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왜 저 말이 내 눈이 아니라 네 눈에 흙을 넣어버리겠다는 것처럼 들리는 걸까. 섬뜩한 분노에 심약한 연구원이 하얗게 질려 물러났다.
“그리고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이 마수들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크레딧에 있습니다.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만 맡겨두는 거죠. 그 사이에 뭔가 할 생각이었다면 지금 깔끔하게 치우시는 게 좋겠군요.”
내가 개지랄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미처 하지 않은 뒷말이 협회 관계자들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여기 있는 사람 중 가장 직급이 높은 협회 전무가 웃으며 말했다.
“가능한 빠르게 크레딧 길드로 보내도록 하죠.”
그러니까 너부터 좀 꺼져주겠니.
“말이 잘 통해서 다행입니다. 그럼 저흰 이만.”
사결이 고갯짓을 했다. 죄지은 사람처럼 내내 찌그러져 있던 S급 두 명이 바람처럼 협회를 빠져나갔다.
“우리도 가지.”
순간 듣는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저 맹수의 입에서 나왔다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어디 아픈가?’
‘약 했나?’
그가 아는 크레딧 길드장은 그럴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지만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사결의 표정은 진짜였다.
협회 관계자와 연구원들의 턱이 툭 떨어졌다.
사결. 저 인간이 누구인가. 미디어에선 세상 다시없을 좋은 사람처럼 굴지만 현장에 조금이라도 발 들인 사람이면 다 안다. 저 새끼가 얼마나 지독한 새끼인지.
물론 사결은 그리샤를 일으켜 세운 일등 공신이다. 도시의 영웅인 것도 이견은 없다. 그러나 영웅이라는 게 제대로 된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란 걸 저 새끼로 인해 알게 됐다.
그들이 보는 사결의 이미지는 기실 악마에 가깝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사방으로 꽃을 뿌려댄다? 눈과 귀를 의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뭘 보는 거지?’
‘저거 사실 사결의 탈을 쓴 마물 아냐?’
귀환자가 머뭇거리다 옆에 다가와 섰다. 사결의 표정이 나른해졌다. 평소 마음에 안 드는 새끼들을 족칠 때나 짓던 날 선 나른함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솜사탕처럼 포근한 단맛이 날 것 같은 느낌.
불가능을 목도한 모두의 얼이 빠졌다.
“그럼 이만 실례하죠.”
그러거나 말거나 사결은 귀환자의 허리에 한 손을 얹은 채, 배부른 뱀처럼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귀환자를 싸고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게 설마 그런 의미였어?!’
크르르릉!
크르르!
집 나간 정신을 되돌린 건 마수들의 심상찮은 울음소리였다. 무언가 깨달은 관계자들이 떠나는 뱀을 다급히 불러 세웠다.
“자, 잠깐만요.”
“또 뭡니까.”
사결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더 방해하면 협회고 나발이고 엎어버리겠다는 깡패의 기질이 느껴졌다. 전무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귀, 귀환자님이… 정말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럼 뭐 농담인 줄 아셨나.”
그가 표정만으로 말했다. 감히 누구 귀환자를 넘봐?
꽉 쥔 전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제어는 귀환자님만 가능하시다면서요?!”
“그렇죠.”
“그럼 저것들은 어찌합니까?”
전무가 당장 날뛸 것처럼 발로 바닥을 긁는 레프타를 가리켰다. 아니, ‘것처럼’이 아니라 이미 날뛰고 있었다. 뒷덜미를 물린 연구원이 허공을 날았다.
‘흐어어억!’
비명을 지르는 그를 내리기 위해 다른 연구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여원이 머뭇거리다 첨언했다.
“저건 그냥 장난치는 거-”
그 말을 사결이 잘랐다.
“제 알 바 아니죠. 알아서 해결하시고, 안정성 확인되면 털끝 하나 상한 곳 없이 크레딧으로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귀중한 길드 자산이라서.”
당장 사람을 장난감처럼 물고 휘두르는 놈들에게 안정성 허가가 날 리 없다. 그렇다고 크레딧이 확보해 온, 어느 정도 길들였다고 봐도 무방한 마수를 다 죽일 수도 없다.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건 다름 아닌 협회였다.
‘설마.’
그걸 노리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퍼레이드를 한 건가.
불현듯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대치하는 건 무의미한 시간 낭비였다. 그가 졌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데려가십시오.”
“저, 전무님!”
“자네들이 저 마수를 진정시킬 거 아니면 다물고 있지?”
“…….”
단숨에 입을 다문 이들을 둘러본 전무가 사결을 향해 말했다.
“대신, 저 마수들로 인해 발생할 피해는 크레딧에서 책임져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러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사결이 귀환자의 손을 잡았다. 정말 이래도 되나. 행동에 확신이 없던 귀환자가 힐끔 협회 관계자들의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사결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수들이 자연히 그 뒤를 따랐다.
정확히는 한 마리가 먼저 앞서자, 나머지가 우르르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이제 보니 우두머리가 있었군.’
냅다 귀환자에게 달려가서 꼬리를 살랑거리는 걸 보니 그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시스템인지 알게 됐다. 귀환자가 통제하는 건 그 우두머리뿐. 나머지는 그 우두머리가 통제하는 거다.
