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마계에 있을 때 네가 모시던 성주님이었다고?”
“예.”
“마물 아니고 마족들이 모여 살던 성? 그 성의 주인이었다고?”
“예.”
“무슨 말도 안 되는….”
“지, 진짭니다. 아니면 적어도 쌍둥이예요! 착각한 거 아닙니다. 얼굴이나 분위기가 똑같습니다!”
“하긴 귀환자니까 아주 말이 안 되진 않는데, F급이 어떻게 성주가 됐지?”
김정수가 침묵했다. 그러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수영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가정했을 때, 가장 가능성이 큰 건 등급 조작이다.
고등급이지만 이목을 속이기 위해 등급을 낮추는 것. 청왕 같은 무법지대에선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어, 그것도 이상한데.’
일단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여긴 청왕이 아니라 그리샤다. 협회까지 끌어들여 조작하는 건 아무리 크레딧이라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파면 팔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다.
‘뭐 길드장이 알아서 하겠지.’
고민도 결정도 전부 배길수의 몫이었다. 자신은 이런 귀찮고 복잡한 일 같은 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심드렁해진 김정수가 뇌리에 떠오른 것들을 지웠다.
“서, 서, 성주.”
“…예?”
“성주를 손에 넣는다.”
“…예?”
너무 많이 지웠나.
무의식적으로 흘려들었다고 착각할 만큼 많은 것을 건너뛴 결론이었다. 그 순간, 배길수의 한쪽 눈이 빙글 돌았다. 김정수 눈이 크게 뜨였다.
‘뭐여 지금?!’
하지만 다시 본 그의 눈은 멀쩡했고 평소와 같았다.
‘잘못 본 건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유심히 들여다봤지만 역시 그대로다.
심란하니 헛것이 다 보인다며 한숨을 삼켰다. 배길수의 뒤통수 언저리에서 무언가 꿈틀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정수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 * *
여원은 화제의 중심이 됐다.
그에 관한 이야기로 연일 도시가 들썩였다. 소식이 전해진 다른 대도시도 마찬가지다. 이 근방의 모든 관심이 그에게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란의 중심은 블랙미스트를 해결하자마자 칩거에 들어갔다. 시민의 등쌀에 못 이긴 헌터 협회가 은근히 찔러봐도 요지부동이었다.
모든 면회는 거절. 앞으로 블랙미스트 정리 및 수해 공략에 전념하겠다는 틀에 박힌 공식 입장만 내놓았다. 사결은 입이 귀에 걸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잠잠해지려면 하루 이틀로는 부족했다. 사결은 과장을 살짝 보태 그를 둘러싼 관심들을 읊어줬다. 이런 상황 자체가 낯선 여원은 바짝 굳어서 자발적 감금에 동의했다.
사실 들끓는 관심은 여원과 크레딧의 침묵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나와서 손만 한 번 흔들어줬어도 덜했을 텐데. 이만한 일을 벌여놓고 여전히 신비주의로 나가자 해소할 길 없는 관심은 쌓이기만 했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사결은 뻔뻔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은 게 있을 뿐.
길드 건물 앞에 개미 떼처럼 모인 군중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여원을 향해 사결이 입맛을 다셨다.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 이제 이 순진한 근육햄스터를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내 잡아먹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사결.”
“음?”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다.”
S급의 예민한 감이 외쳤다. 이건 안 된다고 해야 한다.
“안….”
“수해 공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아 그러시다면.”
이현수가 눈치를 보며 슬쩍 끼어들었다.
사결이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지만 이현수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모른 척했다. 블랙미스트의 등장 전만 해도 귀환자의 진짜 가치는 정보에 있었다. 그런 귀환자가 블랙미스트 처리 후 확인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는데, 그게 심지어 수해 공략에 도움이 될 정보다?
이건 안 받는 게 멍청이다.
“나중에 해 나중에. 이제 겨우 피 닦았는데 뭘 그렇게 급하게 해.”
저 멍청이를 미리 내다 버렸어야 했는데.
“세상에 급한 건 없다. 맞는 때가 있을 뿐.”
“…….”
담담한 정론에 침몰당한 사결이 입을 다물었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시원함을 느끼며 이현수가 여원이 원하는 정보를 퍼 나르기 시작했다.
사결은 일단 지켜봤다. 그래봤자 얼마나 걸리겠나.
…이 세상 물정 모르는 귀환자가 어떤 성격인지 잠깐 잊었던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다.
시작은 간단한 자료정리였다. 여태 그리샤 내부와 수해에서 출몰한 마물들의 자료를 보고 사실과 다른 부분이나 보충할 정보를 첨언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일단 판이 깔리자 여원은 어느새 일에 몰두했다. 밥 먹고 자는 시간 빼면 서류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제 손으로 할 일을 늘렸다.
“잘못된 정보들이 보이는데, 수정해도 되는 건가?”
“물론입니다! 아무렴 헌터의 보고로 취합된 정보가 귀환자보다 정확하겠습니까?”
닥쳐 이 새끼야!
사결은 차마 여원의 앞에서 욕할 수 없어 눈을 부릅떴다. 이현수가 슬그머니 여원의 뒤쪽으로 움직이며 그 시선을 모른 척했다. 호랑이를 앞세운 여우가 따로 없었다.
“확인이 끝났다.”
사결의 인내심이 가늘어지다 못해 끊어지기 직전에 이르렀을 때, 여원이 수정된 보고서를 쿵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아. 하는 김에 수정한 자료들.”
