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가끔 수해 위로 솟구쳐 비행형 마물을 잡아먹던 마수였다. 목격했을 때 예상하긴 했지만 여태 본 어떤 마수보다 크기가 컸다. 어지간한 빌딩 한 채다. 놈들이 빠져나온 게이트도 그랬다. 드물게 바닥에 붙어 있었는데 크기가 거의 호수만 했다.
그 앞에 선 사결이 혀를 찼다.
“설마 두 마리일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말이지. 해체하고 마정석 뽑는 데만 일주일은 걸리겠는데.”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출몰하는 마수 수준이 급격히 상승했기에 B급은 전원 그리샤로 돌아갔다. 대신 졸지에 공략조로 따라왔다가 어느새 후처리조가 된 A급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다시 가지.”
여원이 드물게 의욕을 보이며 제안했다. 잠깐 쉬어가자고 하려던 이들이 뭐 씹은 표정이 됐다. 그들이 어떻게 좀 해보라는 듯 이현수를 봤다.
뭐. 시발. 뭐.
퀭한 안색의 성격파탄자가 되어버린 그가 살벌한 눈으로 좌중을 노려봤다. 헌터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견이 합치됐다.
강행군이 이어졌다. 의외로 우는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다치거나 전투에 영향을 미칠 만큼 피로도가 쌓이면 후방으로 빼거나 도시로 돌려보내 주는 데다가, 누구보다 전투 피로도가 높을 두 사람이 가장 앞에서 싸우니 더는 뭐라 첨언하기가 어려웠다.
S급은 특히 그랬다. 상중하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같은 등급이 아닌가. 그들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토벌에 도움이 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일주일. 헌터들은 의외의 포인트에서 현타를 느꼈다.
“난 솔직히 내가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허벅지 부상으로 잠깐 후방으로 빠진 재현이 앞을 턱짓했다.
“저걸 보니 정상의 범주에는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
그가 ‘저걸’이라며 가리킨 문제의 현장은 사결이 미쳐 날뛰는 현장이었다. 오랜만에 등급이 낮은 마물이 등장했다. 문제는 수였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지네의 몸에 개미 머리를 가진 사람 크기만 한 놈들이었는데, 족히 수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게다가 등급이 낮다는 것도 심부에서 낮은 편이라는 거지, 하나하나가 A급은 되는 녀석들이었다.
히힝!
푸르릉!
레프타는 오랜만에 신이 났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어떤 곳보다 직관적으로 적용되는 마계에서 그들은 폭군으로 살았다. 만만한 놈들은 짓밟아 잡아먹고, 저보다 강한 놈들은 빠른 발로 따돌리면서 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심부에 진입하며 내내 구석에서 벌벌 떨었으니 스트레스가 여간 쌓인 게 아니었다.
개미 지네는 원래 마계에서 만났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가야 할 놈들이었다. 물량과 연대. 놈들은 수백 마리씩 무리 지어 다녔는데, 한 놈이라도 습격을 받아 죽으면 무리 전체가 살해자를 추적했다.
하지만 레프타는 겁도 없이 무리에 뛰어들어 발굽으로 머리를 짓이겼다. 믿는 구석이 있는 탓이다.
콰자작!
콰직!
파도처럼 덮친 얼음이 순식간에 놈들을 얼렸다. 그 틈새로 검은 그림자가 빗살처럼 스쳐 지나갔다. 남은 자리엔 깔끔하게 머리가 부서진 기괴한 얼음조각상만 남았다.
재현이 허탈하게 말했다.
“남들은 놀이공원이나 핫플레이스에서 노는데, 저분들은 마수를 찢으며 데이트하네.”
“…….”
다른 의견도 있었다. 윤혜리가 감탄하는 건지 어이없어하는 건지 모를 어조로 혀를 찼다.
“사랑이 위대하긴 하구나.”
사결은 맨손으로 마물을 때려잡는 걸 선호했다. 이유는 손맛이 좋아서. 그걸 들은 사람들은 다들 윤혜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낚시도 아니고.’
‘미친 사람이다. 미친 사람이야.’
사결은 좆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던 그가 지금은 후방에서 마력운용계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보조로 날개를 단 것처럼 달려 나가는 여원을 향해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을 보내면서.
“…나도 연애나 할까.”
“티, 티, 팀장님이요?”
“연애요? 진심이십니까?!”
후처리가 되어 개미 더듬이를 줍고 다니던 팀원들이 기함했다. S급 중 유일하게 전투 보조로 일하던 윤혜리가 해사하게 웃었다.
“이유.”
그녀의 손에 들린 도전이 공명음을 토했다. 제대로 된 이유가 나오지 않으면 목과 머리를 분리해 주겠다는 의지가 절절히 전해졌다.
“상대가 누가 됐든 팀장님이 아까울 것 같아 말이 헛나왔습니다!”
