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곳은 도시 북쪽에 자리한 외곽 지역이었다. 격벽에 맞닿은 침엽수림 전체가 사결의 사유지였고, 게이트가 자주 열려 민간 출입이 통제된 곳이기도 했다.
“이 근방 게이트도 더는 열리지 않게 됐어. 심부에 다다를 때쯤이면 정말로 게이트가 다 사라질지도 모르지.”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숲을 둘러봤다. 과연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나무들이 쓰러진 공터가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인적이 없었음을 증명하듯 모든 공터엔 눈이 소담스레 쌓여 있었다.
“사결.”
“음.”
“말 돌리지 마라.”
미간을 찌푸리며 차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차가 출발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차 꽁무니를 황당하게 보다가, 더 황당한 상황으로 시선을 돌렸다. 겨울 숲. 눈. 오두막. 온통 평화로운 말들이지만 그걸 마주한 내 마음은 전혀 평화롭지 못했다.
“분명 집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
“집 맞아.”
사결이 뻔뻔하게 별장을 가리켰다.
“내 명의로 된 집.”
“…….”
“들어가자.”
어쩐지 차에 타자마자 치댔을 녀석이 얌전하다 했더니.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결은 모른 척 내 팔을 쭉쭉 잡아끌었다. 얄미워서라도 일단 뻗대고 봤다. 그러자 의외로 더 힘주지 않고 설득을 시도한다.
“이미 여기까지 왔잖아. 돌아가는 것도 시간 낭비야. 어차피 이틀은 쉴 예정이었어. 장소만 바뀐 거지.”
아무 문제가 없음을 피력하는 그를 보다 결국 한숨을 쉬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응.”
“이보다 뻔뻔할 수 없다고 느낀 상태에서, 어떻게 매번 더 뻔뻔하게 진화하는 거지.”
“뻔뻔하다니.”
이젠 눈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나른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걸렸다.
“능숙하다고 해 줘.”
“…….”
포기하고 걸음을 뗐다. 사결이 능숙하게 에스코트했다. 백화점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욱 정중한 움직임이었다. 뿌리칠까 하다가 그래,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이 되어 내버려 뒀다.
건물로 들어가니 겉은 산장인데 안은 완벽한 신식이었다. 넓고 쾌적하고 깨끗했다. 나무와 고풍스러운 유리 창문으로 이루어져 있던 겉면만 보면 잘 상상이 가지 않을 모습이다.
“겉과 속의 부조화가 심하지 않나?”
“감성을 살리고 실리도 챙긴 거지.”
사결이 자연스럽게 입 맞추며 내 옷을 벗기려 들었다.
“잠깐만.”
“또 왜.”
그가 대놓고 불만을 표했다. 두 번 말렸다간 오늘 밤 목덜미와 유두가 작살날 것 같은 흉포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물러날 수 없다.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가늘게 진동하는 손끝을 말아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그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는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사결이 내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이 상흔에 대한 건가?”
“…!!”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어떻게 알았지?”
“남은 게 그것뿐이니까.”
누른 손길이 좀 더 은밀해졌다. 옷 위가 아니라 맨살을 더듬는 것 같다. 더 참지 못하고 그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진실을 알고 절망하는 것보단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걸 선호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 그렇지만 난 아냐.”
말을 끝마친 사결이 입을 맞췄다. 혀가 그만하라는 듯 악문 이를 두드렸다. 거짓말처럼 몸에서 힘이 빠졌다. 살짝 서늘한 온기가 표면적을 넓히며 나를 감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에게 꽉 안겨 있었다.
“특히 너에 대한 거라면 그게 뭐든 양보할 생각 없어.”
내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 사결이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쿵!
정수리가 천장에 부딪혔다. 입구 쪽 층고가 낮아 일어난 참사였다. 기겁한 사결이 헉, 하며 팔에 힘을 풀었다. 몸이 쑥 내려왔다. 나는 웃어야 할지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괘…괜찮….”
어깨를 떤 사결이 입매를 들썩였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모습이다. 정색하며 한쪽 눈썹을 위로 올렸다.
“웃어?”
“…죄송합니다.”
둘 다 키가 큰 편이라는 걸 잊어 일어난 참사였다.
후득.
먼지와 조각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자 둥글게 팬 천장이 보인다. 내 정수리 지름과 일치할 구멍이다.
“크흠. 쿨럭. 쿨럭!”
같은 것을 본 사결이 죽을 것처럼 기침했다. 짜게 식은 눈으로 보자 혀를 깨물어가며 진정한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말이-”
이 분위기에 무슨.
“저녁부터 먹지.”
* * *
사람 둘은 거뜬히 들어갈 업소용 냉장고는 싱싱한 식료품으로 가득했다. 이 안에서만 족히 일주일은 버틸 양이었다. 설마 싶어 돌아보자 사결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흘 정도 있다가 돌아갈 거야.”