“…감사합니다.”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 못 한 이현수가 꾸벅 고개를 숙인 채 감사를 표했다. 사결이 싱긋 웃으며 그런 이현수의 발을 몹시 아프게 밟았다.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여원이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넘어오는 마물의 종류를 봤을 때, 게이트의 위치 포인트는 마계와 일치한다.”
듣자마자 대충 이해한 사결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 이현수는 눈만 끔벅였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여원은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잠깐 고심했다.
“우드미르.”
“우드미르?”
“내가 블랙미스트에서 잡은 녀석들. 마계 서남부에 주 서식지가 있다.”
여원이 지도를 띄웠다. 그의 손가락이 수해 인근, 정확히는 블랙미스트 주변에 열린 게이트를 에둘러 가리켰다.
“이 일대에 열린 게이트에서 나온 마물들 전부 서남부에 사는 마물들이다.”
심지어 열린 게이트의 위치를 마계에 대입해도 지역이 그대로 일치했다. 이현수가 경악해서 눈을 부릅떴다.
그게 뭘 의미하는가.
“설마.”
“그 설마가 맞겠지.”
사결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 역시 눈만큼은 서늘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차원이 다를 뿐. 마계와 중간계가 정확하게 겹쳐있다는 뜻이다.
“세상에 맙소사.”
이현수는 넋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가.
“세상에 맙소사!”
환호성에 가깝게 다시 소리쳤다.
“그렇다는 건!”
“마계의 지도를 제작하는 게 가능해진다는 뜻이지. 여원만 있다면.”
이현수가 생각했다.
‘아직 게이트가 열리지 않은 곳이나 도시 밖의 미개척지에 대해서도 예상되는 마물의 출몰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된다!’
사결도 생각했다.
‘이제 일은 그만!’
마지막으로 여원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확실하다면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하나는 과거 여원이 그리샤로 납치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체감상 하루쯤 기절했다가 깨어났기에 당연히 백담 어디쯤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정신을 잃은 건 최소 나흘. 경로는 비공정. 그때의 삼초승달의 위세는 지금의 크레딧보다 대단했다. 헌터 협회나 도시 정부의 눈을 피하는 것쯤은 아주 쉬웠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뒤늦게 놓치고 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빛 한 점 들지 않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지하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그만한 시설을 백담에 세운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공동이 있던 자리가 내 영지와 인접한 숲이었던 거야.’
같은 맥락으로 백담에는 마왕성이 있다.
게이트를 넘어 돌아온 여원이 눈을 뜬 곳은 어느 좁고 어두운 골목. 그 자리가 바로 마왕성이 있는 자리였다.
숨이 막혔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상흔의 존재가 갑자기 두드러졌다.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오히려 더 생각하게 된다고. 벗어나려 할수록 오히려 크라투스에게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여원.”
서늘하고 따뜻한 것이 뺨에 닿았다. 세상에 그런 게 있을 수 있나? 저도 모르게 감았던 눈을 뜨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예상했다.
그래. 당연히 이 사내겠지.
“괜찮나?”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물어서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비공정에서 그가 아프냐고 물었을 때다. 여원의 낯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겉으로 보기엔 미미한 반응이었지만 사결은 그의 안에서 이는 격랑을 봤다.
“현수야.”
“그럼….”
눈치 빠른 이현수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여원이 정리한 자료는 잊지 않았다. 산 같은 마물을 짜부라뜨릴 때나 쓰던 능력으로 종이를 소중히 누른 그가 바람처럼 떠났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다정한 목소리가 여원을 도닥였다.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도, 정말 일을 많이 해서 지친 것처럼 느껴졌다.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본 적 있어?”
여원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첫 만남부터 하지 않았나?”
“숨기는 게 있었을 뿐. 거짓말은 안 했다.”
당당하게 대답한 사결이 슬금슬금 여원을 휘감았다. 불순한 의도를 품은 손이 옷 밑으로 쑥 들어왔다. 당황해서 물러나려던 몸짓은 어느새 허리에 감긴 팔에 의해 저지됐다.
빙긋 웃은 사결이 하나뿐인 유두를 꾹 누르고 가슴을 주물렀다. 여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짓은.”
“전에도 말했지만 ‘친밀함’의 기준은 주관적이지. 우리가 이러는 게 처음도 아니잖나.”
여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새 주도권을 빼앗긴 그에게 사결이 입술을 들이댔다. 머뭇거리며 입술이 벌어졌다. 순순히 이끌려가며 여원은 일이 이렇게 되는 진짜 문제가 뭔지 알게 됐다.
사결의 이런 행동이 싫지 않다는 거다.
그의 성격상 싫었다면 칼 같이 잘라내고도 남았다. 사결은 새삼 여원의 대답을 상기했다. 이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냐는 질문에 그는 모른다고 답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새끼가 감히 날 상대로 밀당을 하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여원이다.
모른다는 건 정말 모른다는 뜻이다. 연애는 고사하고 두근거림과 비슷한 것조차 경험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는 건….’
답은 이미 다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사결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이 사내에 한해선 침착함을 잃었다. 냉정함이 자랑이던 이성도 흐려졌다. 여태 해 온 모든 것들이 그 증거가 됐다. 이 당연한 걸 지금에서야 알아차렸다는 것 또한 증거 중 하나다.
“여원.”
이름을 불린 사내가 느리게 눈을 떴다.
한참 만에 떨어진 사결이 긴장으로 굳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귀에 들릴 때마다 여원은 심장이 울렸다.
“여원.”
대답해야 하는데 혀도 같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좋아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