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9장. 귀결되는 삶.
마계 남쪽은 척박한 땅이 많았다.
깊은 바다로 이어지는 해안가에 인접해서다. 고대의 마수들이 우글거리는 바다는 마족들조차 두려움에 떨게 했고, 어쭙잖은 것들은 감히 바다 근처에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절벽을 등진 채 평원, 숲, 용암지대를 맞댄 어느 작은 영지도 그랬다. 이곳은 드넓은 마계 끝자락에 있는 땅이었다. 용암지대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남은 건 거대한 마수가 더 거대한 마수에게 잡아먹히는 바다뿐이다.
이 근방 마족들은 다들 아닌 척하지만 그런 마수를 두려워했다. 수평선 인근에서 산만 한 거체가 구름까지 솟아오르는 걸 보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그들은 술집에서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입을 모아 속닥였다.
차라리 멀리 있는 마수가 낫다고.
콰앙!
쿠르릉.
굉음과 함께 영주성이 흔들렸다. 짐승이 물어뜯은 것처럼 곳곳이 패고 창문은 전부 깨졌다. 탑은 중간부터 없었으며 천장이 무너진 곳도 심심찮게 보였다.
폐허나 다름없이 변한 영주성이지만 사용인과 기사들은 그대로였다. 그들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연무장 구석에 모였다.
“오늘은 또 왜 저러시는지.”
“언제는 뭐 이유가 있어 발작했나.”
“소문이 사실인가 보지.”
“쉿.”
기사가 본관을 눈짓했다.
휑하게 뚫린 벽면 너머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한 인영이 보였다. 마왕의 최측근인 그림자였다. 이름은 모른다.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를 그림자라고만 불렀다.
그림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이었다. 문을 두드리자 대답 대신 한 차례 더 큰 소리가 났다. 뒤이어 벽면이 무너지는 소리도 들렸다.
한숨을 삼킨 그가 문을 열었다. 막혀 있어야 할 반대편 벽이 뻥 뚫려 있었다. 작은 영지의 풍경과 보랏빛 하늘이 바로 보였다.
“크라투스 님.”
“…….”
마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림자는 반투명한 천개(天蓋)가 드리운 침대로 다가갔다. 가까이 서자 천개 너머의 인영이 뭘 하는지 정도는 보였다.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림자는 고뇌했다. 이런 상태인 그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사태만 더 악화시키는 게 아닐까.
‘고민할 거면 그때 했어야지.’
예니스 군단장이 사라지고 이제 2년이 훌쩍 넘었다. 그림자는 그때부터 줄곧 제 선택을 후회했다.
그가 크라투스의 그림자로 산 건 아주 오래되었다. 군주가 될 운명을 타고난 용마족이 얼음에서 깨어났을 때, 그를 잡아먹으려고 했던 그림자는 외려 복속되어 말 그대로 ‘그림자’가 됐다.
계절을 바꾸고 지형에 영향을 끼칠 만큼 유례가 없는 강함. 그림자는 그가 절대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림자의 예상대로 용마족은 마왕이 됐다. 강함이 미덕인 마계에서 그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과 권한은 엄청났다. 누구도 그의 말에 이견을 달지 않았다.
긴 세월이 흘렀으나 크라투스는 여전히 어린 편이었다. 심지어 마족 중에서도 수명이 가장 길다는 용마족이다. 당연히 성장 또한 느렸다. 하지만 그게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린 용마족은 잔혹했고 변덕이 심했으며 장난기도 많았다. 그가 친 장난에 죽는 마족이 속출해도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변방으로 고개를 돌린 마왕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아주 살벌한 웃음이었다. 그 후 잠깐 나간다며 자리를 비운 마왕은 남자를 하나 데리고 돌아왔다.
새로운 장난감.
에이원 예니스에 대한 그림자의 감상이었다.
그는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다고 생각했다.
크라투스는 신선한 자극이라도 느꼈는지 빠르게 장난감에 심취했다. 다른 곳에 쏟을 잔혹함을 장난감에게 쏟았다.
그림자는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물론 크라투스를 처음 겪는 예니스는 알지 못했다. 그는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죽어 나간 마족들 때문에 진저리쳤지만, 그림자는 환호를 참기 힘들었다.
