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의외였다. 망설임이 묻어나는 어조와 살짝 주눅 든 목소리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여원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
사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원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당황으로 굳은 표정에서 사결은 희망을 얻었다.
“너에 대한 내 생각은 줄곧 말해왔어.”
사실이다. 백담에서, 또 비공정에서 그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자신의 마음을 계속 말로 전해왔다.
“그런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모르겠어.”
천천히 다가선 사결이 여원의 손을 잡았다. 열기가 남은 손가락을 체온 낮은 손가락이 얽어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나씩 손등을 파고들 때마다 여원이 흠칫거렸다.
“네 이런 태도도 대답의 일종이라고 본다면 내가 너무 나 좋을 대로 생각하는 건가?”
“…….”
“아니라면 대답해 봐. 왜 내 제안을 받아들였지?”
내기와 소원에 대한 건 완전히 잊어버린 사결이 몸을 바짝 붙였다. 기울어진 고개가 땀에 젖은 여원의 목덜미를 꽉 물었다.
“이런 짓을 해도 밀어내지 않는다는 건. 네게도 그럴 마음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
바로 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여태 보지 못한 초조함이 보였다. 여원이 알아차리는 게 늦었을 뿐 사결은 이미 한계였다.
“수해의 심부로 향한다는 목적에 내 지분은 없나? 정말로 이명환의 시체를 보는 것 그거 하나 때문에 내 손을 잡았나?”
그가 쫓기는 사람처럼 말했다. 여원은 그런 사결을 묵묵히 응시했다. 말은 없었지만 두 사람은 대화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게 어느 병실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였다. 둘은 같은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사결은 여원을 까발리고 싶어 했다.
소극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여원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그리고 정작 그렇게 흔든 본인이 그보다 더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그때, 여원은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예감은 곧 현실이 됐다. 사결이 이명환의 아들이라 믿었던 때도 그는 사결을 죽일 수 없었다. 고작 떠나는 게 최선이라 그렇게 했다.
그리고 지금이다.
크라투스에 대한 불안으로 항상 긴장하고 있던 마음의 방벽이 허물어졌다. 중간계 적응도 끝나간다. 그동안 아무 일이 없자 앞으로도 아무 일 없을 거라 믿게 됐다.
‘넌 나 말고는 말하면 안 돼.’
‘왜. 내 말이 농담 같아?’
서늘한 용마족의 말을 떠올리면 아직도 몸이 가늘게 떨리지만, 숨이 막힐 것처럼 두렵진 않다.
그런 변화를 발판삼아 여원은 조금만 솔직해지기로 했다.
“네 말이 맞다.”
순순한 인정에 사결의 낯빛이 죽었다. 입술을 깨문 그가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했다. 상관없다. 마음이 없다면 앞으로 생기도록 만들겠다. 사결이 그렇게 말하기 전, 여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내가 싫은 일은 하지 않아.”
그가 사결의 멱살을 쥐었다. 세게 당겨 입을 맞추자 사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서툰 키스였다. 이가 부딪히며 입술이 살짝 찢어졌다.
피를 본 것에 놀란 여원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사결은 그걸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여원의 뒤통수를 잡아 눌렀다.
피?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입맞춤이어도 전두엽이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무려 여원이 처음으로 주도한 키스였다. 그걸 가볍게 끝내는 건 사결의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내는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어떻게든 따라가려던 여원은 호흡이 모자라 고개를 돌렸다. 절로 쿨럭, 기침이 났다. 팔꿈치를 세운 그가 팔로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냈다. 마음먹고 힘을 주자 커다란 몸이 손쉽게 밀려났다.
여원이 태연한 척 말했다.
“네가 지금껏 내게 했던 모든 것들은 전부 내 허락이 있어 가능했던 거였다.”
“그럼 다시 허락해줘.”
사결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말했다. 뻔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대목에서? 당황한 여원이 눈만 끔벅거리는 새 틈을 노린 사결이 다시 입을 맞춰 왔다.
“잠깐. 그만.”
“조금만. 조금만 할게. 응?”
사결이 응석을 부리듯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아까와 다른 자리를 물고 빨았다. 여원은 바로 밀어내지 못했다. 산만 한 덩치로 하는 짓이 귀엽다고 생각해버린 탓이다.
게다가 내내 생각하고 있어서인지 새삼 첫 만남과 지금 모습이 비교됐다.
“지금 하고 싶어.”
“…….”
“안 돼?”
“안 된다.”
냉정하게 잘라내자 시무룩해졌다.
길게 다리를 꼰 채 나른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풍기던 사내는 어딜 가고 철없는 대형견 한 마리만 남았다.
“진짜 안 돼?”
이 정도면 그냥 얼굴만 같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이번엔 대답도 하지 않은 여원이 사결을 마저 밀어내며 품을 벗어났다. 밀어내고서야 알았다. 어느새 허리에도 손이 감겨 있었다. …대체 어느 틈에.
