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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를 잡는 방법 (70)화 (70/106)

70화

여태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떠올라 마음의 수면을 꽉 채운 기분이다. 

그가 이명환의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여원의 인생관을 가로지르고 있던 거대한 벽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여원은 어떤 대비도 없이 그 너머를 마주해야 했다.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감정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욕망이 부산스레 날뛰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감한 외견에 감사했다.

흔들림이 티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원은 사결을 향해 말했다.

“이럴 거면 네 침대는 왜 있는 거냐.”

“그러게. 그냥 네 침대를 더 큰 걸 살 걸 그랬지.”

“…….”

처음엔 돌아가게 했지만 그것도 의미 없었다. 아침에 눈 떠보면 단단한 팔이 자신을 감고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중간계에 와서 유해졌다지만 마계에서 지낸 세월이 얼만데. 다시 와서 끌어안고 자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나.

‘무의식이 절대 해를 끼칠 리 없다고 판단했다는 거지.’

그건 그것대로 묘한 기분이었다. 

그가 사색에 빠진 사이, 눈치를 보던 사결이 슬그머니 가슴팍을 더듬었다. 여원은 내버려 뒀다.

상흔 때문에 과민하게 반응하던 것도 다 옛말이다. 사결은 이상하게 가슴에 집착했다. 틈만 나면 손을 뻗어 문지르고 주물러서 이젠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사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손길이 좀 더 과감해졌다. 티셔츠를 아예 걷어 올린 그가 손끝으로 상흔을 더듬었다.

그제야 여원이 조금 움찔했다. 손가락이 점자라도 읽는 것처럼 우둘투둘한 자국을 느리게 덧그렸다. 마치 그렇게 하면 거기 얽힌 이야기가 보이기라도 할 듯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그건 사결도 여원도 알 수 없었다. 

사결은 묻고 싶어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여원은 영원히 하지 못할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사결은 애가 탔다. 평소에도 묵직한 바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였지만 상흔만 건드리면 진짜 바위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색으로 물들일 수 있다고 확신하다가도 이렇게 굳은 상대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불안해졌다.

가라앉은 눈을 한 사결이 목석같은 사내의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꼭 저처럼 단단한 피부였다. 하지만 온기가 머물렀고 피부는 부드러웠다. 그의 몸에선 자신이 쓰는 것과 같은 보디 워시 향이 났다.

그래. 일단은 이거면 됐다. 사결은 다짐하듯 생각하며 손가락을 벌려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단단하고 두툼한 가슴은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뭐 하는 거냐.”

“예전엔 유두에 손끝만 스쳐도 도망갔는데 지금은 딴생각까지 하며 가슴을 맡기고 있잖아. 그게 신기해서.”

“…별게 다.”

여원이 슬그머니 그의 팔을 치워냈다. 사결이 픽 하고 웃었다.

“만지고 싶어.”

“…….”

“만지게 해 줘.”

당당하게 요구하자 황당한 표정이 되돌아왔다. 사결은 웃지 않았다. 그가 진지하게 말하자 여원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답은 듣지 못한 채, 사결이 다시 손을 뻗어 한쪽뿐인 유두를 살짝 비틀었다.

“읏.”

어깨를 흠칫 떨며 신음한 여원이 싸늘한 눈으로 돌아봤다.

“아프다.”

“미안.”

순순히 사과하며 입술로 그의 귓불을 지분거렸다. 손은 여전히 가슴을 쥔 채다.

“그게… 그렇게 좋나?”

“응?”

“가슴.”

“응. 좋은데.”

시원한 대답에 여원은 할 말이 없어졌다. 뭔가 이상한 건 알겠는데 뭐가 이상한지까지 알기에 아직은 내공이 부족했다. 뭐라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는 그에게 사결이 픽 웃으며 속삭였다.

“정확히는 네가 좋은 거지.”

“…….”

‘아.’

