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면?”
“동준이 절 주워준 겁니다.”
이런 식의 대화가 너무 오랜만이라 이해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네가 그 새끼를 고른 게 아니라 그 새끼가 오갈 데 없이 불쌍한 널 주워준 착한 사람이다?
이해한 후엔 아득한 열기가 뇌리를 덮었다.
여원은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듣는 사결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내내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더니 첫마디가 놈에 대한 변호라고?
그가 가장 가까이 있던 찻잔에 손을 뻗었다. 검지가 옆면에 그려진 보라색 꽃 그림을 톡 두드렸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여원이 사결의 손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지가 손잡이에 걸렸다. 그대로 끌어 내려진 찻잔이 아래로 떨어졌다. 머그잔의 잔해 위에 깨진 찻잔이 더해졌다. 여원의 표정이 더 굳을 수 없을 만큼 경직됐다.
하지만 사결의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나씩 하나씩, 진열되어 있던 찻잔이 아래로 떨어졌다.
쨍강.
쨍그랑.
네 개째 찻잔을 바닥에 밀어 떨어뜨렸을 때, 여원의 손이 사결의 손목을 붙들었다. 사결은 픽 웃고는 다른 손으로 다섯 번째 찻잔을 떨어뜨렸다. 여원이 그 손을 마저 잡자 이번엔 허공에서 만들어진 얼음 조각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파창!
푸른 문양의 찻잔이 산산 조각났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이렇게 잡아도 소용없음을 깨달은 여원이 손을 놓고 대신 조각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힘줘서 잡았는지 손이 베여 피가 흘렀다. 내내 싱글거리던 사결의 미간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놔.”
여원은 머뭇거리면서도 기껏 잡은 조각을 놨다. 땡그랑, 제법 큰 조각이 카운터에 떨어졌다. 혀를 찬 사결이 품을 뒤졌다.
‘분명 이현수가 어디 넣어 놨을 텐데.’
찾던 건 안주머니에 있었다. 손수건을 꺼낸 그가 여원의 상처에 대고 꾹 눌렀다. 움찔한 몸이 물러날 것처럼 들썩이는 걸 시선으로 저지했다.
여원은 순순히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사내의 심기를 거슬러 좋을 게 없었다. 동준의 신원도 이미 그의 손에 있을 게 분명했다.
피는 금방 멎었다. 사결은 얌전해진 여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순순히 구는지 알아서 더 그랬다. 이대로 상처를 손톱으로 헤집고 싶은 가학적인 충동이 인다.
“이봐. 무슨 말이라도 해.”
“…….”
“왜 전보다 더 조용해졌지? 이런 날이 올 걸 몰랐다곤 하지 마.”
그 말대로다. 이날은 예정된 날이었다. 그리샤에 발붙이고 사는 한 언젠가 맞이할 수밖에 없는 날. 그걸 알면서도 도시를 떠날 수가 없었다.
왜일까.
저 심해에 잠들어 있을 이명환 때문에? 물론 그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냐고 자문하면 무언가 목에 걸린 듯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사결이 한숨처럼 말했다.
“답답하군.”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한 여원이 슬그머니 눈을 들자 조금 지친 사결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이 아니라 긴 시간 압축된 피로였다.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입 다물고 있을 셈이지?”
그 말에 여원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왜 지금 이런 말이 혀끝에 올라왔는지는 모른다. 답을 내리지 못한 많은 의문처럼.
그냥 생각나는 말이 이것뿐이었다.
“잘… 지냈습니까.”
사결의 뇌리에서 선 하나가 끊어졌다.
여원이 그리샤에서 미약한 인간성을 되찾아 갔다면 사결은 복수의 방법을 고민했다. 다시 만나면 어떻게 구속하고 어떤 식으로 지배할지 매일 생각했다.
그렇게 불태웠던 분노가 다 부질없었다.
‘하, 씨발.’
그가 여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단단한 몸이 딸려오며 카운터에 남아 있던 남은 찻잔들이 바닥을 굴렀다. 여원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의 입술이 사결의 입에 삼켜졌다.
…윽.
여원이 낮은 목소리로 신음했다. 바로 앞에서 들리는 울림에 사결의 아랫도리가 빠듯해졌다. 그는 욕설을 삼키며 경직된 사내의 입에 혀를 쑤셔 넣었다.
바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움켜쥔 여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꾸드득. 가장자리가 패며 손가락이 나무를 파고들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사결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숨이 한계에 달한 여원이 돌처럼 단단한 어깨를 밀어냈다. 심사가 뒤틀린 사내가 으르렁거렸다.
“가게를 나간 박동준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 말을 들은 여원이 굳어졌다.
“그런 표정 할 것 없어. 아무 짓도 안 했거든. 아직은.”
그 순간, 수십 개의 얼음칼이 떠올랐다. 여원이 핏줄이 불거지도록 손을 움켜쥐었다. 시린 얼음이 맨살을 파고들어 뼈에 꽂히는 게 어떤 느낌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떻게 잊을까. 한 번 상기하자 과거의 고통이 생생히 떠올랐다.
사결이 내비친 감정은 복잡했지만, 기반은 어쨌든 분노였다. 저 얼음칼이 갈 곳은 명확하다. 각오를 다진 여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만 한 크기의 송곳들이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콰장창!
벽면의 진열장에 있던 것까지. 정확히 찻잔만 골라 전부 박살을 냈다. 바스러진 유리와 깨진 찻잔의 잔해가 원목 바닥에 흩뿌려졌다.
“내가 뭘 하고, 하지 않을지는 전부 네게 달렸어.”
