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여원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펄떡여 바닥에 내려섰다. 어차피 둘 다 꼴불견이라면 탈출하는 꼴불견이 되는 게 낫다.
옳은 판단이었지만 늦은 판단이기도 했다. 사소하게 늘어진 시간. 그 대가는 컸다. 어정쩡하게 내려선 직후, 시선이 어쩔 수 없이 사결의 앞섶을 향했다. 둔덕이 생긴 걸 본 그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진짜 섰냐. 이 진짜 미친놈아.
나른하게 웃은 사결은 품을 뒤져 포션을 꺼냈다. 뚜껑을 딴 그가 호쾌하게 포션을 들이켰다.
뭐지. 어디 다쳤나?
여원의 걱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포션을 마시다 말고 여원의 멱살을 잡은 사결이 대뜸 입술을 부딪쳐왔다.
삼킨 줄 알았던 포션이 목으로 넘어왔다. 틈을 노려 들어오려는 혀를 밀어낸 여원이 눈을 치떴다. 사결이 뻔뻔하게 웃었다.
“그냥 주면 안 마실 것 같아서.”
“혀는 뭔데.”
“겸사겸사.”
겸사겸사 같은 소리 하네.
코웃음 친 여원이 한 손으로 사결의 멱살을 잡았다.
워낙 무심한 성격이라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당한 건 되갚아 주는 성격이었다.
“!”
사결은 갑자기 들이밀어진 입술에 당황했지만, 그것도 잠깐뿐. 곧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탄탄한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콰르륵.
두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순식간에 전투 태세로 돌아간 그들이 배길수를 향해 섰다. 바닥에 구겨져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양발이 먼저 바닥을 짚고 뒤로 꺾인 척추가 우둑거리며 상반신을 세웠다.
팔은 불가능한 각도로 꺾였고 반쯤 잘린 목에서 허연 뼈가 드러났다. 기생충이 흰 눈으로 이를 갈았다.
“너, 너. 필, 필요. 해.”
기생충이라 그런가. 아주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여원과 사결이 곧바로 자세를 잡고 경계했다. 바로 섰던 여원이 그 순간 휘청했다.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상처가 아니라 종속의 계약이 꿈틀거리며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사결이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괜찮냐고 물으려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불룩불룩. 배길수의 몸이 부풀기 시작했다. 피부가 붉은색에서 다시 하얀색으로 변했다. 폭주 상태였던 속성을 간신히 버티던 몸이 한계에 달한 것이다. S급 헌터의 몸에 응축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그라인더처럼 내부를 갉으며 예열되기 시작했다.
“……!”
여원이 반사적으로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두껍고 넓은 공허의 막이 두 사람을 감싼 직후, 사결이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넓은 품에 단단히 안긴 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콰아앙!
수해를 뒤흔드는 폭음이었다. 열 폭풍이 몰아치며 베이스캠프의 천막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기함한 S급들이 앞을 가린 양팔을 내리기 무섭게 사결과 여원을 찾았다.
“사장님!”
“귀환자님!”
먼저 보인 건 사결이었다. 축 늘어진 그는 허망한 표정의 여원에게 마주 안겨 있었다. S급들의 걸음이 멎었다. 그들이 숨을 들이켰다.
사결의 등은 짓무르고 푹 패여 뼈가 드러나 있었다. 여원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으스러질 듯 사결을 붙들었다. 끌어안은 팔이 잘게 떨렸다.
여원은 비명도 끔찍함도 모두 안으로 삼킨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잘못 움직이면 등이 허물어질 것만 같았다.
“…사결.”
대답이 없다.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모든 것이 아득했다. 이명이 울리는 귀, 코를 찌르는 탄내, 그 모든 게 사라졌다. 대신 하얗게 늘어져 흔들리는 손과 창백한 뺨만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사결!”
비명에 가까운 부름에 그제야 사내가 힘없이 눈을 떴다.
“애원 말고…. 그것도 좋네. 네가 간절하게 내 이름 부르는 거.”
사결이 늘 던지는 가벼운 농담에도 평소처럼 한심하게 보거나 웃을 수 없다. 이미 그의 안색엔 핏기가 가셨다. 겨우 입을 연다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말하지 마라.”
“그럼 난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내 이름 다시 불러….”
“사결.”
흐릿하게 감기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사결 제발. 가만히 있어.”
“그러지.”
힘없이 들린 팔이 여원을 마주 끌어안았다. 여원이 숨을 멈췄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대신 계속 이렇게 안고 있어 줘.”
“…….”
굳어있던 유성과 재현이 뒤늦게 움직였다.
“약!”
“응급 키트 어디 있어!”
하지만 베이스캠프는 이미 날아간 뒤다. 흙과 나무, 잔해가 뒤섞여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설령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멀쩡할 가능성은 작다. 뒤편에서 어떻게든 정신을 일깨우려 길드장을 부르는 소리가 잦아질수록, 두 S급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크르르르!
사나운 울음이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둘의 표정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번엔 또 뭐야!’
정면의 나무들이 멀리서부터 거칠게 꺾였다. 괴수가 다가오는 것처럼 극적인 등장이었지만 막상 모습을 드러낸 건 검은 말이었다. 두 배에 가까운 덩치에 빨려들 듯 새까만 몸체였지만 생긴 건 영락없는 말이다.
녀석의 등에서 검은 불길 같은 갈기가 흩날렸다. 여원은 잠깐 넋을 잃었다. 레프타의 외양은 모두 같을 텐데, 어째선지 알아볼 수 있었다.
“…레프.”
영주일 적 길렀던 바로 그 녀석이다.
