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여원이 틀어박힌 것과 별개로 세상은 바쁘게 돌아갔다.
수해 토벌은 탄력을 받아 더욱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됐다. 사망자는커녕 사상자도 없이 전체의 10분의 1가량을 더 파고 들어갔다.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여기서 파생되는 일과 서류처리를 담당하는 입장에선 절로 뺨이 핼쑥해졌다.
여기에 여원의 주도하에 제작에 들어간 마계 지도 건이 더해져, 이현수는 숨 쉴 틈 없이 일했다. 어떻게든 여원의 옆에서 엉덩이를 뭉개던 사결마저 S급들의 손에 의해 끌려나갔다.
“자자. 갑시다요.”
“이 새끼들이 미쳤나!”
발악하는 사결의 손목 발목에는 헌터용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다. 그가 부릅뜬 눈으로 여원을 봤다. 여원이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무슨 일인지 먼저 부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갔더니, 허리를 끌어안자마자 철컥 소리를 들었다.
철컥?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S급들이 뛰어 들어와선, 지금이다. 사결이 살기를 품고 으르렁거렸다.
“놔라.”
“지금 놓으면 저희 다 죽는 걸 아는데 놓긴 뭘 놔요!”
“그리고 지금 길드 전체가 불난 듯 돌아가는데 휴가가 말이 됨?”
“일하지 않는 자. 연애도 없음다.”
이현수는 감탄했다. 분명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는데 주변 온도가 내려가지 않았다. 여원이 싫어했던 걸 기억하고 저 와중에도 못된 버릇을 의식적으로 억누른 거다.
‘사랑은 위대하구나.’
고개를 끄덕인 그가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S급들이 포박된 사결을 안으로 옮겼다. 그가 체면도 잊고 몸을 뒤틀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마물을 찢어 죽이는 괴력이 발휘됐다. S급 헌터들이 단체로 휘청거렸다. 그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장난기가 가셨다. 그때 머뭇거리며 배웅을 나온 여원이 나직이 말했다.
“다녀와라.”
들썩이던 기세가 잠깐 잠잠해졌다. 이현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문을 닫았다.
옮겨진 과정이야 어찌 됐든, 일단 집무실에 당도하자 사결은 냉정하게 일을 처리했다. 밀린 서류를 기계처럼 확인하고 지시사항을 칼 같이 전했다.
끝났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층에서 층을 이동해 돌아오는 길. 사결은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중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으나 그런 건 없었다. 여원은 거실에서 누군가와 연락을 하고 있었다.
‘연락이라고?’
헌터 협회에서 등급을 받으며 새로운 ID를 발급받았다. 당연히 단말기도 새것이다. 그의 번호를 아는 건 사결과 이현수뿐이었다. 그런데도 누군가와 연락을 하고 있다니. 그건 여원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했다는 뜻이다.
사결이 빙긋 웃었다.
‘어떤 개새끼야.’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사결은 그 개새끼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응.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남이 들으면 무뚝뚝하다고 표현할 목소리였다. 하지만 사결은 알았다. 은근히 깃든 편안함과 호의를. 업무 피로나 스트레스 같은 건 비할 바도 아니었다. 사결의 속이 홀딱 뒤집혔다.
“잘 지내고 있다니까.”
여원이 뒤늦게 사결을 발견했다. 그가 난감해하며 연락을 마무리 지었다. 사결의 웃음이 짙어졌다.
“카페 사장?”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아 그래 뭐. 궁금할 수 있지. 그렇지. 그 뒤로 얼굴 한번 못 봤잖아.”
사결이 싱글거리며 웃었다. 여원이 흠칫했다.
“화났나?”
“안 났어.”
여원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난 것 같은데.”
사결이 더 참지 못하고 말을 쏟아냈다.
“사람이 온종일 일하고 돌아왔는데 잘 왔냐는 인사도 안 해주고! 웬 놈팡이랑 전화하느라 눈길 한번 안 주고!”
“미안하다.”
당황한 여원이 순순히 사과했다.
“그럼 키스해줘.”
사결이 뻔뻔하게 말했다. 그는 여원이 못하리라 생각했다. 망설이고 곤혹스러워하다 다시금 미안하다 사과할 것이라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하겠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상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무뚝뚝하고 훤칠한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사결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부드럽고 말랑한 살이 입술에 닿았다.
그것도 입술이었다. 여원의 입술!
‘씨발.’
마음의 소리가 튀어 나갈 뻔했다. 사결의 손이 떨어지려는 뒤통수를 휘감았다.
여원 쪽에서 먼저 시도한 키스였다. 그걸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단단한 몸을 꽉 붙들었다. 움찔거리며 힘이 들어갔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사결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혀가 얽히는 것도, 입술을 잘근 깨무는 것도 일방적이었지만 사결은 개의치 않았다.
무려 여원과의 키스가 아닌가.
한참 만에 떨어진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뇌를 거치지 않은 마음의 소리였다. 여원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렇게 좋은가?”
달아오른 마음에 얼음물이 부어졌다. 저 말이 무슨 뜻이지? 그럼 자기는 좋지 않았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는데?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 생각은 손바닥 뒤집듯 뒤집혔다.
“좋으면 더 해도 된다.”
살짝 붉어진 귓불이 보였다.
