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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를 잡는 방법 (80)화 (80/106)

80화

  

어렴풋이 끝만 잡고 있던 감정을 인정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나와 내 주변을 한 꺼풀 덮고 있던 공기가 변했다. 좀 더 부드럽게. 안온하게.

“많이 안 좋아? 걸음이 자꾸 엇나가는데.”

눈치 빠른 사결이라면 그런 추상적인 변화도 알아차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걸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네가 불편하다.”

“지금 뭐라고?”

“아니. 그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난… 그런 뜻이 아니라.”

결국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처음 중간계에 떨어졌을 때와 같다. 말을 누더기처럼 기워내느니 그냥 침묵하는 편이 더 나았던 시기.

마냥 편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말이 사라진 정적이 무겁고 불편했다.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사결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협회를 나오자 소문을 듣고 몰려온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불안해져 사결의 눈치를 봤다. 사선으로 살짝 올려다보니 그가 나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전엔 마냥 우아하고 달콤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안다.

이건 위험하다.

“나왔다!”

“헉. 지, 진짜 마물… 마수다!”

“‘오늘의 헌터’에서 나왔습니다! 큰 전투가 있었다는데 사실입니까?!”

“옆에 계신 분이 크레딧의 귀환자가 맞습니까?”

대낮인데도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사결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사결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막아서면 힘으로 뚫었다. 아니다. 뚫는다는 것엔 어폐가 있다. 사결은 그냥 걸었다. 무수한 멸치 떼 사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혹등고래나 다름없었다.

“으어억.”

“어억.”

밀린 사람들이 뒤로 넘어져 도미노가 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기자들이 이상을 느끼고 주춤거렸다. 

나 역시 당혹스러웠다. 이프리트에서 직원으로 있던 2년간 난 장님으로 살진 않았다. 사결은 드물지 않게 미디어에 노출됐다. 광고, 프로그램, 뉴스. 그 모든 곳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

기자들도 그걸 알기에 감히 S급에게 이렇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거다. 그런데 최근 사결의 태도는 미묘했다. 무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여유가 넘치는 아이돌에서 갑자기 죄지은 정치인이 된 것만큼의 갭이 느껴졌다. 그 기점이 언제쯤인지 알게 되자 기분은 더욱 묘해졌다.

‘아마… 내가 크레딧에 몸을 의탁한 후부터.’

같은 것을 생각한 기자들의 시선이 이번엔 내게 쏠렸다. 사결이 생긋 웃으며 자연스럽게 나를 가리고 섰다.

“위험하니 물러나세요. 마수들이 길이 덜 들어 날뛸 수도 있습니다. 제멋대로 행동해서 생긴 피해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사결이 말했다.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시끄럽게 떠들며 마이크를 들이밀던 기자들이 일순 주춤했다. 

한 카메라맨이 용기를 냈다. 길드장이라는 건 말은 저렇게 해도 어떤 식으로든 책임질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가 슬금슬금 레프타 쪽으로 움직였다.

그는 현장감 넘치는 사진보단 깔끔하고 기가 막힌 작품을 원했다. ‘사결과 귀환자, 그들을 호위하듯 버티고 선 마수들’을 찍겠다는 의지에 불탔다.

레프는 거슬리는 벌레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아악!”

결과는 부상이었다. 

비싸고 무거운 카메라가 땅에 떨어졌다. 팔에선 피가 솟구쳤다.

미친 듯이 셔터가 터졌다. 영상을 담는 카메라 렌즈는 반쯤 기듯 인파로 몸을 던지는 카메라맨과 그가 남긴 핏자국에 초점을 맞췄다. 

여원은 새삼 중간계의 평화를 절감했다. 헌터도 아닌 인간들이 눈앞에 마수가 있고, 심지어 피를 봤는데 도망치긴커녕 카메라를 들이밀다니. 멍청한 건 둘째치고 생존본능도 없나?

카르르르!

피 냄새에 흥분한 레프타가 일제히 투레질하며 사나운 울음을 토했다. 

“어…?”

그제야 자신이 앞에 둔 게 A급 마물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악!”

“환장하겠네. 진짜.”

사결이 귀찮다는 듯 발로 바닥을 쳤다. 

콰자작!

그의 발에서부터 뻗어나간 얼음이 날뛰는 레프타 무리를 크게 둘러 벽을 쳤다. 그러고도 흥분해서 이마로 얼음벽을 들이받는 애들은 레프가 정리했다.

칭찬해달라는 듯 당당하게 돌아온 녀석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사결이 도끼눈을 떴다.

“뭘 잘했다고 쓰다듬을 받아. 다 봤어. 맨 처음에 문 거 그 새끼잖아.”

레프가 그를 마주 노려보다, 나를 향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살짝 물었다 놓을 셈이었는데, 너무 약했다는 것 같다.”

혹시 이제 와서 못 키우게 하는 건 아니겠지. 있던 자리에 돌려놓고 오라거나? 지레 흠칫해서 눈치를 보자 사결의 표정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크게 다친 사람 없으니 이번만 넘어가겠어.”

