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10장. 부서진 세계의 끝에 네가 있다.
한숨 자고 밖으로 나가보니 호수가 있던 자리에 산이 생겨 있었다. 새벽 굉음의 정체였다.
얼음산만이 아니다. 숲을 덮었던 눈도 투명한 얼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햇살이 투과한 얼음이 사방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
“오. 노리고 한 건 아니지만 예쁜데?”
허리를 뒤로 젖힌 사결이 이마 위로 손 그늘을 만들었다. 얼음산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분다. 어이가 없다 못해 두통이 일었다. 외곽지대라 다행이었다. 누가 이 꼴을 봤으면 무슨 기사가 났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 사결. 휴가지에서 연인과 사랑싸움? 상대는 크레딧의 귀환자!
- 수해 토벌을 이끄는 두 리더. 연인관계로 밝혀져….
안 그래도 슬슬 알아챈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판국이다. 사결의 눈치를 보느라 자제하는 것뿐. 물밑에선 이미 기정사실화된 것 같다는 말도 들었다.
“뭘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어.”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 사결이 허리에 팔을 감으며 낄낄거렸다.
“어차피 공표할 건데.”
“뭐?”
“안 할 이유는 뭔데?”
그건… 없다. 없지만.
“내가 창피해?”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멈칫하자 사결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안 창피하다.”
뒤늦게 말했지만 이미 늦었다.
“왜. 내가 왜 창피해.”
그건 너 스스로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안 창피하다니까.”
“거짓말은 안 하는 거 아니었어?”
“…거짓말은 아니다.”
그냥 부드럽게 돌려 말한 것뿐.
“네 어떤 부분은 확실히 창피하지 않다.”
“결국 나머지 중엔 창피한 부분도 있다는 거잖아.”
내가 내 무덤을 팠다. 허리를 억죈 팔 힘이 강해졌다.
“말해. 듣기 전엔 안 풀어줄 거야.”
“그래.”
그런 거라면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몸을 틀어 사결을 번쩍 안아 올렸다.
“뭐야?!”
사결이 여태 봐 온 것 중에 가장 크게 당황했다. 허우적거리던 팔이 내 목을 덥석 감았다. 그도 보통 체격이 아니다 보니 이렇게 안아 들자 시선이 훌쩍 위로 올라갔다.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봤자 무표정이라 얼마나 티가 났는지는 모르지만, 서서히 커지는 눈을 보니 웃음 비슷한 건 만들어진 모양이다.
“팔. 안 풀어도 돼.”
“…….”
깜박한 것 같은데 힘은 내가 더 세다. 그 상태로 성큼성큼 예정된 산책에 나섰다. 사결에게서 항복 선언을 듣기까진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 * *
사흘의 휴가를 마친 여원과 사결은 수해의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특이사항이 하나 있었다. 얼마 전부터 불안하던 드론이 기어이 먹통이 됐다. 이전 베이스캠프까진 작동하는데, 그보다 깊이 들어가면 죽어버리는 것이다. 덕분에 레프타와 여원의 몸값이 또 한 번 상승했다.
그 외에는 굉장히 순탄했다. 선두의 토벌대는 예상한 것보다 더 깊숙한 곳까지 진입한 상태였다. 레프를 선두로 한 레프타들의 활약이 눈부셨다고.
“수해의 게이트가 확 줄었습니다.”
“도심에서 열리던 게이트도 거의 전멸 상태예요.”
비상시 운용할 인력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수해에 투입했는데, 그러고도 일손이 남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성과를 내고도 헌터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초조와 불안이 지저분한 포스트잇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멀쩡한 건 뇌 맑은 육체강화계 S급 둘 뿐이다.
쿠쾅!
콰앙!