사결은 나른하게 웃으며 다시금 입을 맞췄다. 사람들이 이 맛에 썸을 타고 연애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 * *
사결 납치는 1회성 이벤트였다.
사실 첫 번째도 여원이 아니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일이다. 결국 이현수는 길드장이 해야 할 일을 전부 집으로 옮겨왔다. 그러면서도 표정엔 우환이 가득했다.
‘과연 일을 둔다고 이걸 할 것인가.’
붙어 있으면 일은 안 하고 헛짓거리만 할 거라 생각했는데 기우였다.
여원이 워낙 일에 집중하니 사결은 뭘 해볼 틈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걸 하는 것도 아니고 수해에 관한 작업이다. 그런 걸 감히 방해할 순 없어서 사결도 이를 갈 뿐 본격적으로 건드리진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그도 여원을 호시탐탐 지켜보며 성실하게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현수가 생긋 웃었다.
‘진작에 이렇게 할걸.’
“아, 그러고 보니.”
자료를 정리하던 여원이 말문을 열었다. 서류를 철천지원수처럼 들입다 파던 사결이 종이를 옆으로 내던지며 왜? 하고 답했다.
“아니, 별 건 아닌데.”
“그 별거 아닌 게 뭔지 엄청나게 듣고 싶군.”
살짝 부담을 느꼈는지 원래도 올곧던 여원의 자세가 좀 더 진중해졌다. 그가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놨다.
“깜박하고 말하지 않은 게 있다.”
“뭔데.”
“마계에 떨어진 후에 어쩌다 보니 성주가 됐다.”
“으음?”
사결과 이현수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마계의 성주가 어쩌다 될 수 있는 거였나? 저번에 군단장이었단 건 들었는데 자세한 건 저도 몰라서….
둘 사이에 무언의 신호가 오가는 동안 여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성주 다음엔 마왕을 만나 군단장이 됐다.”
“그래, 그랬…. 뭐, 뭐?!”
사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왕을 만났다고?”
“그렇게 됐다.”
“아니 그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상식이 많이 부족하고 인간관계나 감정 문제에도 서툴다. 마왕의 옆에 있으면서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었거든.”
사결은 그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었는지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여원은 안 좋은 일이라고 했지만, 그보단 ‘끔찍한 일’이나 ‘구역질 나는 일’ 쪽에 더 가깝다는 걸.
“그걸 왜 이제 말해.”
사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분노했으나 그 대상이 여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서린 분노만 보고 오해한 여원이 더욱 어두워진 낯으로 말했다.
“혹시 네가… 실망할까 봐.”
지금은 내가 좋다고 하는데 앞으로 나를 겪다 실망할까 봐. 거기까지 들은 사결의 심장이 펄쩍 뛰었다.
“어….”
쟁쟁한 길드장들도 손끝으로 갖고 놀던 사결이었지만, 지금은 멍청한 소리를 내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이현수는 ‘내가 이 더러운 커플 사이에 끼여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같은 표정으로 먼 산만 봤다.
“아무튼, 그렇다고.”
슬금슬금 다가간 사결이 여원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이었다.
여원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짧은 키스가 끝나고 사결이 어색하게 몸을 틀었다.
“일하자. 현수야.”
“하여간 지랄들…. 마, 말이 헛나왔습니다. 아, 진짜 헛나왔다고요! 이 인간이 미쳤나?! 댁 주먹에 맞으면 나 입원, 악! 아악!”
이현수가 몇 대 얻어맞은 후.
한동안 부스럭거리며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만 이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 말이요!”
사결과 이현수가 동시에 퉁겨져 올랐다. 여원이 눈을 끔벅였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럽냐고 젠장!”
“어떻게 마왕을 만난… 어, 그거였습니까?”
“너야말로 그거였냐.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
여원은 이 두 사람이 대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피투성이의 길드원이 뛰어 들어왔다.
“길드장! 지금 수해에…!”
“아 또 뭔데?!”
사결은 으르렁거리면서도 뛰어 나갔다. 여원도 같이 가려고 했으나 내용을 전해 들은 사결이 위험한 건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결국 이현수와 나란히 남겨졌다. 사람을 불러 핏자국을 지우게 시킨 이현수가 두통이 인다는 듯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안 가도 되나.”
“대충 보고는 받았습니다. 압도적인 무력이 필요한 일이라 저는 없어도 됩니다. 중요한 서류는 다 처리했고 이제 자질구레한 것만 남았는데 나머진 카페라도 가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가 퀭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대로는 몸뚱이가 산 채로 썩을 것 같은데요. 방부제 대신 바깥공기와 카페인이라도 넣어주지 않으면….”
“…….”
여원은 동의했다. 바람을 쐬러 가는 의미도 있는 만큼 운전수도 없이 둘이서만 움직이기로 했다. 이현수가 자연스럽게 운적석에 타려는데 여원이 슬쩍 말했다.
“그럼… 내가 운전해도 되나?”
“? 그러시죠.”
이현수는 별생각 없이 자리를 비켜줬다. 사람이 맨날 편하게 타고 다니면 가끔 직접 운전대 잡고 싶은 날도 있는 거지.
그리고 여원은 차를 이프리트 앞에 세우고 이현수가 말릴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이는 카페 문의 종소리가 인생 종 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현수는 하얀 재가 되었다.
…사장님 돌아오시면 난 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