바닥에 모로 누워 겉옷으로 지혈하던 기자가 고개를 홱 들었다. 어찌나 어이가 없는지 입까지 쩍 벌린 채다. 나는 못 본 척했다.

허리에 팔을 감은 사결이 슬쩍 힘을 줬다. 저항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다시 걸었다. 바로 옆 빌딩인 길드 건물에 도착할 때까지. 멀리서 찍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도 다가오진 않았다.

“일부러 두고 본 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

날뛰게 한 거구나. 일부러.

내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차가운 손이 예고 없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몸이 크게 덜걱했다.

“내가 분명 오늘은 그냥 안 넘어간다고 했는데. 그 말보다 그런 게 더 신경 쓰여?”

아니. 그냥 잊고 있었을 뿐이다. 계속 잊은 채로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다.

허둥거리며 그의 손목을 잡아뗐다. 슬쩍 노려보자 사결이 무해한 척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주 가증스럽다.

크레딧 길드로 돌아온 후엔 레프와 갈라졌다. 얌전히 있으라고 몇 번 신신당부하자,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얌전히 이현수를 따라갔다. 레프가 앞서자 나머지도 자연히 뒤따랐다.

집에 돌아온 사결은 신을 벗자마자 나를 낚아채 들더니 소파로 직행했다. 반쯤 납치당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설마 지금부터…!

털썩.

소파에 앉은 사결이 제 허벅지 위에 나를 얹었다. 당황해서 내려오려는데 깍지 낀 양손이 내 허리를 고정했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행동이라는 게 은근히 느껴졌다. 왜, 라고 생각하자마자 알게 됐다. 마주 보고 앉자 얼굴이 가까웠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팔이 기다렸다는 듯 당겨지며 그가 나를 더욱 바짝 안았다. 그의 턱이 가슴팍을 쿡 찔렀다. 

사결과 내 키는 서로 비슷했다. 옆에 바짝 서 보면 그가 나보다 손가락 한 마디쯤 더 큰 정도다. 그래서 올려다보는 일은 있어도 이렇게 가까이서 내려다보는 일은 잘 없었는데.

귓불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온 얼굴로 퍼졌다. 저 뒤쪽에 있는 거울에 지금 내 모습이 비쳤다. 거대한 짐승의 몸에 올라탄 채, 숨길 수도 없이 붉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말해봐.”

“…….”

“내가 불편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가 말할 때마다 턱이 가슴을 찔렀다. 아프지도 않고 약간 간지러운 자극에도 나는 그때마다 흠칫거리며 놀랐다.

“여원.”

언제나 듣던 이름인데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게 자세 때문인지, 타오르는 별처럼 나를 응시하는 사결의 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답해야지.”

그래. 대답을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입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다. 습관처럼 가슴을 짚고 싶은데 지지대처럼 쥔 단단한 어깨를 놓을 수가 없었다.

망설이다 질문을 되돌렸다.

“등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등은 괜찮나.”

그에게 되돌아갔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한 것도 등이었다. 레프의 치료는 임시방편이었을 뿐, 멀쩡히 서 있을 만큼 회복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다시 본 등은 겉면만이 아니라 속까지 살과 근육이 차 있었다. 멀쩡해진 등을 꼼꼼히 문지르는 나를, 사결은 알 수 없는 눈으로 가만히 두고 봤다.

“멀쩡하다니까. 현수가 상비하고 다니는 포션이 있었어.”

“그래.”

그럼 됐다. 고개를 끄덕이자 씩 웃은 사결이 다시금 팔을 조였다.

“이제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왜 그랬어.”

그냥 안 됐다고 할 걸 그랬다. 고개를 푹 숙인 사결이 입술로 내 겉옷의 아래쪽을 물어 위로 휙 들었다. 곧 그의 얼굴이 천 아래로 사라졌다.

“사결!”

개가 따로 없다. 어이가 없는데 웃지도 못했다. 그가 우둘투둘한 상처 위를 혀로 길게 핥았다. 

“흑.”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이번엔 꽉 조여져 떨리는 배판에 입술이 닿았다. 핥는 걸로 만족 못 했는지 숫제 쪽쪽거리며 물고 빨았다.

“자, 잠깐.”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그의 어깨를 힘주어 밀었다. 사결은 순순히 빠져나오는 척하며 그대로 내 옷을 벗겨버렸다. 남자끼리고, 상의만 벗었을 뿐인데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다. 

빠져나오려고 어떻게든 버둥거리자 사결이 기다렸다는 듯 유두를 입에 물었다.

“……!”

퍼덕이던 사지가 고장 난 것처럼 그대로 멈췄다. 물기 젖은 소리가 귀에 천둥처럼 울렸다.

“대답부터 하라니까.”

“무, 물고 말하지 마라.”

“알겠어. 말 안 하고 잘 빨아줄게.”

“그런 뜻이 아니- 윽!”

할짝. 츄읍.

더는 저항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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