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캐릭터가 변한 건 사결만이 아니었다. 잘 벼린 칼날 같던 사내는 중간계에서 2년을 구르며 둥글둥글한 조약돌 같은 면모가 생겼다. 일부에 불과하겠지만 마모된 부분이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온전히 나로 인해 변한 거여야 했는데.’
하지만 여원의 근본이 마계 군단장이듯, 사결의 근본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원이 보지 못할 각도에 자리한 그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여원이 휙 돌아봤다. 사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른하고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안에 품은 음험함을 드러내는 건 침대면 충분하다. 사결이 장난이었다는 듯 엉덩이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슬슬 시작하지. 길게 끌어서 좋을 일도 아니잖아.”
여원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낸 사결은 다시금 여원을 와락 안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사결?”
“아. 더럽게 가기 싫네.”
그가 앓는 소리를 냈다. 여원은 제 허리를 휘감은 팔을 가볍게 툭 쳤다.
“이만 다녀와라.”
“그래.”
사결은 더 뻗댈 수가 없었다. 드론을 꺼낸 그가 단숨에 위로 치솟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윤혜리가 바로 뒤를 따르고, 남은 팀원들도 조금 허둥거리긴 했지만 늦지 않게 쫓아갔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떠난 자리엔 묘한 정적이 흘렀다.
크흠, 이현수가 헛기침했다.
“그럼 유성 님과 재현 님은 여기서 대기해 주시고 여원 님은 저쪽으로 가시죠.”
“잠깐만요. 저 묻고 싶은 거 있어요.”
S급 중 하나가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 이현수가 도끼눈을 떴다.
“안 됩니다. 길드장님 곧 돌아오실 테니까 어서 준비를….”
“아 잠깐이면 됨다.”
그러곤 다른 S급에게 눈짓을 줬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바로 이현수를 낚아챘다.
“이 인간들이 미쳤나?!”
“어허이. 열 내지 마요. 혈압이 얼마나 건강에 나쁜데. 우리 부길마님 릴렉스. 릴렉스.”
“이런 미친! 당장 그만 두…읍! 읍읍!”
직급은 부길드마스터지만 완력은 A급 나부랭이인 그가 눈을 부릅뜬 채 질질 끌려갔다. 그러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능력까지 발현했다.
쿠웅.
“어이쿠.”
마력운용계는 전투에서 상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반면 육체강화계는 그런 게 없다. 그냥 두들겨 패고 보는 게 그들의 전투방식이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물을 상대로 했을 때의 이야기로, 대인전에선 마력운용계가 무조건 우세하다. 육체강화계의 장점 이래 봐야 이 맷집 정도. 그래서 헌터 범죄자를 잡는 전담팀의 경우 한 명의 육체강화계에 다수의 마력운용계를 조합해 팀을 꾸린다.
좋게 말해 탱커고, 나쁘게 말하면 동네북인 것.
그러나 아주 드물게 육체강화계와 상성이 나쁜 속성도 있다.
“놔! 안 놔?!”
“거… 소용없다는 거 알면서 쓸데없이 힘 빼지 마십셔.”
이현수가 그랬다.
그를 둘러멘 S급이 걸을 때마다 바닥이 진흙처럼 푹푹 파였다. 엄청난 중력에도 걸음엔 거침이 없다. 적당히 멀어진 그가 누울 자리 보는 강아지처럼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더니, 갑자기 스쿼트를 하기 시작했다.
“하다 보니 이거 운동 되는데요?”
“이 미친 새끼가?!”
여원은 우두커니 서서 혼란한 광경을 응시했다. 겉보기엔 무감한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제 겨우 개미 눈곱만한 사회성을 획득한 그가 감당하기에, 크레딧 S급들의 광기는 너무 일렀다. 고심한 여원은 나름 최선의 결론을 내렸다.
‘…반란인가?’
“그렇게 심각해지지 않으셔도 돼요.”
곁에 남은 S급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장난치는 거니까.”
사태 해결을 위해 나서려다 멈칫했다. 그의 손가락이 타의로 윈드밀을 하는 이현수를 가리켰다.
“이 xx같은 새끼가. xx xxx!”
쉼 없는 육두문자가 쏟아졌다. 이를 악문 그가 코피를 뿜었다. 얼마나 힘을 썼는지 그 순간 S급의 몸이 땅에 푹 박혔다. 그가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아악! 허, 허리가!”
…장난이라고? 저게?
“저희가 원래 좀 거칠게 놉니다.”
그는 뻔뻔함도 S급이었다.
“전유성이라고 합니다. 귀환자 서여원 님이시죠?”
혼란스러워하는 여원을 보고 가볍게 웃은 청년이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궁금했어요. 워커홀릭 길드장님이 푹 빠진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
“처음엔 귀환자라서 싸고도나 했는데 옆에서 보니 아니더라고요.”