아주 근처 멀쩡한 땅이란 땅은 다 헤집으며 마수를 때려잡고 있었다. 적은 A급 거대 괴수로 생김은 코브라를 닮았는데 독대신 끈적끈적한 체액을 뱉는 녀석들이었다. 맞으면 단숨에 경화돼서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부술 수도 없었다. 이미 당한 놈이 여럿이다.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다른 헌터들이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아, 이쪽으로 오지 좀 마시라구요!”
“어…어? 쓰, 쓰러진…!”
“으아악!”
“아악!”
콰광!
박제된 헌터와 그들을 구하려던 헌터 위로 빈사 상태가 된 거대 코브라가 쓰러졌다. 다들 상급 헌터들이니 깔렸다고 죽진 않겠지만,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 가능성은 매우 컸다.
사결은 그 꼴을 보더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이제부터 현장 지휘는 내가 맡도록 하지.”
보고를 마친 헌터들이 흩어졌다.
멀찍이서 뭔가 지시를 내리던 이현수가 그제야 가까이 다가왔다. 사흘하고도 반나절.
지랄맞은 상급 헌터들의 고삐를 잡았던 그는 곧 죽을 것처럼 퀭한 안색이었다. 그가 곧 열반에 들 것 같은 표정으로 사결을 봤다. 아주 물끄러미.
사결이 진저리를 치며 인상을 썼다.
“뭔데.”
“아뇨. 그냥 새삼스러워서요.”
이현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있을 땐 뭣 같은데, 없으면 또 아쉽다고.”
“…미쳤나?”
사결이 진심으로 물었다. 이현수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한 놈한테 게이트 하나 닫게 시키면, 다른 놈이 난 더 잘 할 수 있다고 소리치며 아직 정찰도 안 한 수해 내부로 달려가길 반복하는 S급 두 마리. 왜 마물을 베이스캠프까지 몰고 오냐, 제발 집에 가면 안 되냐며 너무 무섭다고 우는 B급 대원들. ‘왜 현장이 난장이냐?’라고 망나니 칼 들고 절 노려보는 원칙주의 헌터.”
“…….”
“-에게 둘러싸여 3일을 보냈는데, 안 미칠 방법 있으면 제가 더 알고 싶네요.”
이현수가 활짝 웃었다. 분명 여태 본 것 중 제일 화사한 웃음인데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보던 여원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도끼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고생했다.”
사결마저도 더는 뭐라 말하지 못했다. 주춤거린 그가 막사를 눈짓했다. 가서 좀 쉬라는 제스처였다.
“수해 토벌하고 나면, 그땐 진짜 사표 낼 겁니다.”
깊은 한숨을 쉰 이현수가 사결을 지나쳐갔다.
“제 빚은 거기까지예요.”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자신 몫의 막사로 들어갔다. 간이침대에 엎어지자마자 잠든 건지 인기척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 사결과 같이 있던 여원은 이현수의 중얼거림을 듣고도 모른 척했다. 대신 아직도 덜걱거리고 있는 사결의 팔을 잡았다.
“우리도 우리가 할 일을 해야지.”
“그래.”
픽 웃은 사결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손을 뻗어 아직 쓰러지지 않은 두 마리의 거대 코브라를 겨냥했다.
콰드드득!
손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거대한 얼음들이 그대로 코브라를 집어삼켰다.
캬오오오!
얼음에 몸을 휘감긴 녀석들이 발버둥 쳤다. 빠직. 콰지직. 두꺼운 얼음에 금이 가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얼음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사결은 이번엔 발을 굴렀다. 바닥을 타고 길게 뻗어진 빙판이 얼음을 타고 올라가, S급 마수의 몸통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콰자작!
수십 개의 하얀 창이 코브라의 몸에 꽂혔다. 귀가 울리는 비명과 함께 꿈틀거림이 잦아들었다. 점액과 피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놈들만큼이나 거대한 게이트의 표면이 일렁거리며 미묘하게 색이 변했다. 곧 닫힐 징조였다. 사결이 시원하게 웃으며 돌아왔다. 헌터들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솔직히 거의 다 잡아가고 있었는데.”