“…….”
이게 단가?
마계와 크라투스를 겪은 여원이다. 이런 건 위협 축에도 들지 못했다. 분명 뭐가 더 있겠지. 이다음은 뭘까. 폭행? 강간? 고문 후 전시? 자신이 아는 폭력들을 하나씩 떠올리는데 사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작.
태연한 구둣발이 잔해를 밟았다. 문 앞까지 간 그가 여원을 향해 말했다.
“뭐해. 따라와.”
“…….”
여원은 묵묵히 그를 따라나섰다.
* * *
사결은 여원을 데리고 길드 건물에 있는 자기 집으로 향했다. 내부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현수가 있었다. 함께 온 여원을 본 그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지 잠깐 끙끙거리다 결국 한숨으로 대신했다. 사결이 이현수에게 물었다.
“계약서는.”
“여기 있습니다.”
이현수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서류철을 건넸다. 사결은 그걸 그대로 여원에게 내밀었다. 종이가 손끝에 닿는 순간 정전기처럼 찌릿한 뭔가가 올라왔다.
마나를 담은 잉크로 쓰인 계약서였다. 암흑기라 불렸던 반목의 시대에 헌터를 통제할 수단으로 구속구와 함께 성행했으나 헌터들의 인권문제가 대두되며 사라진 물건이었다.
“읽어보고 서명해.”
털썩, 소파에 엉덩이를 붙인 사결이 맞은편을 고갯짓했다. 여원은 앉지 않았다. 그는 선 채로 천천히 종이를 훑었다.
“고용계약서다. 너는 지금부터 크레딧 길드의 길드원이자 내 전속 팀의 팀원이 된다. 팀장은 나고 팀원은 너 하나뿐인 2인 팀이지. 계약 기간은 수해의 심부에 도달해 모든 게이트를 최초 공략할 때까지.”
처음 몇 장은 길드와 헌터 간의 계약서 형식을 그대로 가져온 평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가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항목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령 피고용인이 계약 만료 시까지 고용주의 집에서 동거해야 하는 조항이라던가, 고용인의 허락 없이 돌아다닐 수 없다는 전근대적 조항 같은 것들. 그런 게 한 페이지가 넘었다. 아무래도 ‘비공정 사건’에서 파생된 항목들인 것 같았다.
“거부하겠다면?”
어느새 여원도 말을 놓았다. 사결은 그게 기꺼웠으나 지금의 상황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겐 아무것도 하지 않아.”
대신 동준에게 뭔가 하겠다는 뜻이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여원이 굳은 눈으로 사결을 노려봤다. 길게 다리를 꼰 사결이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것도 거짓말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긴. 저기 사인하기 전까진 한 발짝도 내보내지 않을 셈이었다.
“잘 생각해. 이건 네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잖아.”
잔뜩 채찍을 휘둘렀으니 달콤한 걸 물려줄 차례였다. 여원은 삼초승달을 증오했다. 정확히는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이명환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초승달은 안 돼.”
냉정하게 날아와 꽂힌 그 말을 하루도 잊어본 날이 없다. 그건 사결이 감히 가늠할 수도 없는 깊은 절망의 골짜기였다.
…이명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게 지금도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사결은 억지로 머리를 비웠다. 복잡한 생각은 이런 상황에선 외려 독이었다.
‘어차피 말할 거. 곧 알 수 있겠지.’
“수해의 심부까지 혼자 힘으로 가는 건 불가능해. 깊은 곳엔 S급 마수가 어슬렁거리고 있거든. 다수의 S급과 A급으로 이루어진 팀의 조직력이 반드시 필요하지.”
여원은 기어코 저를 찾아낸 이명환의 아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복잡한 심경은 여전했지만 2년 전처럼 극렬한 거부감이 들진 않는다.
그는 스스로의 변화를 실감했다. 감정의 싹을 틔운 게 사결이었다면 동준과 카페는 양분이었다. 그는 분노에 몸을 맡기지 않고 충동에 지지 않게 됐다.
훨씬 성숙해진 여원은 물끄러미 사결을 봤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은 했다. 이렇게 만난 이상 어떤 식으로든 사내와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것도.
사결은 떨리는 심장을 감추려 애썼다. 가능한 태연한 척을 하는데 쉽지가 않다. 저 머리를 열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런 조직력을 갖춘 토벌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닫힌 미로지.”
안으로 들어갈 구멍 없이 벽으로 둘러싸인 미로.
“마기에 대한 내성이 없는 자들은 제아무리 S급이라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지. 그리샤 입장에선 다수의 인력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상황에 귀환자가 있다면 어떨까?”
“…….”
“등급은 A만 되어도 충분해. 마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벽 안으로 들어가 마물을 몰살하고 게이트를 닫을 수 있으니까. 벽 안쪽에 사는 놈들은 겉보기엔 무시무시해도 사실 그렇게 강한 건 아니거든.”
여원도 알고 있다. 마계에 떨어졌던 초반엔 꽤 자주 봤다.
그런 마물이 만들어내는 마기의 안개는 같은 마물에게도 영향을 끼칠 정도다. 헌터로 각성했다곤 해도 원래부터 마기에 취약한 편인 인간이 견뎌낼 리 없다.
반면 여원은 마기에 의한 격렬한 탈피를 몇 차례나 겪은 몸이다. 독한 마기라고 해 봤자 목과 피부가 좀 따가울 뿐. 헌터들처럼 치명적인 피해를 입진 않는다.
그가 귀환자에게 목을 맨 이유가 새삼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