“저, 전무님. 정말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헌터들이 조용해졌다 했더니 애가 닳은 연구원이 와서 매달렸다. 전무는 무시했다. 그러자 시무룩한 연구원 중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몇몇이 떠나는 레프타의 꽁무니에서 얼쩡거렸다.
크르릉!
본래 맹수는 뒤를 잡히는 걸 싫어한다. 마계에 사는 마수라고 그 습성이 다를 리 없다. 거슬렸는지 가장자리에 있던 마수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저…!”
기겁한 전무가 반사적으로 걸음을 옮긴 순간, 벼락처럼 뒤로 달려간 우두머리가 앞발로 녀석의 머리를 후려 깠다.
빡!
끼잉!
‘끼잉?!’
강아지 같은 소리를 낸 마수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반대로 우두머리는 고개를 쳐들며 연신 콧김을 뿜었다.
크르릉.
“레프.”
앞서가던 귀환자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봐도 우두머리를 부르는 모양새였다. 전무는 보았다. 말대가리 위로 사람 같은 표정이 떠오르는걸.
너 운 좋았다. 어? 또 깝치면 뒤진다?
녀석이 다시 총총총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곤 칭찬을 바라듯 귀환자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수묵화 같은 분위기의 사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불쑥 옆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그 손보다 먼저 말의 정수리에 닿았다.
사결이었다.
“어어. 말 새끼야. 수고했다.”
“크르릉!”
우두머리가 도끼눈을 뜨며 그 손을 물어뜯으려 했다.
“레프. 그만.”
녀석을 향해 엄한 눈으로 말한 귀환자가 고개를 돌려 사결을 봤다.
“사결도 그만.”
“잠깐. 나 지금 저 말 새끼랑 같은 급으로 취급당한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왜 눈을 피해?”
“이만 돌아가지. 이렇게 있는 것도 민폐다.”
“여원. 저기 여원?”
귀환자는 들은 척도 않고 몸을 돌렸다. 전무는 뭐에 홀린 표정이었다.
“저 사결이…. 아니 마수들을…. 아니 귀환자는 다 저런가?”
헤스티아의 귀환자는 안 그러던데. 거기까지 생각한 그가 멈칫했다.
아.
눈앞에서 몰아치는 폭풍에 잠깐 잊고 있던 대형 사고가 떠올랐다. 전무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내일모레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게 무슨 횡액인가.
“저, 전무님. 우십니까?”
대답이 없다.
“전무님?”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다들 나가주게.”
“…예.”
* * *
우리가 안내된 건 협회의 지하. 마물의 부산물 창고가 있는 곳이었다.
넓고 깨끗한 공간이긴 했지만, 그곳도 창고 내지는 연구원들이 다용도로 활용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복도는 층고가 높고 너비도 어지간한 방만 했다. 레프타가 함께 이동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다. 한참 말없이 걷던 사결이 중얼거렸다.
“얌전하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얌전해? 뭐가. 레프가?
“다 보는 데서 손잡으면 뿌리칠 줄 알았는데.”
“아.”
뒤늦게 꿈지럭거렸지만 사결은 더욱 단단히 손을 쥐었다. 냉정하게 힘을 주면 뿌리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 뿌리치네.”
“네 마음이 상할 테니까.”
잘 가던 사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표정이 케이크 사준다고 데려갈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뭔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던 것 같은데.
“미치겠네. 진짜.”
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뭐가.
“자기 마음 인정했다고 이렇게 몇 배나 사랑스럽게 굴면. 어? 나는 어쩌라고. 어?”
내가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걸까.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에 확신이 사라졌다. 짜게 식은 눈으로 사결을 봤다. 동준이 제발 그렇게 보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 눈이었다. 사결은 동준과 다르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왜 그렇게 섹시하게 봐.”
미쳤나?
“이걸 삼켜서 배 속에 넣어 다닐 수도 없고.”
역시 미친 게 맞는 것 같다. 한숨을 쉬며 한 발 멀어지자 그가 멀어진 만큼 바싹 몸을 붙여 왔다.
“집에 가면 각오해.”
먹이 주변을 맴도는 짐승처럼 그가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으르렁거렸다.
“오늘은 끝까지 할 거야. 이렇게 건드려 놓고 비즈니스니 뭐니 하면 진짜 가만 안 둬.”
저 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순진하진 않다. 뒤늦게 자각한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흔들림은 무감한 겉면까지 번졌다. 걸음이 어긋나고 자연스럽게 흔들리던 팔이 비대칭으로 삐걱댔다.
혀를 찬 사결이 재빨리 팔을 뻗어 나를 부축했다.
“피곤한 척해도 안 돼.”
대답이 없자 발이 느려졌다. 으르던 게 사라지고 그 자리를 초조함이 채웠다.
“진짜 피곤해?”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결이 대번에 이를 드러냈다.
“배길수. 그 새끼를 그렇게 쉽게 죽이면 안 됐는데.”
분노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보다 낮고 깊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무언가 바뀌었다고 한다면,
‘나겠지.’
압착기에 눌린 것처럼 속이 조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