여원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이유 모를 불편함이 일었다. 어떻게 이 자리를 파해야 하나 고민해도 별수가 없다. 청년이 불쑥 물었다.
“길드장님이 잘해줘요?”
고민할 것도 없다.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길드장님, 그렇게 보여도 비밀이랑 상처 많기로는 그리샤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이거든요.”
상처 없는 사람이 없고 사연 없는 사람이 없는 도시 그리샤. 그런 곳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라며 청년은 혀를 찼다. 여원은 이게 욕인지 옹호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뭔지는 아무도 몰라요. 부길마야 코흘리개 시절부터 함께했으니 말하지 않아도 알 테지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그러니까 길드장이 자진해서 무언가 털어놓았다면 의심하지 않아도 돼요. 길드장은 당신한테 진심이에요.”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본론이었다.
“왜.”
여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럼 묻겠는데. 귀환자님도 우리 길드장 좋아해요?”
“그건….”
답은 여전히 ‘모른다.’지만 전처럼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여원은 입에만 맴도는 말을 혀끝으로 눌렀다.
하루하루가 다르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매일이었다.
은근슬쩍 분위기를 잡는 걸 못 밀어내고 몸을 내맡겼을 때부터였을까. 잠들고 일어날 때마다 옆자리에 매끈한 얼굴을 마주한 날부터일까. 그도 아니면 잠꼬대인 척 소파에서 일하던 제 무릎을 베고 누웠던 때부터인가.
짚이는 걸 하나씩 꼽을수록 여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 물을 필요도 없었네.”
“…….”
“귀환자님. 우리 길드장 좋아하는구나?”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한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두커니 굳은 여원을 두고 씩 웃은 유성이 이마 위로 손 그늘을 만들었다. 살벌한 인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엇. 기절했다.”
혈압과 스트레스를 못 이긴 이현수가 축 늘어졌다. 입맛을 다신 사내가 “거 이런 걸로 A급이 기절씩이나…”라고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야! 그만하고 이리 와! 오시는 것 같다.”
“으으. 너 때문에 허리 부러졌잖아.”
“붙여 그럼.”
“이 새끼가.”
다정한 대화가 오갔다. 여원이 고개를 돌렸다. 기절한 이현수 주변으로 S급들의 폭주에 눈치만 보던 B급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아이고 부길마님’을 외쳐댔다.
“아 근데 요란하게도 오시네.”
“야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현수를 괴롭히던 사내가 손가락으로 앞과 옆을 번갈아 가리켰다.
“방향이 다르잖아.”
“어, 그러네.”
사결이 떠난 방향은 정면이었고 다가오는 기세는 측면이다.
“뭐 빙 둘러서 몰아왔나 보….”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청년이 표정을 굳혔다. 여원은 그보다 한발 앞서 등에 메고 있던 도끼를 뽑았다.
후웅.
크기는 배틀액스에 가깝지만 자루는 짧다. 왼손에는 보조용 검을 들었다. 흉흉한 기세에 S급들이 흠칫해 물러났다. 내내 곁에 있던 유성은 해쓱하게 질렸다.
“뭔 배틀액스를 한 손으로….”
“한 손으로 휘두르면 한 손 도끼지.”
“아. 그러네.”
여원이 시답잖은 대화를 강제로 끊었다.
“온다.”
웃음기를 지운 S급들이 자세를 잡았다. 이곳은 마의 수해. 중간계에서 가장 마계 같은 곳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고,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파스슥!
기괴한 형상의 나무들이 거칠게 흔들리며 의문의 습격자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마물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가면을 썼고 옷도 검은색 일색이다. 누가 봐도 수상했다.
“누구냐!”
대답은 없다. 유성이 재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저런 차림으로 왔는데 누구냐고 물으면 잘도 대답해주겠다!”
“아 말로 해 말로! 왜 치고 지랄-”
둘이 티격태격하는 와중에도 여원은 자세하나 흐트러짐 없이 침입자들을 응시했다. 가면 위로 드러난 눈동자가 아닌 척 자신을 향했다. 습격의 목적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구체적인 행동 방향까진 알 수 없지만 분명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무리를 훑는 여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있다.’
저들 틈새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인간인 척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닌 것. 그 의미를 되새긴 여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벅.
맨 앞에 선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여원을 똑바로 응시했다.
“귀환자.”
“…….”
“같이 가 줘야겠다. 협조적으로 구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사상자가 나올 테니까.”
예상치 못한 사태에 굳어진 B급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가면을 쓴 사내는 배길수였다. 그는 일이 제 뜻대로 풀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실수였다. 길드장의 힘으로 기본적인 정보는 손에 넣었지만 여원의 인간성까진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던가.”
“뭐?”
“여기까지 들어온 이들이 그 정도 각오도 되어 있지 않을 것 같나.”