맹수처럼 울음을 터트린 녀석이 폭발에서 유일하게 남은 배길수의 머리를 앞발로 찍어 눌렀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머리가 부서졌다.
천천히 다가온 레프타가 두 사람 앞에 섰다. 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프타, 레프가 고개를 숙였다. 머뭇거리며 뻗어진 손이 콧잔등에 닿았다. 만족스럽게 목을 울린 녀석이 갈기를 움직여 사결의 등을 덮었다.
줄줄 흐른 새까만 안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덩어리는 오래지 않아 드라이아이스처럼 증발해 사라졌다. 옆에서 보면 불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사결은 점점 숨이 편해졌다. 여원은 맞닿은 피부로 다시 차오르는 그의 생명력을 느꼈다. 내심 크게 놀랐다. 그가 겪은 레프타의 치유력은 전장에서 긁힌 상처를 치료해주는 정도였다.
그건 여태 여원이 전투에서 크게 다친 적이 없던 탓이다.
‘그리고 크라투스의 성에 갈 땐 두고 갔지.’
같이 갔다면 자신을 치료해주긴커녕, 아마 하루도 채 못 되어 살해당했을 것이다. 그때도 같은 생각에 레프를 포함한 모든 걸 뒤로 했다. 여원은 새삼 묘한 기분이 됐다. 자신이야 그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지만 미물이 뭘 알겠는가.
버림받았다고 원망해도 할 말이 없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0년 세월을 뛰어넘어 묵묵히 제 앞에 섰다.
“고맙다.”
말이 아니라 개에 가까운 충심이다.
크릉.
여원은 들이밀어진 레프의 콧잔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그러다 보니 레프의 표정이 읽혔다. …잠깐. 말한테 표정이 있어?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녀석의 얼굴엔 ‘이 새끼는 기분 나쁘지만 널 봐서 치료한다. 그러니까 더 칭찬해라.’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
여원은 남은 한 손으로 사결을 꽉 붙들었다. 생명력이 차오른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돌아가 포션을 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질 것이다.
이가 입술을 짓이겼다. 입가로 붉은 피가 흘렀다. 일말의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은 한 번에 한 가지 아픔밖에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여원이 여분의 손으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아파.’
종속의 계약을 상기할 때마다 심장이 아프다 여겼는데 아니었다. 지금 겪는 것에 비하면 그건 그냥 겉가죽의 고통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것에 느리고 둔했던 귀환자는 가장 중요한 감정을 가장 마지막에 알게 됐다.
이제 더는 ‘모른다’는 변명을 앞세울 수 없게 됐다. 서른 해를 넘게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것이 그를 마주했다.
삶의 중심을 흔드는, 무겁고 거대한 무언가. 여원은 그 존재감에 신음하면서도 솟구치는 환희에 낯을 찌푸렸다.
결국은 전부 그의 말대로 됐다. 여원이 한숨을 쉬었다.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타박을 당하고도 놈은 희미하게 웃었다.
“웃지 마라.”
하지 말라니까 외려 웃음이 짙어졌다. 그런 사결의 뒤로 레프가 앞발을 들어 올렸다. 여원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을 때.
퍼억!
앞발이 사결의 뒤통수를 때렸다. 방금까지 빈사 상태였던 그는 소리도 못 내고 기절했다.
“잠, 레프!”
일렁이며 길게 뻗어진 갈기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엇.”
“음?”
순식간에 들린 몸이 레프타의 등에 앉혀졌다. 검은 갈기가 여원의 몸을 제 등에 칭칭 동여맸다. 그리고 단숨에 수해 안쪽으로 달려 나갔다.
“…….”
“…….”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내내 기절해 있던 이현수가 깨어났다.
“끄응… 어디서 탄내가 이렇게 나….”
사위는 고요했다. 열 폭풍 이후 가장자리로 밀려나 올망졸망 모인 B급들이 구원자를 보는 눈으로 이현수를 봤다.
“뭐야. 다들 몰골이 왜 그러…헉!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당황은 잠깐이었다. 곧 악귀처럼 낯을 일그러뜨린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맞다. 유성! 재현! 이 새끼들 어디 있어?!”
고함치는 소리가 난장판이 된 공터에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소리가 잦아들자 방금보다 더한 정적이 차올랐다. 이현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헉. 사장님?!”
이현수가 모로 쓰러진 사결을 발견했다. 창백한 낯이 꼭 시체 같았다. 게다가 엉망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몰골이 그의 불안을 부추겼다.
“언제고 천벌을 받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아직 안 돌아가셨습니다.”
“아. 그래?”
그를 깨우기 위해 천천히 다가간 이현수가 불길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원래도 가는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사장님 안 깨워요?”
“그러는 너희는 안 깨우고 뭐 했는데.”
유성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게… 귀환자님이 납치당했거든요.”
“납치?”
“네.”
“누가.”
“귀환자님이.”
“누가.”
“…….”
현실 부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언가 깨달은 이현수가 닭이 홰치듯 푸드덕거리며 재빨리 사결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곤 유성과 재현을 보며 준엄한 표정으로 사결을 손가락질했다.
“깨워.”
“…부길마님.”
“어쭈. 개겨?”
“개겨야죠 그럼. 목숨은 하나뿐인데.”
“…….”
둘은 단호했다. 분노로 눈 뜰 사결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는 것보단, 너와 대거리하는 게 낫다는 게 절절히 전해졌다.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여원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이현수가 결연하게 움켜쥔 주먹을 위로 들었다.
“진 놈이 사장님 깨우는 거다.”
서로를 돌아본 유성과 재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위. 바위.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