예니스의 눈에 무수히 죽어 나간 것처럼 보인 수는, 그가 오기 전에 죽어 나가던 것의 반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크라투스가 예니스를 압박하기 위해 목적이 있는 살해를 하면서 그 수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죽는 자들에겐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했으니까.
그림자는 기꺼워하며 방관했다. 그의 왕은 변덕이 심했다. 그림자는 새로운 장난감으로 인한 인위적인 평화가 오래가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크라투스의 장난감에 대한 흥미는 식을 줄을 몰랐다. 시간이 흐르며 그림자는 슬슬 불안을 느꼈다.
저게 과연 일개 장난감을 보는 눈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뱃속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하나의 가정에서 파생될 파멸이 너무 많아 눈앞이 아뜩할 지경이다.
그래서 무언가 품고 떠나는 예니스를 잡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본 그의 눈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시체처럼 무감하던 눈동자에 아주 작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살. 내지는 그에 준하는 뭔가를 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수를 쓰든 크라투스를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림자는 크라투스의 곁에서 군단장을 치우는 것이 해결법이라고 여겼다. 두 번째 잘못된 판단이었다. 평소의 그는 마왕의 현명한 조언자이자 책사였지만, 그 또한 마족이라 감정에는 서툴렀다.
잔혹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마족에게 두려움을 알게 하고,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감정.
불치병과 같은 그것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크라투스는 폭주했다.
가장 먼저 반란을 일으켰던 공작과 그가 다스리던 땅의 마족들이 몰살당했다. 말 그대로 개미 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다.
그림자는 혀를 차면서도 이제 잠잠해지리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폭주는 마왕성에서도 이어졌다. 성의 반절이 날아가고 죽은 마족의 시체가 몇 개의 둔덕을 만들었다. 근방의 땅이 전부 얼어붙고 눈 폭풍이 몰아쳤다. 과도한 마기의 분출로 허공에선 스파크가 튀었다.
마왕성은 폐허로 변했다. 엉망이 된 내부는 도저히 머물만한 환경이 못 됐다. 그림자가 의견을 냈다. 마왕성을 수리할 동안 예니스가 과거 거주했던 성으로 잠깐 가서 머무는 게 어떻겠냐고.
크라투스가 무언가 부수지도, 누군가 죽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마왕성이 완벽하게 복원된 후에도 계속 예니스의 작은 성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그가 썼던 방에 칩거했다. 방의 모든 것에서 크라투스는 군단장의 흔적을 보고 느꼈다. 분노가 정수리를 덮었다. 그럼에도 마왕성에서처럼 미쳐 날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억제하고 누르다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왔을 때. 크라투스는 마족들을 향해 명령했다.
찾아라.
마계를 통째로 뒤집어서라도 그를 다시 내 앞에 데리고 와.
만약 찾지 못하면 그 후는 어떻게 될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족들은 필사적이었다. 예니스 군단장이 마지막으로 있던 전장을 말 그대로 뒤엎듯이 수색했다.
‘발견될 리 없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살아있다면 종속의 계약을 맺은 주인이 못 찾을 리 없지 않은가.’
다만 생각한 걸 입 밖으로 내지 못했을 뿐이다. 어느 누가 말할 수 있었을까. 핏발이 선 눈으로 마족을 찢어 죽이는 군주에게 당신이 찾는 건 이미 세상에 없노라고.
크라투스의 측근과 수하들은 찾는 시늉만 하며 2년간 마계 전역을 헤맸다. 더 기다리다 못한 주인의 손에 죽은 동족은 필요 최소한의 희생이라 여기면서 말 그대로 연명하는 삶을 살았다.
단 한 명. 그림자는 달랐다.
그도 처음엔 자살이라고 생각했다. 절망에 떨어진 크라투스의 얼굴과 예니스 군단장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계약에 묶인 자가 주인의 눈을 피해 숨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림자는 그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군단장의 눈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건 죽으러 가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 방법을 찾아 희망에 타오르는 눈에 가까웠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그는 성을 나와 홀로 평원을 배회했다.
‘군단장이 살아있다는 가정하에, 크라투스의 눈을 피해 숨는 게 가능했다면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걸까.’