재현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건 B급 분들 말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옆에 있던 유성이 재현의 손을 확 잡아 내렸다.
“아 좀. 닥쳐 좀!”
“뭐 이 새끼야?”
“…….”
바로 옆의 정신 산만함에도 여원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굳은 눈으로 가면을 노려볼 뿐이다. 무리 속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던 이질감은 그가 앞으로 나선 순간 극대화됐다. 민들레 사이의 말미잘처럼, 아예 종이 다른 무언가가 저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순순히 따라올 생각은 없다는 거군.”
습격자는 오히려 기껍다는 듯 낄낄거리며 웃었다. S급 둘이 서로의 머리채를 잡다 말고 멈칫했다. 저 웃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잡아라. 나머지는 적당히 제압해.”
“예!”
가면을 쓴 이들이 앞으로 쇄도했다. 기세에서 이미 상대가 전원 A급 이상임을 확신한 B급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감히 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이들이 이를 악물고 수해로 몸을 던졌다. 신나게 뒤쫓는 자들의 손에서 불길이 쏟아졌다.
유성과 재현이 동시에 말했다.
“헤스티아?”
“…….”
“…….”
사나운 기세로 날뛰던 습격자들이 흠칫했다. S급들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졌다.
“이 새끼들이 미쳤나?!”
“아니 가면을 쓰면 뭐 해! 불 다루는 방식이 딱 헤스티아잖아!”
도망가던 B급들이 헤스티아라는 말에 수풀과 나무 사이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배길수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뒤에 서 있던 김정수는 어이가 없었다.
‘진짜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한 거? 이깟 가면 썼다고?’
“귀환자를 확보하고 나머지는 전부 죽인다.”
미친 새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김정수 역시 알았다. 일을 벌인 이상 저것 외에 뒤탈 없이 끝낼 방법 따윈 없다. 아니, 저렇게 해도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훨씬 컸다.
‘일이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지?’
배길수는 음험했지만 멍청한 자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무리 주먹구구식이라도 헤스티아를 그리샤의 둘째가는 길드로 키워내진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떻게 봐도 악수에 하책인 걸 이렇게 밀어붙이다니.
‘배길수답지 않아.’
이제 와선 다 소용없다는 걸 아는데 자꾸 생각이 그쪽으로 튀었다. 뒷머리를 잡아끄는 이질감 때문이다. 이건 그가 아는 배길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물론 사결이 얽혀있고, 그에 대한 열등감이 이번에 폭발했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풀뿌리 같은 것이 계속 발에 걸렸다.
‘됐다. 씨발.’
김정수가 이를 악물며 앞을 봤다. 이미 돌아갈 길 따윈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배길수가 저지른 상황을 쫓아가는 것뿐이다.
“던져라!”
길드장의 명령에 가면을 쓴 이들이 품에서 검은 공 같은 걸 꺼내 던졌다.
풍선 터지듯 터진 공 안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가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연기를 들이마신 B급 둘이 몸을 뒤틀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재현이 낯을 굳혔다.
“독?”
“아니야!”
옷으로 입가를 가리며 물러난 유성이 이를 갈았다.
“마기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세상엔 절대 만들어선 안 될 물건이 있다. 그런 것들은 설령 만들었다고 해도 사용해선 안 됐다. 구시대의 핵이나 백린탄이 그랬다. 그리고 두 S급이 목도한 건, 만든 목적에서 앞선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물건이었다.
마기를 담은 폭탄.
헌터라면 모두 생각은 해 봤으나, 실존은 상상해보지 못한 물건이 거기 있었다. 마기 폭탄은 순식간에 헌터를 무력화시켰다. 효과를 확인한 헤스티아 길드원의 안색이 변했다. 자신이 손에 쥔 게 어떤 물건인지 깨달은 이들이 이번엔 S급을 정확히 노렸다.
헌터에게 있어 등급은 절대적이다. 아무리 마력운용계가 육체강화계를 상대로 유리하다지만 등급 하나가 차이 난다는 건 어린애와 어른만큼의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어린애는 절대 맨주먹으로 어른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권총을 손에 든 어린애라면 어떨까.
“흐…흐흐흐!”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오네.”
“그러게나 말이야.”
자신이 사냥꾼임을 자각한 헤스티아 길드원들이 음흉하게 웃으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유성과 재현의 뒷목으로 식은땀이 고였다.
유성이 힐긋 여원을 돌아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사람만큼은 무사히 지켜야 했다. 어떻게 입을 털어야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가자! S급 사냥이다!”
잔뜩 상기된 외침이 신호탄이 됐다.
“시발! 그래 와라. 어디 한 번 와 봐. 이 새끼들아! S급이 물로 보이냐?!”
“조져!”
그렇게 지금까지완 다른 양상의 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