“그럼 이 양은.”
“부족한 것보단 남는 게 낫지.”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온 그가 냉장고 문을 닫았다. 미끄러진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물 흐르듯 입맞춤이 이어졌다. 입가와 뺨, 목덜미를 가리지 않는 가벼운 키스. 열중하는 사결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사흘도 길어. 아까 분명 이틀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가 데려온 말 새끼들 덕분에 몇 배나 진척됐으니 괜찮아. 미로가 막히면 연락하라고도 해 뒀어. 정 필요해지면 부를 거야.”
저렇게 나오자 더 할 말이 없었다. 픽 웃은 사결이 어디선가 앞치마를 꺼내 착용했다. 앞면엔 하얀 개가 발바닥을 보인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애매하게 물었다.
“직접 할 건가?”
“둘 뿐이니까 직접 해야지.”
그가 여분의 앞치마를 내밀었다. 내 것엔 식빵 굽는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 메뉴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둘 다 할 수 있는 요리가 한정적이었던 탓이다.
“그럼 간단하게 파스타에 고기나 좀 굽고… 샐러드?”
“빵도 있었지.”
“그래. 빵에 잼과 버터만 해도 맛있는 한 끼가 되지.”
사결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난 잼이랑 버터만 있어도 될 것 같긴 해.”
그 말을 하면서 왜 내 가슴을 보는 거지.
도끼눈을 뜨자 어깨를 으쓱한 그가 샐러드용 채소를 씻기 시작했다.
별문제 없을 것 같던 저녁 준비는 시작 5분 만에 문제에 봉착했다.
“파스타를 하려면 면부터 삶아야겠지. 한 봉지 다 쓰면 되나? 물은 얼마나 넣으면 되지?”
“…….”
“소스가 없네. 흠. 토마토는 있던데 그럼 토마토소스로 해야 하나. 만드는 법은… 그냥 다지고 으깨서 양념하면 된대. 그럼 한꺼번에 믹서에 넣고 갈아서 끓이기만 하면 되겠군.”
되긴 뭐가 돼.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이건 글렀다. 감출 수 없는 불길한 기운이 주방에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왜. 문제라도 있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게 진짜 큰 문제였다. 고민을 끝낸 나는 사결의 어깨를 턱 쥐었다.
“사결.”
“음?”
“솔직히 말해라. 요리할 줄 모르지?”
“아니. 할 줄 모른다기보다-”
“솔직하게, 라고 했다 난.”
“…….”
“가서 앉아 있어.”
“아니. 몰라도 할 수 있-”
“앉아.”
시무룩해져서 싱크대 앞을 떠나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긴 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는 지금 무척 배가 고팠고, 실패 후에 라면이나 끓여 먹는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물론 내 요리 실력도 그렇게 출중한 건 아니라 시판 소스는 거의 없이 조미료와 싱싱한 재료만 무한정 넘쳐나는 상황에 부담이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난 적어도 내 주제는 알았다.
‘샐러드 소스는 있으니까 파스타는 냉 파스타로 하고.’
단말기를 열심히 뒤적여 가장 간단한 레시피 위주로 추렸다. 물을 올리고 소금을 약간 넣은 후 타이머를 맞췄다. 이제 남은 건.
‘고기.’
치익.
달궈진 프라이팬에 고기를 올렸다. 부위도 모르는 소고기였다. 그냥 굽고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했는데도 입에서 살살 녹는 걸 보니 비싼 거구나 했을 뿐이다.
맛있는 식사 후, 사결은 내 요리 솜씨를 극찬하며 설거지했다. 민망함에 그만하라고 하자 나중엔 멜로디까지 붙였다.
“내 애인은 파스타도 잘하고~ 스테이크도 끝내주게 굽고~”
결국 성큼성큼 다가가서 옆구리를 후려쳤다.
“커흡.”
그렇게 세게 친 것도 아닌데 엄살은.
주방에 들어온 김에 커피를 내렸다. 설거지를 끝낸 사결에게도 한 잔 주고 거실로 돌아왔다.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에 아무거나 틀어놓고 침대나 다름없는 넓은 소파에 늘어져 시간을 보냈다. 올 땐 반대했지만 일단 온 이상 쉬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도 들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편해.’
몸도 마음도 이렇게 편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상투적으로 생각하다 멈칫했다.
‘없지 않았나.’
그렇다.
지난 삶을 돌이켜보니 몸이고 마음이고 편했던 적이 없었다. 그냥 그게 당연했기에 무감한 채로 살아왔을 뿐.
내 인생의 처음. 그렇게 생각하니 소파에 눕기까지 이루어진 모든 과정이 특별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