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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를 잡는 방법 (87)화 (87/106)

87화

  

그중 가장 특별한 것이 된 사람에 대한 고마움도 말이다. 계속 부정적으로만 반응한 주제에 이제 와 감동하자니 민망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이미 날 보고 있던 사결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상의를 훌렁 벗었다.

“…….”

기다려라. 그거 아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흠. 그럼 그런 마음이 들게 하면 되지.”

이봐.

“잠깐….”

쪽.

입술이 아니라 입가에 닿는 입맞춤이었다. 그걸 시작으로 사결이 녹진하게 달라붙어 오기 시작했다. 말할 게 있는데. 심지어 중요한 말인데. 

그런 생각들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나는 침묵한 채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냥,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그만.’

가슴을 식게 만드는 불길한 가정을 떨쳐냈다. 때마침 사결의 손이 내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갈비뼈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손길에 집중했다.

“얌전하네?”

“그래서 싫나?”

“아니. 좋아 미치겠어.”

씩 웃는 사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식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를 왈칵 끌어안으며 나는 내 욕망을 마주했다.

놓고 싶지 않다.

“여원?”

가지고 싶다.

“왜 그래?”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 너무나 쉽게 나왔다.

“안아줘. 나도 네가 좋아 죽을 것 같으니까.”

“……!”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숨과 온기가 얽히는 밤이었다.

* * *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새벽 어스름이 눈꺼풀을 두드리는 날.

원치 않게 잠에서 깨면 한동안 천장만 봤다. 방은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정적과 분위기로 꽉 차 있다. 영주성에서도, 백담의 원룸에서도 공평하게 느꼈던 그 압도되는 느낌이 지금은 없다.

따뜻한 물에 잠긴 듯 평온하게 누워 눈꺼풀을 깜박이고 있으려니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렸다. 옆에 누워 있던 사결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깨운 건가?”

“아니. 내가 먼저 깼어.”

피식 웃은 그가 손끝으로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보고만 있어도 좋아서, 계속 보고 있었어.”

“…….”

모든 날의 새벽과 같지만, 오직 지금 이 한순간뿐일 새벽. 나는 마침내 말할 준비가 끝났음을 알았다.

“사결.”

“그래.”

“네게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

준비가 끝났다고 없던 용기가 생긴다는 뜻은 아니다. 절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갈무리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에 이미 해야 했을 말이다.”

“그런 말 같은 건 없어.”

사결이 목소리를 따라 떨리기 시작한 내 손을 가져가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네가 내게 꺼내는 순간이, 그 말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순간이야.”

새삼 절감했다. 이게 바로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사결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나를 향한 갈망과 맹목에 크라투스를 떠올린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젠 안다. 둘은 비교하는 게 무색할 만큼 전혀 달랐다.

크라투스의 중심에 있는 건 내가 아닌 그 자신이다. 나는 그저 충족을 위한 도구일 뿐. 그의 모든 행동에는 그 자신의 만족감이 우선됐다. 

하지만 나를 원하는 사결에겐 목적이 없다. 그저 내가 있을 뿐.

“이 상흔은.”

사결의 손을 끌어다 심장 위에 얹었다. 거미줄 같은 상흔 아래로 이제 먹색 선명한 종속의 계약이 새겨져 있다.

“내가 직접 만든 거다. 살가죽을 생으로 뜯어냈지.”

“잠깐. 왜 그런 짓을…!”

“그래. 그 이유가 중요해.”

숨을 크게 쉬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계에 떨어져 영주가 된 후, 내게도 재앙이 찾아왔다. 저번에 짧게 말했던 마왕을 만난 일이지.”

그리샤에 끌려온 것과 같이 대비하거나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재해였다. 나는 담담한 어조로 내게 벌어진 일들을 설명했다. 자세한 묘사는 피하고 거대한 사건의 덩어리 위주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그것만으로도 목덜미에 식은땀이 고였다. 가끔 내가 말을 멈추고 눈치를 보면 사결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의 손등과 목엔 새빨간 핏줄이 돋아 있었다. 그렇게 모든 설명이 끝났다.

쿠르릉.

콰드득.

콰직!

땅이 울렸다. 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거대하고 파괴적인 소리였다. 진동이 바닥과 침대를 타고 전해졌지만, 산장은 멀쩡했다.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사결이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줘 저지했다. 

“사결.”

“괜찮아.”

내게 하는 말인지 혹은 그 자신에게 읊조리는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머뭇거리다 다시 누웠다. 사결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의 숨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진동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한 새벽이다.

쉽게 해가 뜨지 않는 겨울. 길게 늘어진 쪽빛 시간에 침잠해 갈 즈음, 사결이 내 위로 자리를 옮겼다. 기둥 같은 두 팔이 내 얼굴 옆을 짚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의아해할 틈은 없었다. 온 신경이 서서히 벌어지는 그의 입술에 쏠렸다. 

