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사흘이 지났다.
“그래서.”
사결이 대놓고 이를 드러냈다.
“대체 네 일은 언제 끝나는 거지?”
첫 만남에서 느꼈던 무게감이나 분위기는 이젠 찾아볼 수 없다. 여원이 할 말 많은 표정으로 그를 봤다.
“넌.”
넌 일 안 하나… 라고 물으려 했는데, 매끈한 얼굴을 본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원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사결이 밑에서 그를 올려다봤다. 소파 끝으로 비어져 나온 발이 까닥였다. 잘 먹고 잘 누웠으면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생긴 고양이 같다.
“나 뭐.”
여원은 말을 아꼈다. 이현수는 지금 레프타가 출현한 지역을 봉쇄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이었다. 말이 새어나가는 걸 막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하는 데까진 해 보라는 사결의 엄포 때문이다.
여원이 단말기를 확인했다. 문자 아이콘 위로 32라 적힌 숫자가 깜박였다. 전부 동준의 문자다. 아무래도 걱정할 것 같아서 ‘나는 괜찮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이건 그 결과였다. 단말기가 쉼 없이 울어대는 통에 무음으로 바꾼 지도 벌써 사흘째다.
정말 괜찮냐, 뭐 협박당한 거 아니냐, 그런 거면 당근 이모티콘을 보내라. 걱정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텍스트만으로도 절절히 전해졌다.
픽 웃은 여원이 화면을 아주 천천히 누르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치는 게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사결의 눈이 뾰족해졌다.
“지금 설마 문자 보내?”
여원이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다만.
“문자를 보낸다고? 네가?”
“뭐가 이상하지.”
담담한 대답에 사결이 으르렁거렸다.
“나한텐 딱 네 개 보냈어.”
얼음 속성 주제에 불길을 두른 그가 미친 듯이 단말기를 두드렸다. 원하는 것을 찾은 사결이 여원의 앞에 화면을 들이밀었다. 사내는 그걸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이게 뭐, 내지는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나 싶은 반응이다.
사결은 열이 뻗쳤다. 아니 이렇게 끼를 부려놓고! 어? 사람을 홀려놓고 어?!
“왜 화를 내는 거지.”
여원은 진심으로 곤혹스러워했다. 뭐가 잘못된 건지 정말로 모른다는 뜻이다. 그래. 이런 점이 참 귀엽긴 한데.
‘열 받네.’
정수리로 화가 뻗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사결이 최대한 무해한 척 웃었다. 제 인내심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서 어떤 새끼… 아니, 어떤 분과 문자 중이지?”
여원에게도 눈치란 게 있다. 그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사결의 입가가 파들 떨렸다. 기껏 만들어낸 웃음이 깨지기 직전.
“사장님!”
이현수가 뛰어 들어왔다. 드물게 밝은 얼굴이었던 그는 당장 사람 하나 얼려 죽일 것 같은 사결을 보더니, 삐걱거리며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왜.”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뭐?”
요 며칠 이현수는 한 마리의 거미 같았다. 다리가 여덟 개쯤 달린 것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는 뜻이다.
다발적인 문제로 성사되지 못할 확률이 높던 일이었다. 확실히 저렇게 뛰어 들어올 만한 소식인 건 맞다. 혀를 찬 사결이 되물었다.
“주변 통제는?”
“완벽합니다.”
“그래.”
소파에 길게 뻗어있던 사결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목을 좌우로 움직여 푼 그가 여원을 향했다.
“일단 문자에 대해선 나중에 또 이야기하고….”
결국 해야 하는 거냐. 여원이 살짝 우울해진 걸 모른 척한 사결이 씩 웃었다.
“가자. 말 잡으러.”
* * *
레프타.
스펜타의 상위종. 속성은 어둠.
온통 새까만 몸체에 일렁이는 어둠을 갈기 대신 휘날리는 아름다운 말이다. 여원은 드론에 매달린 채 검은 점처럼 보이는 레프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시력으로도 잘 보이지 않을 거리였지만 이 이상은 사결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결국 한숨을 쉰 그가 아래로 내려왔다.
“어때.”
“안 보인다.”
“그래?”
안 보인다고 하면 조금 더 가까이 가자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 하고 끝낼 일이 아니다. 그런 기색을 읽어낸 사결이 작게 웃었다.
“굳이 지금 볼 필요 없어. 어차피 좀 있으면 보게 될 텐데.”
이현수에게서 대략적인 작전개요를 전해 들은 여원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냥 내가 직접 가는 편이-”
“안 돼.”
“안 됩니다.”
사결과 이현수가 동시에 대답했다. 특히 이현수의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여원 님은 자신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는지 실감이 안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히 제가 판단하기에, 수해 공략은 물론이고 그 이후를 위해서라도 제발 위험한 짓은 삼가 주십시오.”
여원이 수해의 지도를 그릴 때부터 사결 못지않게 과보호하기 시작한 이현수였다.
“현수가 맞는 소릴 할 때도 있군.”
사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마에 핏줄이 솟은 이현수가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시라며 이를 갈며 말했다.