“대체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저거 녹지도 않잖아요. 어떻게 내릴 건데요. 무너뜨리게요?”
“와. 어떻게 내리든 후처리 애들은 다 죽겠네.”
도심에선 한 명의 어엿한 헌터지만, 수해에선 후처리와 보급 담당인 B급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사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급 헌터들이 일제히 딴청을 피우며 분분히 흩어졌다. 홀로 남은 여원이 어색하게 사결을 맞았다.
“굉장했어.”
그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언짢던 마음이 순식간에 녹았다.
다 필요 없다. 햄스터 같은 애인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활짝 웃으며 쪼르르 달려가는 그의 등 뒤로 수군거림이 날아왔다.
“왜 저러셨대요? 아마추어같이.”
“쓸 만한 부위는 점액이랑 질긴 가죽 같던데…점액은 바닥에 다 쏟아지고, 가죽은 구멍 숭숭 뚫리고.”
저 새끼들이 진짜.
애착 인형처럼 여원을 꼭 끌어안은 사결이 결국 한마디 했다.
“고작 얼음에 뚫리는 가죽을 어디다 써.”
“그럼 점액은요?”
“…….”
“이건 외벽 보강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사결이 손을 들어 여원의 눈을 가렸다. 동시에 주변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는 귀신같이 범위를 조절해 여원에겐 영향이 없도록 했다.
치명적인 포자처럼 사방으로 퍼진 얼음이 곳곳에 꽃을 피웠다. 여원을 믿고 깝죽거리던 헌터들이 경악했다. 저런 치사한 방법이…!
뭐라 항의하려던 그들이 뒤늦게 사결의 표정을 봤다. 하반신과 상반신을 분리해 주겠다는 눈빛이 좌중을 훑고 있었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사결이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건수 잡은 건 알겠는데, 적당히 하자?’
‘옙!’
사결은 단숨에 현장을 휘어잡았다. 사흘간의 공백이 거짓말인 듯 개판이던 현장이 순식간에 원래 궤도로 돌아오…진 않았다.
“저, 저거 왜 이쪽으로 와?!”
“사장님 출력이 워낙 세다 보니 마수들이 겁을 먹어서….”
“저놈들 추정 S급이잖아! 그런데 뭔 겁을 먹어?!”
“사장님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아니. 납득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대답한 놈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이 새끼가 상사를 버리고 튀어?!”
“목숨은 하나뿐.”
“그 하나뿐인 목숨 내 손에 끝나고 싶냐!”
여전히 난장판이다.
“끄아악!”
“으아악!”
달라진 건 토벌 속도였다. 지난 사흘간 정신 나간 S급들 때문에 당겨졌던 일정보다도 지금이 더 빨랐다. 사결은 미친 듯이 현장을 휩쓸었다.
이제 심부가 코앞이라 마물은 나오지도 않았다. 맞닥뜨리는 건 최소 A급 이상의 마수들. 거대형이 기본인 S급도 하나 걸러 하나씩 출몰했다. 대응할 수 있는 헌터의 등급이 순식간에 올라갔다.
레프타도 이동을 위한 수단으로만 쓰고 전투에는 투입하지 않았다. S급이 아니고선 함부로 지원도 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토벌대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조커는 사결 하나만이 아니었다.
우왕좌왕하는 헌터들 무리에서 공룡을 닮은 S급 마수를 향해 검은 실선이 그어졌다. 바닥에서부터 솟구친 날카로운 선은 그대로 마수의 미간에 꽂혔다.
콰직!
어지간한 철판보다 두꺼운 두개골이 쪼개졌다. 마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거대한 몸이 모로 쓰러졌다. 어찌나 몸체가 큰지 양옆의 검은 미로에 머리와 꼬리가 닿을 정도였다.
멀찍이서 다른 개체를 잡던 사결이 역시 내 애인이야, 같은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