손바닥에서 규칙적으로 느껴지던 박동이 변했다. 그걸 깨달은 사결의 심장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비스듬하게 떠오른 햇살이 침실을 환하게 밝혔다. 햇볕 냄새가 날 것 같은 침대. 그 위에 얽힌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서로의 존재를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상흔에 대해 듣게 될 날이.

말하게 될 날이.

그리 머지않았는지 몰랐다.

* * *

사건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망설임 없이 수해를 밀고 들어가던 팀 중 한 곳에서 대량의 부상자가 나왔다. 사망자가 없는 게 천만다행이었지만 보고를 들은 길드 수뇌부는 그 생각을 철회했다. 등급을 불문하고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즉시 크레딧에 지원을 요청했다. 마물에 대한 설명을 들은 여원이 말했다. 

“레프타군.”

“레프타면….”

“시기에 따라 이동하는 야생마 무리.”

영지 인근은 레프타의 서식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검고 아름다운 몸을 가진 야생마 무리가 한 번씩 초원을 찾곤 했다. 과거를 떠올린 여원의 눈이 아련해졌다. 하지만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레프타가 게이트를 넘어 출몰한 것이라면.

“상대하기 까다롭다.”

이유는 속성 때문이었다.

“하필 어둠이라니.”

치유 능력도 있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라 일단 넘어갔다. 어둠은 희귀한 속성 중에서도 최상위에 랭크되는 속성이다. 완전히 상반되는 빛이나 같은 어둠이 아니고선 통하지 않는다. 완전히 굳은 표정이 된 이현수가 은근슬쩍 여원을 찔렀다.

“그래서 뭔가 해결책은 있겠죠?”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잡으면 된다.”

그건 전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등 뒤에서 마물보다 더한 살기가 느껴졌다. 저게 뒤지고 싶나. 쓸데없는 소릴. 들리지 않은 말들이 육성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사결의 저런 모습도 이젠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게 된 여원은 이유 따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가 여전히 이현수를 보며 말했다.

“내 도끼는 어디 보관되어 있지?”

그렇게 말한 여원이 홀로 멈칫했다. 영주의 자리에 앉아 시즌별로 있던 전쟁에 나설 때면 항상 하던 말이었다. 묘한 향수에 잠긴 그는 점점 싸늘해지는 분위기를 읽지 못했다.

이현수가 간절함을 담아 여원을 봤다.

“확실히 관심이 좀 잠잠해지긴 했습니다만 나서기엔 아직 이릅니다. 기자들은 길드 건물 앞에 텐트 치고 농성에 들어가고 온갖 문의로 길드 업무가 마비되겠죠.”

약간 과장한 게 없잖아 있었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비슷한 수준은 됐으니까. 물론 이것도 여원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외활동을 하면 다 해결될 문제였지만 저 지옥의 수문장이 지켜보는 이상 실현 불가능한 해결책이었다.

‘싸고도는데도 정도가 있지.’

사결이 이현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말려라. 아님 뒤진다. 이현수가 방긋 웃었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진짜.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심이….”

여원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그도 완강했다.

“내가 아니면 레프타는 못 잡는다.”

이유 있는 고집에 이현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어느새 여원의 뒤로 이동한 사결이 그를 보며 웃었다. 검지로 입을 톡톡 두드리곤 엄지로 제 목을 긋는다. 혀 잘못 놀려서 일이 틀어지면 죽여 버리겠다는 뜻이다. 

이현수가 마주 웃었다. 그리고 품에 고이 품고 다니던 사표를 꺼내 바닥에 패대기쳤다. 

“안 해! 씨발!”

“…저 새끼가 미쳤나.”

“아 몰라! 때려쳐! 퇴사하고 귀농해서 소나 키우고 말지!”

“너 지금 양우농가 무시하냐? 소 키우는 건 뭐 쉬운 줄 알아?”

“아악!”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여원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했다.

“내가 해야만 한다. 레프타는 길들이는 게 가능하니까.”

