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마계에 있을 땐 그런 세세한 건 신경도 쓰지 않고 평등하게 머리를 깨고 다녀서 잘 몰랐는데, 그들 입장에선 이보다 완벽한 적임자는 있을 수 없었다.
사결이 때를 놓치지 않고 사탕을 흔들었다.
“내 손을 잡아. 그럼 내가 널 이명환의 시체 앞까지 데려가 주지.”
아버지가 아니라 남을 지칭하는 말투였다. 그 단어 선택에 흔들렸다면 미친 걸까.
“…….”
아니면 그냥 핑계를 찾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저 제안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핑계를.
잠깐 생각한 여원이 물었다.
“왜지?”
너는 왜 그렇게 수해의 심부에 가려고 하는 거냐.
사결의 입매가 씰룩였다. 그는 저 말이 자신에 관한 관심처럼 느껴졌다. 궁금해진 거면 그게 관심이지. 슬쩍 기분이 좋아진 사결을 향해 여원이 재차 물었다.
“말 못 할 이유인가.”
“그런 건 아니야. 여태 물어본 사람이 없어서 몰랐는데. 흠, 내 입으로 말하기에 좀 부끄러운 이유랄까.”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였지만 여원은 속지 않았다. 사결의 눈은 진지했다.
“수해의 심부에 가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약속이 있어. 그런데 난 그 약속을 죽어도 지키고 싶거든.”
“그게 단가?”
사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사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계약도 아닌 고작 약속 때문이라고?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사결은 여전히 진지했고 여원은 마침내 결심을 세웠다.
“동준을 건드리지 말 것. 그걸 조건에 넣어.”
“빌어먹을 새끼가 2년간 존나 잘해주긴 했나 보네.”
이현수가 사결에게 눈을 흘기며 여원의 눈치를 봤다. 여원은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잘 해줬지.”
사결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라면 건드리지 마라.”
“…….”
이현수는 다급해졌다. 그가 사결을 향해 필사의 눈짓을 보냈다.
‘제발 가만히 계십쇼.’
‘말 안 해도 알아!’
‘안 표정이 아니잖습니까.’
‘닥쳐!’
영양가 없는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그사이 품에서 만년필을 꺼낸 이현수가 계약서에 특약조항을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또 뭐가 더 있어?!”
사결이 살짝 신경질을 냈다. 여원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담담히 말했다. 사뭇 진지한 어조였다.
“쌍방의 계약 조건이 완료되면.”
두 사람 모두 목적을 이루면.
“두 번 다시 내 삶에 관여하지 마. 이게 마지막 조건이다.”
사결은 기가 찼다. 이쯤 되자 분노보단 오기가 생겼다. 그의 입가로 예의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샤에서 가장 음험한 뱀이 생각했다.
계약이 끝날 때쯤 네 입으로 마지막 조항을 물러 달라 애원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그러지.”
다 엎을 줄 알았던 그가 흔쾌히 받아들이자 가장 놀란 건 이현수였다. 그가 상사의 눈치를 봤다. 똬리를 틀고 앉은 사결이 험악한 표정으로 눈짓했다. 빨리 안 적고 뭐 하냐는 시선이다.
상사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이현수는 재빨리 마지막 항목을 추가했다.
“사인해.”
특약을 확인한 여원은 망설임도 없이 이름을 적어 넣었다. 계약이 끝나자 종이에서 살짝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마력을 담아 만든 특수한 계약서였다.
계약서 절반을 받아든 여원은 그걸 품에 넣었고 사결은 서명란을 응시했다.
“이제 내 거야.”
…그런 계약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원은 당황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한동안 계약서에서 눈을 못 떼던 사결이 종이를 이현수에게 건넸다.
“자, 그럼 쇼핑부터 하러 가지.”
소파에서 일어난 그가 여원을 향해 턱짓했다.
“뭐해.”
“나도 가는 건가?”
“네 거 사러 가는 건데 당연하지.”
여원이 표정으로만 물었다. 내 걸 왜 당신이 사? 사결은 무시했다.
“아, 그렇지.”
대신 깜박했다는 듯 말했다.
“난 이명환의 아들이 아냐.”
시원하다 못해 상큼하기까지 한 어투였다. 놀란 여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기다려. 지금 그게 무슨 말-”
“엘리베이터 왔다.”
“잠깐, 제대로 설명-”
“어허. 문. 문 닫힌다.”
* * *
세단에 탄 후에도 채근은 계속됐다. 애타하는 모습이 신선해 대답을 끌었을 뿐 처음부터 말해줄 생각이었던 사결이 장난을 걸었다.
“손잡아주면 말해줄게.”
여원은 두 번 생각 않고 손을 잡았다.
“깍지도.”
손가락이 손가락 틈새를 파고들어 얽었다. 사결은 결국 웃고 말았다. 덩치 큰 남자만 셋이라 자연히 앞 좌석에 탄 이현수는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실수로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흠, 하는 소리를 낸 사결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내 어머니는 귀환자야.”
여원이 그대로 굳었다. 사결이 이명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픽 웃은 사내가 오랫동안 가려졌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명환에게는 마소 중독에 걸린 친아들이 있었다. 쓸모없으면 뭐가 됐든 가차 없이 버릴 것 같던 인간이 그래도 핏줄에 대한 애착은 있었던지, 그는 치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제 피를 물려받은 자식의 ‘결손’을 견디지 못했던 거지. 마소 중독이 약해서 걸리는 병이라고 믿었거든. 마기나 마력에 노출되어 견디면 헌터가 된다. 그게 사실로 밝혀진 무렵이었으니까.”
별다른 성과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마지막에 도달한 곳이 다름 아닌 귀환자였다.
