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하나만 물어도 되나.”
긴장을 숨기지 못한 사결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대체 뭘 용서하면 되는 거지?”
사결이 흠칫했다.
“이명환의 친아들도 아니고 일이 벌어지던 때 고작 일곱 살이던 널?”
“다시 말하지만 내 어머니는….”
“거기 네 의지는 있었나.”
굳어있던 동공이 크게 뜨였다. 약삭빠른 뱀은 정작 자기 일엔 맹한 구석이 있었다. 조금쯤 웃기고 꽤나 귀여웠다.
‘…귀엽다고?’
여원은 감상을 되짚어보며 고개를 기울였고 사결이 대답했다.
“없었지.”
허탈함이 섞인 말이었다. 그래. 없었어. 작게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 없이 휘둘린 일에는 책임질 필요 없다.”
“그래.”
“물론 그때 자료로 날 찾아낸 건 분명 의지를 갖고 한 일이긴 한데.”
“……!”
표정 변화가 아주 롤러코스터다.
“관계자는 다 죽었으니 정 마음이 쓰이면 네 잘못만 정산해라.”
“정산이라니….”
뭘 어떻게?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앞 좌석도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한동안 먼 곳에서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와 차창을 쓰다듬는 무수한 도심의 불빛만이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흘렀을까. 여원이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결.”
“왜.”
“내 손은 왜 만지작거리는 거지.”
“흠.”
흠, 말고 대답을 해라 대답을. 여원의 눈썹이 위로 솟았다. 사결은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왜 웃나.”
“그냥. 좋아서”
“…….”
조물거리는 손길이 어딘가 은근해지더니 고개를 숙인 사결이 손끝을 입에 물었다. 살짝 잘근거리며 올려다보는 눈길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 가슴께가 빠듯해지는 기분에 여원이 말했다.
“빨지 마라.”
“자, 잠깐!”
그러자 아닌 척 다 듣고 있던 이현수가 기함했다. 운전석도 아니고 조수석에서 백미러로 훔쳐보는 거였다. 고개를 푹 숙인 사결의 뒤통수와 ‘빨다’에서 뭔가 큰 오해를 한 모양이다.
“미쳤습니까?! 돌았습니까?! 아니 세상에 마상에 사람을 앞에 두고 뒤에서 무슨 짓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입 다물어.”
어느새 자기 페이스로 돌아온 사결이 혀를 찼다.
“어디서 음란마귀가 들어서 그걸 제 입으로 떠들고 있어.”
“그럼 저분이 거짓말을 했단 겁니까?!”
상반신을 홱 돌린 그가 벌게진 얼굴로 여원을 가리켰다. 이글거리는 기세에 지목당한 여원이 난감해하며 증언했다.
“순간 당황해서 빨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거봐.”
이현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여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빤 게 아니고 잘근잘근 깨물었….”
“으아아악!”
믿었던 도끼에 머리를 찍힌 이현수가 펄쩍 뛰었다. 방아깨비처럼 늘씬한 몸이 퍼덕이자 정수리가 차 천장에 닿았다. 고통에 허우적거린 팔이 운전기사의 어깨를 쳤다. 차체가 순간 휘청거렸다. 자연스러운 연쇄작용이었다.
다행히 차는 빠르게 중심을 잡았다. 사결이 혀를 쯧쯧 찼다.
“잘한다 잘해. 사고라도 났어 봐. 그 뒷수습은 어떻게 할 건데.”
“당신 때문이잖아!”
와락 소리치고도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이현수가 씨근덕거렸다.
“막말로 진짜 사고 나면 내가 수습하지 네가 수습하냐?!”
“네가?”
“…….”
“네가라고 했냐 지금?”
월급쟁이는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차가 목적지에 당도했다. 거대한 쇼핑몰이었다. 온몸으로 빛을 뿜어내는 건물은 낮보다 밤에 더 화려했다. 차는 지하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더니 직원들이 대기하고 선 VIP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이현수가 반쯤 뛰듯이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프로답게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 물러섰다. 이현수를 향해 눈을 흘긴 사결이 미동도 하지 않는 여원을 향해 돌아섰다.
“내려야지.”
“…….”
여전히 머뭇거리는 그를 본 사결은 장난기가 동했다. 그가 손을 내밀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에스코트 자세였다. 문을 연 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현수가 지랄한다는 표정으로 질색했다.
여원은 잠깐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았다. 이현수가 놀랐고 사결은 그 몇 배로 더 놀랐다. 습관처럼 짓고 있던 웃음이 사라지고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당연히 뿌리칠 거라고 생각했다는 표정이다. 반응을 확인한 여원이 주춤하며 손을 살짝 뗐다. 순진한 귀환자가 곤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게… 아닌가?”
전보다 말도 많아지고 대화가 자연스러워서 잠깐 잊고 있었다. 이 사내는 상상 이상으로 일반상식이 부족하다는 걸. 케이크를 생일에만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아주 깜찍한 사내.
새삼 그 사실을 상기한 사결은 나쁜 쪽으로 무언가 깨달았다. 오랜만에 표면으로 나온 뱀이 나른하게 웃었다.
“아니. 맞아.”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겠지.
이현수의 표정에 측은함이 깃들었다. 뱀 아가리에 물려 가는 근육햄스터를 보는 눈이다. 시선이 마주쳤다. 햄스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끔벅였다. 독이 잔뜩 오른 뱀만 쉭쉭 거리며 웃었다.
그는 사결에게 이끌려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에서부터 느껴졌던 고급스러움은 문을 열었을 때 정점을 찍었다.