“이만 가지. 씻고 싶다.”
“그럼 같이 씻을까?”
시선만으로 사결을 멈춰 세운 여원이 홀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물을 맞으며 여원은 가슴의 상흔을 손끝으로 쓸었다.
잊지 않았다. 하지만 예전처럼 덮어놓고 두려움이 피어오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제 슬슬 잊어도 되지 않을까. 이대로 사결의 손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쏴아아.
상흔을 보던 걸 멈춘 여원이 머리부터 거칠게 씻기 시작했다.
마계에서 목소리를 빼앗겨 돌아와서도 말없이 지냈던 날. 그날조차 이제 과거가 됐다.
크라투스는 여전히 마계에 처박혀 있다. 자신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니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거리는 앞으로도 점점 벌어질 터. 아니어도 반드시 그렇게 되게 할 셈이었다.
씻고 나오자 사결이 말 잘 듣는 개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탈의실에서.
“…….”
같은 성별이니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 아는 이상 이야기가 다르다.
여원은 말없이 사결을 봤다.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너무한다. 그건 무슨 눈빛이냐. 내게도 탈의실에 있을 권리가 있다. 사결은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버텼다. 누가 보면 불법 점거자인 줄 알겠다.
한숨을 쉰 여원은 상대도 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에 두른 수건을 치웠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건 사결이었다. 누울 자리도 못 보고 발부터 뻗었던 사내는 여원이 물기를 닦고 옷을 다 입을 때까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나올 때도 구부정했다. 한심하다는 듯 그를 보던 여원이 앞서 걸었다.
그리고 며칠 뒤, 사결이 그럭저럭 쓸 만할 것이라며 도끼를 하나 구해왔다. 오다 주웠다는 투로 말했으나 도끼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몇 번 휘둘러 본 여원이 묘한 표정으로 도끼를 살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자세히 들여다보자 익숙한 마수의 흔적이 보였다. 머리부터 자루까지 전부 상급 마수의 부산물로 만든 상등품이었다.
“…고맙다.”
담담하게 인사하자 사결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러나 여원이 새로 얻은 무기에서 눈도 손도 떼지 못하자 그것도 금방 양가감정으로 바뀌었다.
내가 준 걸 저렇게 애지중지해 주는 건 좋은데, 나보다 더 관심을 쏟는 건 싫다고 할까.
“드론 훈련할 시간이야. 이만 가지.”
사결의 말에 여원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도끼는 손에 쥔 채다.
“그건 놓고 가. 헌터는 도시 내에선 무기 잘 안 가지고 다녀.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으니까.”
거짓말이다.
바로 옆에서 거대한 도를 등에 짊어지고 다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순진한 여원은 그렇구나, 하고 얌전히 도끼를 내려놨다.
훈련은 대부분 길드 건물 내부에 있는 사결의 전용 훈련장을 썼지만 한 가지, 수해용 드론에 한해선 반드시 협회 내 지정된 훈련장을 사용해야 했다.
에너지 돔의 형태를 한 도시 프로텍션의 밖에서도 사용 가능한 장비인 만큼 악용될 소지가 높고, 실제로 아우터에 의한 강탈과 도난이 잦은 탓이다.
“그래서 훈련만이 아니라 반출과 이용도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지.”
여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럼 백담에서 네가 사용한 드론은 뭐였지?”
“불법.”
너무 당연하게 말해서 순간 그렇구나, 할 뻔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나란히 밖으로 나왔다. 여원이 F급이라고 밝혀진 이후 세간의 관심은 급속도로 식었다. 그래도 크레딧이 선택했으니 뭔가 있을 거라는 의견은 귀환자라는 것에 집중했을 거라는 것과 검증 전엔 그들도 몰랐을 것이라는 여론에 밀려 사라졌다.
“크레딧 길드의 서여원 님이시죠? 월간헌터의 김종의 기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원은 눈만 멀뚱멀뚱 떴고 사결은 바로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뭐야?”
S급 헌터가 노려보는데 멀쩡한 일반인이 있을 리가… 했는데 있다.
‘일반인이 아니군.’
하급 헌터인 모양이다. 기자는 달달 떨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브, 블랙미스트에 대한 입장변동은 없으십니까? 이번에도 크레딧에서 해결할 거라는 식의 말씀을 한 적이 있으신데-”
“꺼져.”
파창!
“으악!”
옆의 카메라맨이 들고 있던 카메라가 안에서부터 터졌다. 일반인들 눈에는 멀쩡히 있던 카메라가 저 혼자 부서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여원은 알았다. 미세한 수분을 얼려 마력을 방출한 거다.
“가자.”
혀를 찬 사결이 여원을 이끌었다. 잡힌 손이 차갑고 뜨거웠다. 마른 침이 넘어가며 다리가 후들댔다. 상흔 밑의 심장이 술렁거렸지만, 겉으론 아무것도 티가 나지 않았다.
여원은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에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