“전 언제나 맞는 소리만 했습니다. 그 맞는 소리를 귓등으로도 안 듣고-”
“서두르지. 저것들 이동하기 전에 처리해야 하니까.”
여원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습성을 못 버린 레프타는 게이트를 넘어와서도 이동 생활을 했다. 아마 게이트를 중심으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발견할지 모른다는 뜻이다.
일행은 우선 베이스캠프에 자리를 잡았다. 본래 이쪽에서 공략해 들어가는 다른 길드와 함께 쓰던 장소였지만 오늘 여기 있는 건 크레딧의 길드원들뿐이었다.
무려 S급 셋에 A급이 넷이었다. 생포가 전제라고 해도 레프타는 추정 등급 A 상급이다. S급에도 들지 못한 놈들을 상대하기엔 과한 전력이었으나.
‘길드장이 까라면 까야지.’
이현수가 모든 걸 포기한 채 수해의 먼 곳을 응시했다.
반면 아무 생각이 없는 S급들은 여원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빛내며 튀어왔다.
“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슴다!”
그들이 신나서 인사를 건넸다. 여원은 눈만 끔벅이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서여원입니다.”
인사를 했는데 떠나지 않는다.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그 주변을 얼쩡거렸다. 당황한 여원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사결이 자연스럽게 그 앞을 막아섰다. 마물을 찢을 때나 발현되던 흉포한 살기가 S급들을 덮었다.
“아이고 저쪽에 간식 바가….”
“내가 무기를 어디 뒀더라.”
S급 둘이 분분히 흩어졌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여원을 향해 있었다. 그들만이 아니다. A급들은 물론이고, 베이스캠프의 잡일을 담당하는 B급 이하의 스태프들까지 아닌 척 화제의 중심을 엿보기 바빴다.
“괜찮아? 안색이 좋지 않은데.”
“괜찮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입술이 파리하다. 차라리 마물들을 상대하는 게 낫다는 표정이다. 여원은 그 후 아닌 척 사결을 졸졸 쫓아다녔다.
방충제 역할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여원이 자진해서 제게 붙는다는 거였다. 내적인 들썩거림을 숨기지 못한 사결의 낯이 활짝 폈다. 그는 그 상태로 베이스캠프 내부를 넓게 돌아다녔다. 뒤따르던 근육햄스터는 거들먹거리는 뱀의 꼬리에 더욱 바싹 붙었다. 짜게 식은 이현수가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준비는 끝났나.”
“진작 끝났죠.”
“좋아.”
S급 둘은 베이스캠프에 남는다. 나머지 S급 팀장 한 명을 포함한 A급 한 팀이 사결과 함께 가서 레프타를 몰이해 온다. 그럼 대기하고 있던 S급이 가능한 상처 없이 제압하고 여원이 길들인다. 이게 이번 작전의 큰 골자였다.
여원이 한 손을 들었다.
“역시 그냥 내가 직접 가는 게-”
“안 돼.”
“안 됩니다.”
힘없이 손을 내린 여원의 옆으로 S급 둘이 슬쩍 붙어섰다.
“저희가 잘 보호하겠습니다.”
“털끝 하나 안 다치게 잘 하겠슴다.”
사결이 경고했다.
“혹시 여원의 입에서 너희에 대한 나쁜 말이 나오면 너넨 뒤진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심장이 얼어붙든 머리가 얼어붙든. 둘 중 하나는 얼려서 부숴버리겠다는 의지가 서늘한 눈에 담겨 있었다.
“옙.”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립니다.”
“잘하자.”
사결이 살벌한 경고를 남기며 A급 팀을 돌아봤다. 내내 눈치만 보고 있던 A급 헌터들 앞을 한 여자가 가로막았다. 등에 짊어진 거대한 도전이 인상적이었다.
“윤혜리 팀장입니다. 이번 A급 신종 토벌에 길드장과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에 오들오들 떨던 팀원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얼리지만 말아 주세요!”
인사가 아니라 살려달라는 애원이다. 사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것들은 자기 길드장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현수가 태연히 대꾸했다.
“아무리 저희 길드장님이 막 나가도 이유 없이 사람을 얼리진 않습니다.”
그건 결국 이유가 있다면 얼린다는 뜻 아닌가?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A급들의 낯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뒤늦게 아차 한 이현수가 급하게 덧붙였다.
“가능하면 길드장님 주변을 알짱거리지 말고, 자극하지 말고, 먹이도 주지 마세요.”
이 새끼가 미쳤나. 너무 어이가 없어 욕도 못 한 사결이 이현수의 주둥이를 얼려버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여원이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것만 조심하면 됩니까.”
“…….”
사결이 생긋 웃었다.
콰앙!
베이스캠프 중앙에서 거대한 얼음이 솟구치며 사람들이 나가떨어졌다. 무사한 건 사결이 재빨리 허리를 휘감아 당긴 여원 하나뿐이었다.
“여원.”
흠칫.
“이따 집에 가서 보지.”
느릿하게 허리를 문지르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여원은 말 그대로 뱀 앞의 햄스터가 되어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