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그래서.”
사결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의 옆에는 바닥에 거꾸로 처박힌 유성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갔지?”
스산하게 가라앉은 눈에서 살기가 넘실거렸다.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일단 포션 마저 드세요.”
응급 키트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현수의 품에는 사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손을 까닥이는 걸로 비상용 포션을 갈취한 사결이 뇌까렸다.
“닥쳐. 내내 기절해 있던 새끼가 뭘 잘했다고.”
이현수는 억울했다. 아니 너도 기절해 있었잖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사결은 하급 포션을 한입에 털어 넣은 신재현을 봤다. 그는 말도 못 하고 손가락만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사결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드론을 찾는 거였다. 하지만 그만한 폭발에 남아난 게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대체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모래사장에서 다이아 한 알을 찾아도 이보단 가능성 있을 것이다. 다이아는 빛나기라도 하지. 이현수가 짜게 식은 눈을 했지만 사결은 요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천막의 잔재를 뒤적이던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럴 줄 알고 위치 추적기 달아뒀어.”
아… 그러시구나….
“대체 언제! 아니 잠깐만요. 수해에서 추적기가 정상 작동할 리 없잖습니까.”
사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반쯤 불에 탄 천을 걷어내던 그가 눈을 빛냈다. 허리를 세운 그의 손엔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큐브가 들려 있었다.
이현수가 절망했다. 튼튼하게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런 난장판에서 살아남은 드론이 있을 줄이야.
‘대체 저거 개발한 거 누구냐!’
크레딧 연구팀이다.
그 사실을 기억해 낸 이현수가 욕도 못 하고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가 초조하게 사결을 봤다. 그가 아는 사결이라면 여원을 구하기 위해 혼자 수해에 뛰어들고도 남았다.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곳은 수해였고 심지어 마력 폭풍에 가까운 전투도 있었다. 위치추적기가 절대 멀쩡할 리 없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사결은 빠르게 단말기를 조작했다. 먹통이어야 할 위치추적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뒤늦게 뭔가 깨달은 이현수가 경악했다.
“사장님. 설마?”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원래라면 불가능할 일을 자본으로 가능하게 했으니 아마 한두 푼 갈려 나가진 않았을 터.
“…사비로 하신 거죠?”
“길드의 귀하디귀한 귀환자를 보호하는 건데. 당연히 길드 예산이지.”
예. 당연히 그러시겠죠.
이현수가 서글퍼하건 말건 사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레이더로 바뀐 단말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굉장히 멀리 갔을 거란 예상과 달리, 여원은 몇 킬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 서 있었다. 뭐라 하려던 이현수가 입을 다물고 긴장했다. 사결이 뛰어나가면 몸을 던져 제지할 셈이었다.
사결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멈춰선 빨간 점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러면 거기서 여원이 보이기라도 할 듯이.
“생각이 바뀌었다.”
“예?”
사결이 기껏 찾은 드론을 이현수에게 던졌다.
“그걸 가지고 돌아가서 지원을 요청해. 난 여기서 기다리겠다.”
보통 이 상황에 저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지원을 기다리겠다는 말로 해석하겠지만, 사결을 오래 겪은 이현수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가 기다리는 건 새로 도착할 헌터나 드론이 아니었다. 팔짱을 낀 그의 손이 팔뚝을 파고들었다. 까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선명하다.
‘설마 알아서 돌아올 거라 생각하는 건가? 마물에 납치당한 사람이 어떻…아.’
이현수의 눈이 짜게 식었다. 그렇다. 그 인간이 어디 마물에 납치당했다고 위험할 인간인가?
그깟 마물은 한 무리가 달려들어도 전부 도륙할 인간병기였다.
당황해서 가장 기본적인 걸 잊고 있던 이현수는 조용히 드론을 챙겨 마력을 주입했다.
촤라락 펼쳐진 드론이 위쪽 사선 방향으로 쏘아졌다.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그리샤로 향했다.
유성과 재현은 눈치를 보다 부상을 입은 B급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평소라면 S급에게 거리감을 느꼈을 B급들도 어깨와 등을 토닥이며 그들을 맞아줬다.
* * *
촤아악.
우거진 수풀과 무성한 나무가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레프는 길도 없는 숲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여원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렇게만 가면 심부에 다다르는 건 일도 아니겠다고.
혼자선 불가능하지만, 마계에서도 강인하고 빠르기로 유명한 레프타와 함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곳곳에 산재한 마물과 간혹 거대한 몸을 이끌고 어슬렁거리는 S급 마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강해도 상대를 따라잡지 못해서야 소용없으니까. 이 녀석은 분명 원하는 곳에 자신을 데려다줄 수 있다.
그럼에도 여원은 레프를 세우려 했다.
“멈춰.”
속도는 줄지 않았다.
“레프.”
단호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짐승의 귀를 파고들었다.
크르릉.
불만이 가득한 울음이었지만 속도가 서서히 줄었다. 수해의 어디쯤 멈춰선 녀석이 뒤를 돌아봤다. 거리가 충분히 벌어졌다고 판단했는지 내내 몸을 옥죄던 갈기도 풀어냈다.
새까만 갈기가 다시 연기처럼 아름답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한숨을 내쉰 여원이 아래로 내려섰다.