“하나만 묻고 싶은데.”

“그래.”

“거기 네 의지는 있었나?”

언젠가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 그대로 되돌아왔다. 차마 ‘없었지.’라고 하지 못했다. 이 뒤에 나올 말이 뭔지 알아서다.

“의지 없이 휘둘린 일에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맞지?”

“상황이 달라. 이건… 전혀 다른 문제야.”

쥐어 짜내듯 뱉은 말에 사결은 오히려 가볍게 대답했다.

“난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데. 오히려 네 쪽이 더 변명의 여지가 있지 않나. 나는 핏줄로 이어진 데다 직접적인 혜택을 받았잖아. 넌 그냥 개새끼에게 물렸고. 그게 그저 현재진행형일 뿐이지.”

그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나쁜 건 널 물어뜯은 그 개새끼야. 네가 아니라.”

종언의 소리를 들었다. 내 안에 쌓여 있던 녹슬고 썩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심지어 난 잘못된 일인 걸 알면서도 옛 자료를 찾아 이용해 먹었는데. 넌 뭘 어떻게 하려고 한 것도 아냐. 그냥 상처 입었을 뿐이지.”

민망하다는 듯 웃은 그가 팔을 굽혀 내 위로 몸을 겹쳤다. 그가 옆으로 뒹굴며 나를 끌어안았다. 덕분에 같이 굴러 침대 구석에 처박혔다. 

등이 벽에 닿았다. 앞은 사결이었다. 그 좁은 틈새에서 피부를 맞대고 있자 몸에서 힘이 풀리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덩달아 무장 해제된 입이 꾸밈없는 질문을 뱉었다.

“가슴에 다른 사람 소유라는 표식이 있는데?”

심지어 이건 그냥 표식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컨트롤러에 가깝다. 다만 주인이 그 존재를 잊고 있을 뿐. 

“음. 그 새끼를 어떻게 죽일 방법이 없나.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싶어지긴 하네.”

“하지 마.”

나는 기겁해서 말렸다. 

“절대. 꿈도 꾸지 마. 그건… 그 녀석은 등급 측정도 불가능해. 그냥 자연재해다.”

“네가 이렇게 길게 말하다니. 그 씨발놈이 굉장하긴 한가 봐?”

“농담 아니다.”

“나도 아냐.” 

몸을 웅크려 공간을 좁힌 사결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하지 말라면 그렇게 할게.”

끌어안은 건 사결인데 오히려 내가 그를 품은 기분이었다. 내게 자신을 던진 작은 강아지 한 마리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때마다 고개가 조금씩 움직이며 내 살갗에 제 뺨을 비빈다.

말은 없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그러다 예정된 순간, 세상의 채도가 변했다. 숲 가장자리를 헤치며 밀려온 햇살이 조용히 산장 안으로 들어왔다. 새벽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아침이 됐다. 

“내가 귀환자가 아니었으면 우린 서로 만나지 못했겠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뱉고 난 후에야 쓸데없는 소릴 했다는 걸 자각했다. 

“아니. 나는….”

“맞아.”

사결은 순순히 긍정했다.

“하지만 네가 귀환자가 아니었어도 난 널 좋아했을 거다. 네게서 위안을 얻고, 네 마음을 원하고, 이렇게 살을 맞대고 눕길 바랐겠지.”

모순이다. 내가 만약 귀환자가 아니었다면? 

‘백담의 흔한 F급이었겠지.’

가진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운이 좋다면 박명석의 밑에서 게이트 후처리 일을 하며 살았을 테고, 사결과는 서로 만나지도 못했을 거다. 그런 뜻을 담아 보자 나를 안은 팔의 힘이 강해졌다. 그가 뿌리내린 생명처럼 나를 얽어왔다.

“분명 눈이 갔을 거야. 처음엔 이유도 모르고 끌려서 냉소적으로 굴거나 못되게 굴었을지 모르지만. 나중에 후회하면서 지금처럼 네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겠지.”

사결이 흠, 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널 쫓아다녔던 게 꼭 귀환자라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 그렇군. 반대야. 귀환자라는 건 쓰기 편한 핑계에 가까웠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들이밀 수 있는 변명거리였지.”

그가 ‘이래도 그런 소리 할 거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봤다. 내가 아무 말 않자 피식 웃은 사결이 팔을 풀고 자리에서 상반신을 세웠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든 내 삶은 너로 귀결됐을 거야.”

“…….”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쓸데없는 걱정도 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 있어.”

투둑.

가득 찬 둑이 터지듯 입매가 허물어지고 눈가가 일그러졌다. 일평생 나를 지켜온 무감함과 체념이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럴게.”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사결이 양손으로 내 뺨을 쥐었다. 바쁘게 움직인 손가락이 내 눈물을 훔쳤다.

“그래.”

그거면 됐어.

사결이 나른하게 웃었다. 지금 막 침대까지 올라온 겨울 햇살과 꼭 같은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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