그녀의 본신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예컨대 의지만 남은, 일종의 사념체에 가깝다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예견된 일이었고 일어났을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
그녀의 시선이 뒤편을 향했다.
이명환.
가면을 쓰고 있던 사내는 초라한 백골이 되어 의자에 걸려 있었다. 신기하게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비공정에서 뛰어내릴 때만 해도 증오에 견딜 수 없었는데, 지금은 온 신경이 잠잠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적한 바를 이루고 맞이한 허탈함과도 다르다. 왜지? 그렇게나 괴로워하고, 그렇게나 가슴을 썩였는데. 왜?
답은 나오지 않았고 관심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시선이 계속 일레이스를 향했다. 그녀에 대한 걸 밖에 있는 사결에게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구나.’
내 모든 이야기의 끝. 그 이후를 함께 고민해주겠다던 남자는 어느새 ‘이후’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이제 네가 대답해라. 그 아이를 어떻게 아는 것이냐.”
“…….”
당신 아들이랑 진지한 교제 중입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답이 목에 걸렸다. 내가 머뭇거리자 일레이스의 눈이 차가워졌다.
“상관없다. 직접 보면 그만이니.”
훅 사라진 일레이스의 신형이 바로 앞에 나타났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덮었다. 뒤늦게 뿌리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잠-”
무형의 손가락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강렬했던 첫 만남부터 소파에서 서로 몸을 기대고 잠들었던 날까지. 거의 모든 날이 스쳐 지나갔다. 개중엔 그렇고 그런 일도 있었다. 일레이스가 소스라쳐 손을 뗐다.
“…….”
“…….”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반갑구나. 새아가.”
적의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나를 대하는 태도도 훨씬 조심스러워졌지만, 차라리 적대하시라고 하고 싶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아 다행이었다.
* * *
이명환의 뼈다귀를 구석에 처박았다. 빈 의자에 앉아 일레이스와 마주했다. 그녀는 좀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애매하게 눈을 피한 채로 일레이스는 22년 전의 일에 대해 털어놨다.
예상대로 원흉은 이명환이었다. 그는 일레이스의 파편으로 게이트를 열어 인위적으로 귀환자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문제는 혼돈의 속성이었다. 이명환은 그걸 그냥 편리하게만 생각한 모양인데, 그건 아주 거대하고 위험한 힘이었다.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마땅할 힘을 계속 잘라내고 재단했으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라는 일레이스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혼돈은 결국 그녀의 의지를 벗어나 폭주했다. 이 거대한 수해는 그 폭주의 결과물이었다.
“잠깐만요. 그럼 천 개의 게이트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대화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바깥 상황을 설명하자 일레이스의 표정이 굳었다.
“나도, 내 파편도 중간계에 있지 않나. 여기서 열린 게이트는 여기 것을 마계로 보낼 뿐. 마계의 것을 이쪽으로 가져올 순 없어.”
“그럼 중간계의 파편들은 대체 누가-”
오래전에 보았던 하늘의 틈에서 나를 엿보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미지의 시선. 등골이 오싹한 기분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일레이스는 아마 이전 세대의 용마족 중 누군가 남긴 게 아닐까 추측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 가능성이 제일 컸다.
“그럼 크라투스도 제힘을 떼어내 게이트를 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진 않다. 게이트를 여는 힘은 혼돈의 고유능력이야.”
“예?”
“편의상 [혼돈]이라고 부르지만 그건 [공허]와 [얼음], [시간]으로 이루어진다. 그중 둘은 너와 사결에게 있지. 내게 남은 건 [시간]뿐이다.”
박제된 것 같던 식물과 사용감이 느껴지던 저택의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이미 죽은 사람이고,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아니, 애초에 [시간]의 힘이 있는데 어째서 무력하게 당하기만 한 거지?’
“그렇게 볼 것 없다. 편의상 [시간]이라 부를 뿐. 네가 생각하는 그런 전지전능한 힘은 아니다. 크라투스가 압도적인 무력이라면 내 건 상대하기 까다로운 무력이지.”
속을 읽힌 것에 놀라자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념체라는 게 원래 그렇다.”
그녀는 사념체에 대해 간단히 알려줬다. 생각을 읽는 것, 감정이 무뎌지는 것, 과거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것.
무례하고 독선적이라는 말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내가 본 그녀는 고아하고 우아하며 배려가 넘쳤다. 다만….
“당연히 인간성은 결여되고 연민 같은 것도 가지지 않지.”
이건 사념체라서가 아니라 사결의 어머니라서 그런 것 같은데.
“음,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 같구나.”
“…….”
맞다. 생각 읽을 수 있었지.
뒤늦게 흠칫하자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희미해서 보고도 헷갈릴 그런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