사결이 맞잡은 손을 들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심각한 사연과 맞지 않는 다정한 행동이 되려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귀환자의 심장을 아들에게 이식하는 방법이었지. 귀환자의 심장은 그 자체로 거대한 마력 기관이라서 몇 가지 조건만 맞아도 간단히 이식할 수 있다더군.”
이명환에겐 불행이며 두 모자에겐 다행하게도 사결의 어머니는 그 몇 안 되는 조건에 어긋났다. 이명환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어머니가 안 되니까 바로 날 보더군.”
입양도 그때 한 거라고 사결이 덧붙였다. 가슴 어귀가 얼어붙었다.
“진짜 귀환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형질의 일부는 물려받았지. 마기에 대한 저항력도 높은 편이었고….”
“…….”
“연구진들은 회의적이었지만 이명환이 그걸 들을 리가. 정말 수가 없어지면 뭐라도 해 볼 인간이었으니까. 내 어머니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녀는 먼저 제안했어. 스노우 화이트 프로젝트를.”
목적은 하나. 이명환의 친아들에게 필요한 심장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 프로젝트 스노우 화이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심장을 가져다줄 사냥꾼은 없다. 그래서 이명환은 무수한 스노우 화이트들이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오도록 설계했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그리샤의 삼초승달을 찾아와라.”
뒤통수가 깨지는 충격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보통 그런 일을 꾸미는 자가 제 입으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나? 어쩌면 후환을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는데? 하지만 이명환은 그렇게 했다.
‘이것 때문이었어.’
계기는 뭐가 됐든 중요치 않았다. 의문? 상관없다. 복수? 그것도 좋다. 어쨌든 사냥꾼은 없으니까. 제 발로 찾아온 백설의 심장을 강탈하는 것까지가 이명환이 그린 그림이었다.
놈이 살아 있었다면 여기까진 그의 뜻대로 됐을 가능성이 크다. 여원이 피가 잘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쥐고 있던 손을 폈다.
“나는 이명환의 핏줄이 아니지만 네게 있어 완벽한 무죄라고 할 수도 없지. 어쨌든 내 어머니가 프로젝트에 협조하는 대가로 목숨을 연장했으니까.”
가려진 것들에 대한 말은 그렇게 끝났다. 사결은 덧붙이는 것도 없이 판단을 온전히 여원의 손에 넘겼다.
“네가 뭐라고 하든 난 받아들일 거야.”
밖은 이미 해가 저물었다. 저녁에서 밤이 되어가는 시간,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도심의 불빛이 사결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여원은 오랫동안 생각했다. 영원히 닫혀 있을 것 같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명환의 친아들은 어떻게 됐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잠깐 멈칫한 사결이 대답했다.
“재난 당시 저택에 있었어. 죽었겠지.”
“네 어머니도?”
“…아마.”
아마도 그랬을 거야. 나직하게 덧붙이는 말은 담담했다. 오히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수해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머니 때문인가?”
“맞아.”
사결은 순순히 인정했다.
“사명감. 영웅 심리.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 수해를 토벌하려 한다고 다들 생각하는데, 실은 죽어서까지 어머니를 그 빌어먹을 저택에 두고 싶지 않아서야.”
이어진 말은 갑작스러운 고해에 가까웠다.
“별거 아닌, 아주 사적인 이유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라.”
사결의 입이 다물렸다.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아차 했지만 말한 걸 물리진 않았다.
화가 났다. 별거 아니라고 하는 저 말이 그 자신을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가치는 남이 정하는 게 아니지 않나.”
“사람들을 속인 건?”
“수해의 마정석이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 그 사람들 말인가.”
크게 뜨인 얼음의 눈이 상냥한 공허에 닿았다.
더는 어떤 말도 없었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날카로운 파편과 한기가 사라진 회색빛 고요는 어딘가 포근하기까지 했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공허가 차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불빛이 일렁였지만, 그는 다른 걸 보고 있었다. 아주 먼 곳. 사결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어딘가를.
“거짓말이야.”
확 뻗어진 손이 여원의 팔을 쥐었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힘이다. 세게 잡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참는 악력이다. 그걸 느낀 여원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가 물었다.
“뭐가.”
“너한테 한 말들 말고. 네가 뭐라고 하든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한 거.”
사결이 쓰게 웃었다.
“아마 그렇게 못 할 거야.”
“그럼?”
“애원하겠지.”
잡힌 팔이 조였다. 길고 마디진 손가락이 잘못 자란 덩굴처럼 팔을 얽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달라고 하겠지. 네 불행에 내 지분이 적다는 걸 피력할 테고, 그걸 앞으로의 시간으로 보상하겠다는 무책임한 말도 하겠지.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어떤 걸로도 보상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사결은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앞이 절벽이라는 걸 알면서도 창에 등을 찔려 걸음을 내딛는 고대의 사형수같이. 아득한 절망과 공포가 눈자위에 어른거렸다.
여원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찌 보면 저의 희생으로 생존한 자인데도 그 사실이 마냥 애틋하고 한편으론 기꺼웠다. 그건 어딘가 저급한 구석이 있는 안도였다.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내면세계. 여원은 망망대해의 등대였다. 바다는 온통 검은색이고 눈먼 배는 없다. 황금빛 신호는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그렇게 거친 파도만 맞고 있길 하세월. 사결은 마침내 나타난 다른 등대였다. 그들의 불빛은 한 바퀴 돌 때마다 서로를 비췄다.
“당신만이 날 구원해 줄 수 있어.”
그때 체중을 실어 오던 사내를 밀어내지 못한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는 걸, 여원은 뒤늦게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