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단단한 어깨를 움켜쥔 채 그가 놓아줄 때까지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반응이 오는 아랫도리와 욱신거리기 시작한 배 깊숙한 곳의 감각을 애써 무시했다.
“이 문신. 나 모르게 가서 새로 새긴 건 아니겠지?”
겨우 떨어져 나간 사결이 심장 위를 코끝으로 건드리며 말했다. 그가 어둑한 눈을 했다.
힘을 끌어올릴 때 각오는 했다. 맞이한 결과는 예상한 그대로였다. 고개를 숙이자 이전에 비할 바 없이 진해진 문신이 보였다. 그런데도 마음이 묘할 만큼 차분했다. 중간계로 건너온 직후 흔적만 남아있던 때보다도 더.
차이가 뭔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답은 나와 있으니까.
“이유를 모르겠네.”
눈앞에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짜증을 내는 이 사내의 존재다.
“분명 섹시한데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빠.”
잘생긴 눈썹이 위로 솟았다.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거기다 대고 네 감이 짐승 수준이라 그런 것 같다곤 할 수 없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사결의 표정이 돌연 진지해졌다.
“이제 설명해.”
보이지 않는 벽에 등이 닿았다. 더는 물러설 곳도, 도망갈 구석도 없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헝클어진 머릿속은 잠깐의 변명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답답하다는 듯 타박하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누가 그걸 모르나. 입은 변명을 생각할 때보다 더욱 굳게 닫혔다. 사결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럴 리 없는데, 그게 꼭 나를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급하게 입술을 달싹이자 위로 올라온 손이 내 뺨을 쥐었다.
부드럽게 이끌려 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스스로가 나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가 이런 식으로 굴 때마다 절감한다. 나는 한없이 부스러지기 쉬운 인간이라는 걸.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입맞춤에 모난 가슴이 이리저리 굴렀다.
“겁내지 마.”
“…….”
“왜 겁을 내. 난 지금 화내는 것도 아니고 널 비난하는 건 더더욱 아냐. 그냥 조금 기대가 돼서.”
기대. 그 말의 의미를 곱씹자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사결이 픽 웃었다.
“당연히 짐작했지. 네가 감정에 관해 얼마나 서툰데. 설마 모른다곤 하지 않겠지?”
그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내 응석이야.”
툭.
사결의 고개가 내 어깨에 떨어졌다. 맨살에 닿은 부분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더 떨어질 곳도 없다고 생각했던 심장이 바닥보다 더 깊은 곳에 처박혔다.
“여원. 나는 네 입으로 듣고 싶어.”
거짓말처럼 모든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 말은 곱게 떨어진 열매 같았다. 뭉개지지도 않고, 일그러지지도 않고, 옆으로 눕지도 않은 채. 소중하게 주워주길 기다리는 붉고 탐스러운 과실. 어떻게 손을 뻗지 않을 수 있을까.
“네가, 좋다.”
사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나를 더욱 힘주어 붙들었다. 조금 머뭇거리다 어깨에 있는 손을 더 깊이 넣어 목을 감쌌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내 팔 안에 사결이 담겨 있다.
“아무래도 난 널 좋아한다.”
보통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해야 할 말이 단언이 되자 귀에 들리는 게 조금 이상했다. 내가 과연 맞게 한 건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사결이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눈이 부셨다.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몇 배는 깊어졌다.
“네가 날 수해 심부까지 인도하지 않았더라도 넌 여전히 내 구원이었을 거야.”
“내가 귀환자가 아니었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이렇게 예쁜 걸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리 없잖아.”
사결이 정색했다.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게 그답다고 해야 할지.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민망해서 쉬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화끈거림이 가실 때까지 소파에라도 고개를 처박고 있고 싶은데, 당장 들어야 할 말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말이.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어 두 손으로 사결의 양 뺨을 잡았다. 살짝 누르자 잘생긴 얼굴이 찌그러졌다.
아.
‘찌그러져도 잘생긴 건 어디 안 가는구나.’
누르다 보니 조금 재밌다. 목적을 망각하고 이리저리 만지작거리자 사결의 눈썹이 또 꿈틀했다.
“왜.”
“내가 말했으니, 너도 말해야지.”
“이런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나는 작게 웃었다.
“얼굴이 중요하긴 하지.”
“그렇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어이없다.
“그리고 여기도….”
은근슬쩍 올라온 손이 가슴을 쥐었다.
“무척 소중하지.”
이젠 어이가 없다 못해 대응할 가치를 못 느꼈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 싶어 가만히 두자 사결이 팔로 엉덩이와 허벅지를 받치더니,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무슨,”
어릴 적에도 이렇게 안겨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키도 있고 덩치도 크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답삭 들릴 거라곤 꿈에도 상상한 적 없다. 당황해서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는데 사결이 낄낄거렸다.
“네가 소파에서 말했으니 난 침대에서 말할게.”
그건 무슨 개 논리냐.
항의하려는 입술에 사결이 대뜸 제 입술을 밀어붙였다. 조금씩, 자연스레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말랑한 살덩이가 갈라진 틈새로 혀가 들어왔다.
혀뿌리가 감기고 나를 옭아맨 팔과 몸에 힘이 들어갔다. 등줄기가 떨렸다. 나를 향한 욕망이 느껴졌다. 이다음이 뭔지 아는 허리는 얕게 들썩였다.
크라투스의 손아귀에 잡힌 후, 나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에는 치를 떨었다. 지금도 가끔은 자다가도 소스라쳐서 깬다. 깨면 보이는 게 멀끔한 현대식 천장이 아니라 화려한 벽화가 그려진 중세풍의 방일까 두려움에 떨면서.