‘아.’
넓은 홀과 화려한 3단 샹들리에를 보자 그제야 딱 한 번 이 비슷한 곳에 와본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진실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아 잠깐 나돌았던 며칠. 사결이 오기 전 후처리과 과장이었던 사람과 어울릴 때 갔던 곳들이 다 이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지?”
감이 접신의 경지에 접어든 사결이 물었다. 그에 곁에 있던 이현수가 입술을 짓씹었다. 뭔지 몰라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원은 초장부터 폭탄을 던졌다.
“날 이런 곳에 데려갔던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뭐?!”
사결이 어떤 개새끼냐고 묻기 직전, 여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2년이나 지나서 그런지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그는 재빨리 화를 갈무리했다.
“그럼 네게 있어 그저 그런 놈이었단 뜻이겠지.”
“그런가.”
여원은 이번에도 그런가 보다 했다. 뭘 말해도 쉽게 믿어주니 외려 기분이 이상해졌다.
“뭔가 아까부터 반응이 순순한데.”
“네 말이 맞는 것 같아서다.”
여원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덧붙였다.
“네 이름은 처음 불렀던 순간이 아직도 정확히 기억나거든.”
잘 가던 사결의 걸음이 멎었다. 상황만이 아니라 감정까지도 선명하다. 여원은 책의 바로 이전 페이지로 돌아가듯 그때를 떠올렸다.
“나 때문에 분노해서 찾아온 네가 조금 기꺼웠던 것 같다.”
사결은 분리불안 있는 강아지처럼 혼자 안절부절못했다. 바닥의 대리석을 한 번, 천장의 샹들리에를 한 번 보더니 그가 낮게 신음했다.
“너는 진짜….”
분노가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으로 한참 씨근덕거리던 사결은 다시 여원의 손을 이끌고 내부로 향했다.
“…가자.”
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쇼핑 자체는 의외로 무난했다. 백화점은 직원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모든 파트에서 정상 영업을 했지만 돌아다니는 건 사결과 여원 그리고 탄력적으로 직업이 바뀌는 이현수 뿐이었다. 지금 그의 역할은 짐꾼이다.
“방금 코트 괜찮은데. 그래 그거. 그것도 계산하지.”
“저건 지금 네가 입은 코트와 비슷하지 않나?”
“전혀. 완전 달라.”
직원이 지금 들고 있는 코트와 사결의 코트를 번갈아 봤다. 말은 비슷하다고 했지만 이렇게 보니 그냥 같은 코트다. 그래도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왜 자꾸 옷을 내게 대 보는 거냐.”
“네가 입을 거니까.”
“내가 왜…. 잠깐, 설마 저 코트도 내 건가?”
사결은 대답하지 않고 이동했다. 계산은 뒤에 남은 이현수가 했다.
“이것도 입어볼래?”
“싫다.”
거절당해도 별 타격 없는지 여전히 싱글싱글한 낯이다.
“침대는 어떤 걸로 하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게 킹사이즈인데 그냥 같이 쓸까?”
“난 바닥에서 자면 된…. 잠깐, 왜 자연스럽게 내가 네 집에서 자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거지?”
넘어갈 뻔한 명예 마계인이 가자미눈을 했다. 숨 쉬듯 기만을 갈고 닦아온 사결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이만하면 거의 다 산 것 같군.”
“설마 전부 내 건가?”
“당연하지.”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다.”
여원이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지금 살고 있는 카페 뒤 보금자리를 떠올렸다. 거기에 이 많은 물건이 다 들어갈 것 같진 않았다.
“지금 집이 좁아서 그래?”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넓은 곳으로 옮기면 돼.”
기적의 논리였고,
“우리 집은 어때.”
알고 보니 답은 정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여원이 한숨을 쉬었다. 거절의 말을 꺼내기 전 사결이 얼른 말했다.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거처는 옮길 필요가 있어.”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비논리에도 정도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여원의 눈에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사결의 모습이 들어왔다. 기억 속의 사내는 이렇지 않았다.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 그는 독을 품은 뱀처럼 나른하고 여유로웠다. 가진 게 많은 자 특유의 오만함도 있었다.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뭐든 원하는 건 손에 넣겠다는 음험함이 보였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계약서 상 자신은 어차피 사결의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사실을 그가 잊어버렸을 리 없는데 저런 말을 하는 건, 어쩌면 내 거부감을 줄여보려는 그 나름의 노력일지 모른다.
“정 그럼 구역을 나눠 줄게. 봐서 알겠지만, 복층이고 굉장히 넓어. 최대한 생활권 겹치지 않게 지내면-”
노력이라고 확신했다.
“…….”
이 사내가 이렇게 절절매는 건 아마 자신 한정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통제할 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지.”
여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건 사결이었다. 그가 멍청하게 눈만 끔뻑이다 바짝 붙어 섰다.
“진짜 내 집에 들어오겠다고?”
“농담이었나.”
“아니. 그럴 리가!”
답지 않게 허둥거리는 사내를 보며 여원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결의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때까지 커졌다. 여원이 이렇게 웃는 걸 여태 본 적이 있던가. 잠깐 멍하게 있다 깨어나자 찰나의 눈속임이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아까워 침음이 절로 나왔다. 뭐 마려운 개처럼 끙끙거리는 사결의 어깨를 여원이 툭, 두드렸다.
“그래.”
무심하게 앞서 걸어가는 여원의 등을 보며 사결은 슬슬 깨달았다. 아니, 카페에서 잘 지냈냐는 말 한마디에 짐승처럼 달려들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불가항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