“부족한 몸인 줄 알면서도 감히 고백하려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날 것 같던 반응과 달리 각 잡힌 대답이 돌아왔다. 윤혜리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더 뭐라 하지 않았다. 안정됐다곤 해도 전투 중이다. 돌발 상황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었다.
“너넨 나중에 보자.”
윤혜리가 살짝 대열이 흐트러진 곳을 발견하고 달려갔다. 팀원들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력으로 가장자리를 짓눌러 포위망을 형성한 이현수는 그 모든 걸 지켜보고도 동요조차 하지 않았다.
“수해까지 기자가 못 들어와 다행이지.”
목격담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런 걸론 저 ‘제정신이 아닌’ 느낌이 완벽히 전달되지 않는다. 옆에서 중얼거림을 들은 헌터는 침묵했지만 깊이 동감했다.
한편 여원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심부로 들어오며 점점 눈에 익은 녀석들이 보이기 시작해서다.
바로 얼마 전에 본 드래고니아부터 지금 맞닥뜨린 개미 지네까지.
‘숲에 살던 놈들이야.’
정말로 자신의 영지가 가까워졌음이 피부로 체감됐다. 동시에 이명환의 저택도.
끼에엑!
케엑!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해가 저물었다. 사결은 이럴 바엔 공룡 같은 녀석이 다시 나타나는 게 더 나았을 거라며 혀를 찼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매하게 강한 놈들이 물량만 많아서 외려 시간을 더 잡아먹었다.
‘이런 놈들은 마기를 뿜는 방식을 사용하지도 않고 말이지.’
무리로 이루어진 체급에 자신이 있으니 둥지를 틀지 않고 돌아다닌다. 여하간 까다로운 상대였다.
다행히 그 뒤론 고만고만한 S급들을 마주했다. 진짜 심부로 진입하자 마기의 농도는 상당히 옅어졌다. 검은 벽도 줄었다. 수해의 사방이 탁 트인 곳이 잦아지며 더는 여원이 홀로 블랙미스트에 들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도 오지 않게 됐다.
토벌대는 스며들 듯이 안으로, 더 안으로 들어갔다. 헌터들은 여전히 농담하고 장난도 쳤지만, 눈빛이 굳었다.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다. 정말로 머지않았다는걸.
그 며칠 뒤.
새로 자리 잡은 베이스캠프로 정찰조가 돌아왔다.
“저희가 보고 온 게… 아무래도 심부인 것 같습니다.”
정찰조 대장이었던 유성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원과 사결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지체없이 레프타의 등에 올랐다. 레프가 드물게 투레질했다. 매끈한 근육질 등이 굳어 있었다. 여원은 거기서 레프가 느끼는 공포를 알아차렸다.
폭군이나 다름없던 녀석이 이런 반응이라니.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들어 심부를 봤다.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잊고 있던 충동이 돌연 강해졌다.
아니, 잊은 게 아니다. 스며들 듯 동화해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에 한숨을 닮은 목소리가 섞였다.
여기다.
그래 여기야.
여기로 와….
“여원!”
여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안색을 확인한 사결이 낯을 굳혔다.
“안 되겠어. 돌아가자.”
“괜찮다.”
“그런 말은 네 얼굴을 직접 보고 해.”
“아니. 정말 괜찮아.”
여원은 사결이 뭐라 첨언하기 전에 말을 가로챘다.
“돌아갈 순 없어. 오히려 심부를 내 눈으로 봐야…. 그래야 괜찮아질 것 같아.”
“…….”
저런 말을 듣고 어떻게 더 말릴 수 있을까. 혀를 찬 사결이 조금 앞서 나갔다. 저보다 앞서나가는 다른 레프타에 레프가 크릉거리며 목을 울렸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경직이 풀렸다.
그나마 다행이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목을 쓰다듬었다. 여원의 허리를 감은 갈기에 꽉, 힘이 들어갔다.
수해는 원래 과거 도심지였던 곳이다. 대재난 때 대부분 파괴됐지만 간혹 무너지지 않은 건물이나 반파된 빌딩이 남아 있었다.
선두에 선 유성이 향한 곳도 그런 빌딩이었다. 레프타는 빌딩 외벽을 혈관처럼 휘감은 덩굴을 거침없이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윗부분이 조금 부서졌을 뿐, 비교적 멀쩡히 남아 있던 고층 건물의 꼭대기에 당도하기까지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저건….”
굳이 가리킬 필요도 없었다. 빌딩 상부에서 보이는 풍경에 사결은 말을 잃었다.
쿠르릉.
콰릉.
거대한 마기의 덩어리가 지상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냥 봐도 심상치 않다. 여러 마리 이무기가 서로 몸을 꼬아대는 것처럼 마기가 계속 꿈틀거렸다. 거대한 힘이 느껴졌고, 내부에선 간혹 검푸른 빛으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주변은 오히려 깨끗했다. 검은색이라곤 없는 평범한 수해였다. 근거는 없지만, 이 근방의 블랙미스트가 전부 저곳에 흡수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