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사결은 자신의 인내심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수해의 심부에 닿기 위해 무려 20년 동안 작업을 치고 귀환자를 찾아 헤맸는데, 고작 그의 위치를 듣고 못 기다려 카페 근처까지 왔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이 가장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혹시 눈치챌까 싶어 몇 번이나 주차한 자리를 바꿨다. 그때마다 점점 카페에 가까워진다는 건 자각하지 못했다.
지난 2년간 매일 같이 생각했다. 여원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할까.
처음엔 무조건 잘 대해주자고 생각했다. 겉과 속이 반비례하는 사람이니 불쌍한 척 굴면 마지못해 곁에 머물러 줄 거라 믿었다.
후회는 오래지 않아 분노로 바뀌었다. 여원은 그토록 미련 없이 떠났다. 자신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나는… 이토록 괴로운데. 이렇게 애달프게 찾고 있는데.
분노는 사결의 눈을 가리고 생각을 망가뜨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어떻게 여원을 감금하고 범할지에 대해 몰두하는 일상을 보냈다.
상상 속 여원은 항상 진창을 굴렀다. 그가 주는 고통과 자극을 어떻게든 감내하려 애쓰며 사결의 밑에서 바르작거렸다.
마지막엔 결국 무너졌다. 엉망으로 너덜거리는 육신으로 제 발목을 붙들며 애원했다. 제발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제발 저와 함께 있어 달라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사결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더는 여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건 그냥… 정제된 욕망이다. 갈비뼈 안쪽에 남은 건 타고 남은 재와 찌꺼기뿐이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왔다. 손님은 아니다. 모자와 마스크를 썼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여원이다. 사결은 숨이 멎었다. 반사적으로 거대한 덩치를 움츠렸다. 그가 타는 모든 차엔 엄청나게 짙은 선팅이 되어 있다는 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여원은 근처의 마트로 향했다. 사결은 슬슬 기어가듯 차를 몰아가다 여원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레이서를 방불케 하는 움직임으로 마트 주자창에 들어섰다. 시동을 끄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자 마스크가 잡혔다.
이현수가 넣어둔 것이다. 평소 그가 쓰라고 할 때는 갖은 핑계를 대며 거부했던 사결은 무척 자연스럽게 마스크 끈을 귀에 걸었다. 차에서 내린 그는 곧장 지하로 향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도중 마트를 왔다. 답은 식품 코너였다. 샌드위치에 쓸 달걀이나 커피에 넣을 우유 등 분명 음식을 사러 온 거다. 에스컬레이터를 뛰듯이 내려갔다. 식품 코너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모자랑 마스크. 모자랑 마스크.’
쉼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유제품 코너 앞에 선 여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더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여기 왜 왔는지조차 잠깐 잊었다.
자신이 올해 스물아홉이 되었듯 그 또한 서른이 되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변한 게 없었다. 2년 전에 박제된 것처럼 외관부터 분위기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아니, 달라진 것도 있다. 사결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코끝까지 내려오던 앞머리를 짧게 잘랐다는 걸. 담담하고 무기질적인 눈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한참이나 양손에 우유를 들고 고민하는 여원을 바라봤다. 차림새가 눈에 들어온 건 한참 뒤였다. 이 추운 날 겉옷도 없이 하얀 셔츠뿐이다. 주변을 배회하는 롱패딩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뭐 저러고 나왔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사결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또 왜 이렇게 추워. 난방도 안 하나? 무슨 마트가 이따위야.’
내부 공기는 따뜻했다. 온도계가 22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호수 표면이 얼어붙는 날씨에 저 정도면 준수한 수준이었지만 사결의 성엔 차지 않았다.
그때, 고심하던 여원이 살짝 허리를 숙였다. 셔츠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등 근육이 여실히 드러났다.
사결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그가 있는 방향으로 몇 발짝 더 다가섰다.
결심이 섰는지 그가 우유를 택했다. 숙였던 등이 바로 섰다. 강철로 만들어진 기둥처럼 올곧았다. 그 사이의 유일한 곡선은 움푹 들어간 허리선뿐이다. 사결은 그 얕은 골짜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저 등이 보기보다 유연하다는 걸 알았다. 길게 휘어지면 옆구리 근육이 같이 느슨해지고, 흠칫하고 힘이 들어가면 배의 근육이 선명하게 두드러진다는 것도.