“하아, 음.”
몸이 점점 나른해졌다. 적극적으로 응하지 못하는 건 아직 이런 행위가 어색해서일 뿐. 두려움도 거부감도 없다.
한참 만에 떨어진 사결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검은 눈동자 가득 담긴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뗐다.
“생각해보니….”
“생각해보니?”
“네가 맞는 것 같다. 네 말은 침대에서 듣지.”
사결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맑고 청량한 소년 같은 웃음이다. 덕분에 그에게 들린 내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어째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은데.”
“어디 너만 할까.”
“그건 맞지.”
사결이 턱과 목에 연신 쪽쪽거리며 속삭였다.
“다음엔 소파에서만 할 수 있는 걸 알려주지.”
“…….”
소파에서?
그걸?
아니 그야 물론 침대만큼 크고 푹신하긴 하지만, 소파는 거실에 있고 거실 한쪽 면은 도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통유리로 되어 있다.
“유리창은?”
사결은 대답 없이 생긋 웃었다.
고백 2분 만에 나는 내 선택을 의심했다. 이게 맞나. 정말 이 녀석이 최선인가.
그런 내심을 읽기라고 한 것처럼 사결이 몸을 휙 돌려 침실로 향했다. 다리가 워낙 길다 보니 몇 걸음 못 가 등이 침대에 떨어졌다.
끼익!
비싼 매트리스가 두 덩치의 무게에 못 이겨 비명을 질렀다. 사결이 자연스럽게 내 위에 자리를 잡았다.
순간 넋을 잃었다. 내려다보는 것만 신선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본 적 없는 각도면 다 감명 깊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니. 그건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
이 사내 한정으로 너무 쉽게 두근대는 심장에 의문을 가질 무렵, 사결이 귓불을 깨물며 말했다.
“반품은 안 받습니다. 고객님.”
“…….”
* * *
게이트 오픈 초기.
무수한 시도와 시행착오, 실패가 있던 시기였다. 마수와 마물을 길들이기 위한 실험이 진행된 것도 이때였다. 많은 도시에서 다양한 방식이 시도됐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연구는 순차적으로 폐지됐다.
그 후 게이트를 넘어온 것들은 절대 길들일 수 없다는 게 정설처럼 자리 잡았다. 크레딧의 귀환자가 이번에 한 건, 그런 역사의 정설을 뒤집은 일이었다. 시민들은 흥분에 엉덩이를 들썩이면서도 미리 실망했다.
“어차피 또 대리인이나 세워 입장 발표하겠지.”
“거 얼마나 귀한 몸이라고…. 아니, 귀한 몸인 건 알겠는데 배후가 크레딧쯤 되면 적어도 그리샤에선 당당히 나돌아다녀도 되는 거 아냐?”
“이 사람 아예 귀를 닫고 사나. 이번에 헤스티아 길드장 배길수가 그 귀환자 납치하려다 역으로 당해서 죽었잖아.”
“뭐?!”
“헤스티아랑 헌터 협회에서 쉬쉬한 모양인데 그런 사건이 막는다고 막아지나. 몇 명이 익명으로 폭로한 모양이더라고.”
옆에 있던 사람이 동조했다.
“맞아. 헤스티아도 아니면 아니라고 할 텐데, 잠자코 있는 걸 보면….”
직장인 여럿이 모인 카페 테이블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옆에서 아닌 척 듣고 있던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이미 알고서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과 반문한 사람처럼 몰랐다가 알게 돼서 단말기를 무섭게 두드리는 사람. 후자는 메인 포탈에 떠 있는 기사를 보곤 눈을 부릅떴다.
3분 전에 뜬 따끈따끈한 기사였다. 손가락이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귀환자와 관련된 첫 기사는 두 시간 전이다. 폭로했다더니 사실인지 내용이 퍽 자극적이었다.
“어?”
포털 메인의 순위가 바뀌었다. 그는 홀린 듯 기사를 눌렀다. 사실 비슷한 건 몇 번이고 봤다. 전부가 소위 말하는 낚시글이었지만 말이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그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누군가는 알람이 아니라 연락을 받았다.
“뭔데. 왜 문자 안 보냐고? 지금 이야기 중…. 뭐?! 야 끊어 봐.”
격한 반응을 보인 청년이 전투적으로 단말기를 두드렸다. 곧 카페 내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카운터 너머에 앉은 동준도 그중 한 명이었다.
화면에선 한 사람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정식 방송은 아니고 크레딧 길드 산하의 헌터 크리에이터가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이었다. 그럼에도 동시 시청자 수가 무섭도록 치솟았다.
동준은 화면 속 완전히 굳어버린 남자가 누군지 알았다.
‘진….’
2년간 부르던 익숙한 이름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건 아마 뒤늦게 그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된 탓인지 모른다.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등급을 측정하며 알려진 그의 이름은 서여원.
심장에 꽂히는 이름에 동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끝내 저에게 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었는지는 모른다.
다시 연락할 수 있게 됐지만 동준은 묻지 않았다. 그런 것에 연연하는 것 자체가 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증거라 여겼다.
하지만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눈길을 주지 않고 배길까.
이렇게 사랑스럽고.
“…이렇게 잘났는데.”
낯을 일그러뜨린 동준이 손끝으로 작은 단말기 너머 여원을 문질렀다. 스스로가 이렇게 한심하게 느껴질 줄이야. 픽 웃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종이 울리며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맑은 종소리.
여원이 남긴 그 소리를 듣고 아무렇지도 않아질 날이 언제고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