그런 걸 그냥 죽여 버리면 아깝지 않나. 대수롭지 않게 던져진 말에 이현수가 턱을 떨어뜨렸다. 사결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원의 어깨를 쥐었다.

“길들인다고? 마물을?” 

“그런 게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안 될 이유가 있나.”

평범한 상급 헌터 둘이 할 말을 잃었다.

마물은 죽이고 없애야 할 존재였다. 게다가 마물 자체도 워낙 공격적이고 사나운 성질이라 길들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게이트 오픈 초기에 몇 번 시도했다는 기록은 읽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저도 기억에 있습니다. 처참히 실패하고 혈세를 낭비했다며 엄청나게 까이다가 관련된 자들이 죄다 사퇴하고 마무리됐죠.”

그 후 마물은 길들일 수 없다는 게 정설로 자리 잡았다.

“대부분은 그렇다.”

여원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면 가끔 되는 녀석들이 있다.”

“…….”

그냥 쥐어박아서 말 듣게 만들었다는 뜻 아닌가. 저거.

“세상에.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수해의 이동수단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그런 수준이 아니에요!”

수해용 드론은 사실상 도보를 제외한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다만 단점이 몇 가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엄청난 고가에 무척 섬세한 장비라는 것, 그 때문에 미로를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주제에 사용자의 마력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다는 점이었다.

“협회에 있는 걸 다 합쳐도 20기가 안 될 겁니다. 게다가 마력 소모 때문에 A급은 최전선의 베이스캠프까지 한 번에 갈 수 없어요. 중간에 세 번 쉬어가야 합니다.”

이건 좀 놀랍다. 그 정도라니.

듣고 있던 사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도 단번에 못 가. 적어도 한 번은 쉬어야 해.”

여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동시에 방송 자료화면으로 봤던 거대한 얼음산을 떠올렸다. 그런 걸 만들어내는 사결의 마력이 고갈될 정도라고?

“비공정은….”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베이스캠프도 이동하는데 선착장을 들어 옮길 순 없잖습니까. 게다가 마수들이 우글거리는데 그걸 온전히 지키려면 상주 인력이 지금의 두 배는 필요합니다.”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도 그렇다. 하지만 사결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비행형이어야 한다는 건 이해해. 사륜이고 나발이고 그런 밀림을 달릴 차체는 구현하기 힘들 테니까. 그런데 뭐 편하게 가는 것도 아니고 겨우겨우 매달려서 가는데 왜 연비가 이따위냐고.”

여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현대기술의 결정처럼 보이던 드론이 갑자기 고철로 느껴진 탓이다. 수해가 넓은 것도 있겠지만 저 사결의 마력이 고갈된다면 확실히 엄청나게 연비가 나빴다. 이현수가 볼멘소리했다.

“그게 최선이라잖아요! 연구팀이랑 기술진이 뭐 헌터들 괴롭히겠다고 그랬으면 말도 안 합니다.”

“…넌 왜 헌터면서 그런 샌님들 편을 드냐?”

“…그러게요. 왜지.”

초록은 동색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서류에 파묻혀 살다 보니 그쪽에 동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민망해진 이현수가 헛기침했다.

“아무튼, 마수를 이용해 이동하면 마력 손실을 막을 수 있겠죠. 블랙미스트야 여원 님이 걷어주실 테니…. 어쨌든 토벌이 훨씬 쉬워질 겁니다.”

여원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수는 그러고도 연신 혼잣말로 감탄했고, 사결은 단내가 나는 눈으로 여원을 봤다. 어지간한 시선엔 익숙해진 그조차 흠칫할 만큼 진득한 눈이었다.

“왜 그렇게 보나.”

“어디서 이렇게 사랑스럽고 유능한 게 떨어졌나 싶어서.”

“쓸데없는 말을.”

귓불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사결이 픽 웃으며 달라붙었다. 이현수가 다 포기한 얼굴로 자리를 떴다. 여원은 차마 밀어내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받아주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깔려 잔뜩 침질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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