고민하던 그림자의 앞에서 게이트가 열린 건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하얀빛이 주변에 있던 마물들을 삼킨 후 그대로 사라졌다. 드물지도 않은 모습이다. 100년 전쯤부터 갑자기 열리기 시작한 게이트는 전부 저런 식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마물 또는 마수를 삼키고 사라진다. 약한 녀석들일수록 끌려가는 빈도가 높았다. 처음엔 이유가 뭘까. 만만해서 그러나?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게이트 별로 감당할 수 있는 마력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마족은 삼키지 않는 게 아니라 삼키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중간계로 보내지는 건 항상….
‘아니, 잠깐.’
그림자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는 곧장 마왕성으로 돌아가 온 서가를 뒤졌다. 그가 찾던 건 크라투스의 집무실에 있었다. 고대어로 적힌 차원 이동 마법진. 열린 페이지의 구석에서 낯선 필체를 발견했을 때 그는 확신을 얻었다.
예니스의 일탈을 유일하게 알아차린 것도, 눈감아준 것도 그였다. 힌트를 얻자 과정이 어떻게 되었을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수하들을 시켜 마왕성 구석구석을 수색하도록 했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서도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당연했다.
램프 밑이 어둡다는 말도 그게 들어맞을 때나 쓰는 법이다. 상대가 어떤 계약을 했는지 아는 이상, 이건 명백한 시간 낭비였다.
하지만 그림자가 찾는 건 군단장이 아니었다.
“그, 그림자님.”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수하 하나가 쭈뼛거리며 보고하러 왔다. 그것은 지하에 있었다. 뼈만 남은 다섯 마수. 빛바랜 차원 이동 마법진.
다시 영지로 돌아온 그림자는 평원에 넓게 퍼진 기생충들을 자신의 권속으로 삼았다. 약해도 상관없다. 목적은 확인이다. 그러려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다수의 권속을 보내는 편이 나았다.
이런 종류의 계약에선 가장 강력한 종속의 계약도 흐려진 판국이다. 권속이라고 끊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그래도 불안하긴 하지.’
그림자는 기생충들에 더해, 군단장이 길렀다는 레프타와 그 무리도 게이트 너머로 보냈다. 그리고 고작 일주일 만에 결과를 손에 넣었다.
“뭐냐.”
그림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천개 너머로 여전히 머리를 감싼 크라투스가 사납게 뇌까렸다.
“찾지 못하면 보고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그림자는 결심을 굳혔다. 어차피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침잠해가는 그를 다시 수면으로 끌어올릴 동기였다.
“에이원 예니스 군단장의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느리게 움직이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스으윽.
옆으로 돌아온 고개. 천개 따위로는 푸르게 빛나는 안광을 다 가릴 수 없었다. 그림자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냐.”
그가 말할 때마다 주변이 얼어붙었다. 침대에서부터 뻗어나간 서리가 곧 방 전체를 뒤덮었다.
“어디 있어.”
쿠르릉.
벽면이 진동하고 바닥이 흔들렸다. 그림자는 침착하게 이곳이 군단장의 방임을 상기시켰다. 크라투스의 눈썹이 위로 휘었다. 지진이 잦아들고 서리가 녹아내렸다.
이제 지껄여 봐.
새파란 안광은 여전했다. 그림자는 어린 주군의 인내심이 다 닳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군단장은 중간계에 있습니다.”
“…중간계?”
중간계. 중간계. 크라투스가 몇 번 더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는 무척 의아해했지만, 그림자는 알았다. 사정을 듣는다면 다른 마족들도 알 것이다.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감정에 휘둘린 탓이라고.
크라투스가 침대를 벗어났다.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더니 새 옷을 가지고 오게 했다. 단 몇 분 만에 그가 알던 과거의 군주로 돌아온 사내가 눈을 빛내며 마지막 확인을 했다.
“확실해?”
“동조율은 낮은 편이었지만 의식의 가닥은 확실히 전달받았습니다.”
사실 기생충이 보내온 건 단 두 개의 단어였다.
영주. 발견.
그거면 충분했다. 고개를 끄덕인 크라투스가 큰 보폭으로 문을 나섰다. 저 방을 마지막으로 나간 게 언제였던가. 그림자의 손이 안으로 말렸다.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주군을 움직인 건 중간계로 도망친 군단장이었다.
장난감?
그림자는 이제 농담으로라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파편’을 모아 와라.”
찬연한 생기와 섬뜩한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크라투스가 말했다.
“내가 직접 게이트를 열겠다.”
마계에서 시작된 환란이 중간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