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흰 눈을 번뜩인 기생충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었다. 엇나간 도끼에 어깨가 길게 찍혀도 개의치 않았다.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인 불길이 상처 부위를 지져 막았다. 아귀처럼 안으로 굽은 손이 확 뻗어왔다. 제 몸이 갈라져도 일단 잡고 보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여원의 눈썹이 꿈틀했다.
콰악.
그가 옆으로 눕힌 도끼를 몸에 바짝 댔다. 도끼날에 부딪힌 손가락이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꺾였다. 기생충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여원을 잡으려 애썼다.
퍽!
살짝 질린 표정이 된 여원이 배길수를 걷어찼다. 거대한 몸뚱이가 뒤로 날아갔다. 그 결에 불길을 두른 손이 여원의 가슴팍을 길게 그었다. 상의가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촤악!
여원은 즉시 옷을 한 손으로 찢어 팽개쳤다. 얇은 막처럼 피부 위에 씌워진 공허 덕에 무사하긴 했지만 손이 직접 스친 가슴팍은 예외였다. 날카롭게 찢기고 그슬린 자리가 갈라지고 짓물려 피를 흘렸다.
살짝 흥분했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오랜만의 부상이었고 덕분에 냉정해졌다. 비공정에서 탈출하면서도 중상에 가까운 상처를 입긴 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그땐 전투 중에 입은 게 아니었으니까.
반면 지금은 명백한 적의를 가진 적이 탐욕에 젖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허만 마음껏 쓸 수 있었어도.’
도끼를 선호하지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마계의 무수한 전투에서 까다로운 상대를 만났을 때 여원은 놈의 머리를 통째로 공허에 넣어 닫아버렸다.
‘지금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러려면 몸을 보호하는 공허를 걷어내 써야 하고, 그럼 몸이 무방비로 노출된다. 막을 유지하면서 공격하기엔 지금 그가 쓸 수 있는 공허의 총량이 모자랐다.
‘아니. 총량은 모자라지 않아.’
그의 몸 내부엔 헌터 협회의 측정기에 걸리지 않은 마기가 웅크리고 있다. 필요하다면 잠든 마기를 두들겨 깨우기만 하면 된다. 마계 군단장 시절, 대군의 진열을 무너뜨렸던 공허를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입술을 깨문 여원이 손을 들어 훤히 드러난 가슴팍을 덮었다. 중간계에 떨어진 이후, 샤워할 때마다 맨몸으로 거울을 보는 게 습관이 됐다.
예전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었던 낙인이 이젠 흐릿한 문신처럼 자기주장을 했다. 우둘투둘한 상흔으로도 더 가릴 수가 없었다. 가슴을 누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젠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하는 게 새로운 습관이 됐다. 아무 일도 없을 거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는, 아무 근거 없는 자기 위안과 함께.
쿠르륵.
콰아아!
배길수의 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옷은 이미 불타 사라지고 없다. 그가 선 주변의 땅이 용암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S급이라도 저건 도를 넘었다. 아니나 다를까, 팔꿈치 부분의 살이 흘러내려 뼈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오래지 않아 쓰러지겠지. 하지만 놈이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리 만무하다. 공허마저 뚫고 들어오는 열기를 느낀 여원이 도끼를 움켜쥐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쓰면.
그렇게 여원이 판단의 기로에 서 갈등하던 순간,
콰아앙!
멀리서 쏘아진 거대한 바위가 둘 사이에 꽂혔다.
하얀 바위라고 생각했던 건 거대한 얼음덩어리였다. 고온에 녹은 바닥에 박힌 얼음 주변으로 순식간에 연기 같은 수증기가 솟구쳤다.
하얀 안개에 숨은 여원이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이 얼음을 쏜 자가 왔다. 여원은 무리할 필요가 없어졌다.
역시나 벼락같은 외침이 장내를 갈랐다.
“배길수. 이 개새끼가 미쳤나!”
드론이 폭주할 것처럼 스파크를 튀며 날아왔다. 무시무시한 속도였다.
‘대체 얼마나 마력을 불어넣은 거야.’
‘저거 곧 터질 것 같은데….’
베이스캠프에 다다른 사결이 손을 놨다. 주인 잃은 드론이 계속 날아가다 배길수의 머리 위에서 폭발했다. 불붙은 파편이 수류탄 조각처럼 비산했다.
“으아악!”
가장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B급에게까지 조각이 튀었다. 바로 옆에 박힌 조각에 B급들은 ‘히익’하며 겁먹은 오징어들처럼 더욱 밀착했다.
팔로 자신에게 튄 조각을 쳐낸 유성이 중얼거렸다.
“우리 길드장…. 새삼스럽지만 진짜 미친 사람이네.”
재현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착지한 사결은 여원을 등지고 섰다. 열기로 펄펄 끓는 공기 속에서도 그는 태연했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피부가 하얗게 얼어붙었고 전신에서 수증기가 일었다. 여원은 자기도 모르게 제 상태부터 확인했다.
좀 꾀죄죄하긴 하지만 크게 다친 곳은….
‘아.’
여원이 피범벅이 된 제 가슴팍을 봤을 때, 뒤를 돌아본 사결도 같은 걸 봤다. 홉뜬 눈이 갈라진 가슴팍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냥 겉가죽만 긁힌 거다. 그렇게 말하기 전, 그가 다시 배길수를 향해 섰다.