레프가 애교를 부리듯 냉큼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양손이 자연스럽게 턱과 목을 문질렀다. 기분이 좋은지 날카로운 눈이 가느스름해진다.
“다들 내가 널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대였지.”
크릉.
말을 할 때마다 잘생긴 귀가 쫑긋거렸다. 그를 보는 여원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기사들은 어떻게든 레프타를 잡으려고 별짓을 다 했다. 그물을 던지는 건 기본이고, 직접 올가미를 손에 들고 덮치다 뒷발에 차여 날아가는 모습도 드물지 않았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당시 여원의 측근이었던 놈도 온몸이 흙투성이였다. 그러고도 포기하지 못하고 곰 같은 소리를 토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여원은 뒤쪽에 느긋하게 서서 매끈하고 우아한 레프타들의 모습에 감탄하기 바빴다. 그러다 한 레프타와 눈이 마주쳤다. 여원을 보자마자 앞발을 치켜들며 폴짝거리더니 단숨에 다가와 그 앞에 털썩 앉았다. 누가 봐도 간택한 짐승과 간택당한 집사의 모습이었다.
“그땐 황당했지.”
크릉.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레프와 여원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레프는 그때를 황당하다고 회상하는 것이 불만이었던지 집사의 가슴팍에 살짝 박치기했다. 여원은 아픈 티도 내지 않고 녀석을 살짝 밀어냈다.
“레프. 나는 못 가.”
두 번째 박치기엔 힘이 실렸다. 레프가 불만스럽게 투레질을 했지만 여원은 완고했다.
“혼자는 안 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을 보고 있고 레프타를 마주하고 있지만 온 신경이 두고 온 사결에게 가 있었다. 레프가 치료해주긴 했지만 애당초 위중한 상태였다. 위중한 게 나아져 봤자 아픈 건 매한가지다.
여원은 레프의 뺨을 움켜쥐었다. 새까만 털보다 더 검은 두 눈이 보였다. 그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짐승의 눈을 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있어.”
그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 난 돌아가야 해.”
말에 담긴 깊고 무거운 감정을 읽은 짐승이 더는 저항하지 못했다. 머리가 아래로 푹 숙어지고 꼬리와 갈기가 죽었다. 꼬리는 그렇다 치고 축 늘어진 갈기는 드라이아이스를 매단 미역 같았다.
그 볼품없는 모습에도 여원은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가 풀죽은 레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같이 가자. 네게 꼭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늘어져 있던 귀가 쫑긋 섰다. 짐승이 다시 까만 눈을 들어 여원을 봤다.
선택은 레프가 했지만 그걸 받아들여 준 건 어디까지나 여원이었다. 녀석은 그걸 아주 잘 알았다. 그러니 이길 수 없다는 것도. 말 주제에 한숨을 쉰 레프가 스르륵 갈기를 움직였다.
녀석이 여원을 휘감아 다시 제 등에 앉혔다. 여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고맙다는 뜻으로 손을 뻗어 목을 문질렀다.
크아아악!
레프가 크게 포효했다. 그러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숲 안쪽에서 한 무리의 레프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두머리로 돌아간 레프가 그들을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졌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지고 코에서 탄내가 나기 시작했다.
여원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였다. 손을 들어 습관처럼 가슴께를 눌렀다. 이곳엔 치유되지 못한 상흔이 있고 평생 벗어나지 못할 사슬이 있다. 하지만 그 아래 심장은 마침내 반응할 상대를 정했다.
여원의 결심이 굳었다.
‘말해야겠지.’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지만 마음을 정했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제야 여원은 덜컥 두려워졌다. 진실을 알고도 사결이 지금과 같으리란 보장이 없어서다. 아무리 사결이 대단하다 한들 그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도 여전히 저를 사랑할까? 강제였다곤 해도 이미 주인이 있는 이 몸뚱이를, 영혼을. 그가 과연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까?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여원이 입술을 사리 물었다.
삼초승달은 안 된다며 단호하게 그를 밀어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종속의 계약이 여원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억지로 불안을 구겨 넣었다. 무성한 나무가 뒤로 밀려나며 한 번 지나온 길을 스쳐 지나갔다. 코에 더욱 선명한 탄내가 스쳤다. 육안으로도 얼핏 난장판이 된 공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남은 곳. 그 한가운데 익숙한 인영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여원이 레프에게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그가 양팔을 벌렸다. 선 자리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은 채다. 상대가 자신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목구멍이 꽉 막혔다.
여원이 망설이자 사결이 한 번 더 그를 잡아당겼다.
“여원.”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달려간 여원이 그대로 사결을 끌어안았다. 덩치 좋고 힘도 좋은 사람이 달려들자 사결도 별수가 없었다.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지저분한 바닥을 굴렀지만 둘 중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여원이 말했다.
“네가 좋다.”
사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굳었다가 여원의 양 뺨을 쥐었다.
“다시… 다시 말해봐.”
여원이 눈을 휘며 웃었다. 약간 해사한 듯, 딱딱한 듯. 완전한 무표정을 버리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건 그가 여태 봐 온 것 중 가장 화사한 웃음이었다.
“네가 좋다. 사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