아까와는 질이 다른 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분을 못 이긴 그가 배길수에게 일갈했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내 가슴을!”
…네 가슴 아니고 내 가슴이다만.
“저게 얼마나 귀한 가슴인데!”
…그걸 왜 네가 결정해.
여원은 중간계에 온 이래 처음으로 수치심이라는 걸 경험했다. 그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고개를 들 수 없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별로 알고 싶진 않았는데.
“죽인다.”
사결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보통 마력운용계는 멀리서 속성 공격을 쏟아내는 게 보통인데 몸부터 날리다니.
“저건 누가 봐도 육체강화계 아니냐.”
유성의 말에 재현이 이번에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화염이 솟구쳤다. 사결은 개의치 않고 뚫고 들어갔다.
콰앙!
냉기를 품은 주먹이 배길수의 얼굴을 후려쳤다. 여원은 보았다. 기생충의 당황이 배길수의 표정으로 드러나는걸.
“너, 너, 넌 뭐야.”
“가슴 주인이다. 이 새끼야!”
가슴 이야기 그만해 이 새끼야….
여원의 간절한 바람은 눈이 돌아간 사결에게 닿지 못했다.
그가 연이어 주먹질했다. 허공으로 떠오른 거대한 얼음이 배길수에게 쇄도했다. 절반은 가는 도중 녹아내렸지만, 나머지 절반은 외려 더욱 날카롭고 미끈해져 그의 전신에 틀어박혔다.
박힌 직후엔 역시 녹아 없어졌다. 곧 배길수의 전신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아아아악!”
고통이 아닌, 분노에 찬 울음이었다. 인간 같지 않은 소리를 내지른 기생충이 폭발하듯 거대한 화염을 둘렀다.
“여원!”
사결이 거대한 얼음벽을 만들어 막으며 여원을 향해 내달렸다. 불길을 헤치고 다다른 그가 멈칫했다. 여원이 얇게 편 공허로 공격을 막고 있었다. 뒤에는 유성과 재현이 딱 붙어 오들오들 떠는 중이다. 사결이 눈을 휘며 웃었다.
“내 연인은 능력도 좋지.”
“…그 이야기는 끝났던 걸로 아는데.”
“저번에도 말했지만 사람 간의 관계라는 건-”
사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길게 날아온 불채찍이 공허의 막을 피해 여원의 몸을 휘감았다.
감긴 곳이 삽시간에 타들어 갔다. 신음을 삼킨 그의 몸이 휙 딸려갔다.
“여, 여, 영주. 만. 잡으면 충분.”
히죽 웃은 기생충이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공허를 몸과 채찍 틈새에 끼운 여원이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휘감긴 곳이 조금씩 타들어 갔다. 사결이 짐승 같은 고함을 지르며 땅을 박찼다.
늦다.
이대로는 그가 오기 전에 휘감긴 부분부터 두 동강 나 죽을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공허를 조금 더 끌어올렸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종속의 계약이 선명해지는 게 똑똑히 느껴졌다.
스르륵.
어디선가 눈꺼풀이 들리고 두 개의 푸른 눈이 비치는 환상을 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그 눈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원은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절감했다. 뺨을 스치는 열기 속에서 그는 뼈가 얼어붙는 추위를 느꼈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마왕성에서의 나날이 뇌리를 스쳤다. 그걸 다시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새삼 죽음이 두려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위험을 감수하며 힘을 쓰려 하는가.
“여원!”
강한 의지를 담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여원은 깨달았다.
아까운 거다.
중간계.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로웠던 세계에서도 제 눈을 사로잡은 저 사람이. 그와 함께했던 날들이.
“이 개새끼가 감히!”
그리고 앞으로 함께 할 날들이 아까워서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다.
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른하게 휘어지는 눈을 본 사결은 더욱 분노했다.
강철근육햄스터가 얼마나 아프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하냐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날아온 사결이 얼음으로 만든 발판을 밟고 뛰어올랐다. 단숨에 위로 솟구친 그가 기생충의 머리에 얼음칼을 박아 넣었다.
“끼에에에엑!”
처음으로 고통에 찬 울음이 터져 나왔다. 불의 채찍이 사라지고 검게 그을린 여원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사결은 기다렸다는 듯 그 몸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쿠웅!
바닥에 거꾸로 떨어진 기생충이 꿈틀거렸다. 반면 사결은 약간 떨어진 곳에 사뿐히 착지했다.
품에 안긴 여원은 뒤늦게 표정을 굳혔다. 다른 사람을 이렇게 들어 안아봤으면 모를까,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안긴 건 처음이었다.
“내려줘.”
“안 돼. 다쳤잖아.”
“다리는 멀쩡하다.”
“부상자는 조용히.”
“…….”
버둥거리는 게 더 꼴사나울지, 계속 이렇게 안겨 있는 게 꼴불견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가 핼쑥해진 낯으로 사결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좀 더 간절하게 말했다.
“내려 주면… 안 되나.”
사결이 움찔 굳었다. 여원을 보는 눈이 숫제 어둑하다.
“다시 한번 말해봐.”
“뭘.”
“애원하는 거.”
내가 언제 애원했다고. 여원이 황당함에 말을 잃었지만 사결은 진지했다.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지금 살짝 섰어.”
이 미친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