비공정에서 안았던 그의 육체는 장인이 만든 오르골처럼 규칙적으로 꿈틀거렸다. 입에선 말초신경을 건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결의 인내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여원을 향해 다가갔다. 중간에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검은 마스크와 모자 사이로 드러난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
일말의 희망과 약간의 기대를 품었다.
실은 그도 자신을 그리워한 게 아닐까. 그렇게 간 것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게 뭐가 됐든 지금은 그걸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털퍽.
그 대답이 지금이다. 바닥에 떨어진 우유 팩이 터졌다. 하얀 액체가 쏟아진 자리에 이미 여원은 없다. 사결은 저만치 달려가는 그를 보고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딸그랑!
카페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위에 달려 있던 종이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정체를 확인한 동준의 눈이 한 차례 더 커졌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원은 대답 없이 숨을 헐떡였다. 이 날씨에 겉옷도 없이 나가더니, 돌아올 땐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대낮에 노상강도라도 만난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동준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가 여원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여원이 그런 동준의 손목을 잡아챘다. 꽉 쥐고 고개를 젓는 것에 강도가 맞다고 확신했다.
“괜찮아. 여기까지 따라오진 않을 거야.”
흠칫한 여원의 동공이 가늘게 떨렸다. 강인한 육신을 가진 사내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게 볼썽사납기보단 안쓰러웠다. 아주 중증이다. 동준은 쓴웃음을 숨겼다.
“일단 방에 들어가 있어. 따뜻한 밀크티 가져다줄게. 좀 쉬면서 진정하는 게 좋겠다.”
보통 때 같았으면 괜찮다고 거절했을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놀랐구나. 안타까움이 더해짐과 동시에 어느 미친놈이 대낮에 도심에서 강도질을 했나 싶어 분이 치밀었다.
동준이 씩씩거리며 밀크티를 준비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이 뒤늦게 주춤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되짚었다. 여긴 헌터의 도시였다. 막말로 거리를 다니는 사람을 붙잡고 물으면 셋 중 둘은 헌터인 곳. 그렇다 보니 범죄율이 낮았다. 대부분 우발적 범행이고 그마저도 별 피해 없이 검거됐다.
‘강도도 헌터였나?’
그렇다 해도 이상하긴 매한가지다. 수비대는 C에서 D급 언저리지만 대장은 반드시 A급 헌터가 맡았다. 동준이 생각한 것처럼 일반인을 상대로 한 헌터의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급 헌터면 수비대 하나만으로 제압하고 상급 헌터라면 수비대 대장들이 모여 상대하는 시스템.
S급이라도 길드장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면 그만이다. 그리샤에 소중한 사람이 있는 이들은 분탕질에 용서가 없었다. 지금이야 다들 수해에 정신이 팔려 잠잠하지만 그렇다고 점잖은 척하는 맹수를 건드리는 간 큰 자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 리가.
무엇보다 아무리 헌터의 위협을 받았대도 여원의 성격에 이렇게 겁을 먹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동준이 아는 그는 깊고 고요한 블루홀이었다. 뭘 던져도 삼켜버리고 어떤 거친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럼 대체 뭐지?’
여원이 마주한 게 뭔지 짐작도 가지 않아서일까.
동준은 이유 모를 불안을 느꼈다. 그렇다고 티 낼 순 없다. 지금 누구보다 불안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좀 괜찮아?”
다행히 여원은 평소로 돌아와 있었다.
스윽, 고개를 든 그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밀크티를 건네주던 동준은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툭 튀어나온 걸쇠에 스웨터가 걸린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기분이다.
잔을 받은 여원이 양손으로 잔을 감싼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떤 말도 없다.
평소가 아니다. 마치 2년 전의 여원을 보는 듯했다. 동준이 저도 모르게 여원의 어깨를 쥐었다.
“아니잖아. 왜 거짓말을 해.”
“…….”
단단한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그가 느리게 답했다.
“괜찮아.”
시선은 여전히 아래를 향한 채다. 메마른 눈이 김이 나는 밀크티 표면을 응시했다.
동준은 자신이 대단한 착각을 했다는 걸 알았다. 이건 강도를 만난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고작 강도 따위가 그를 이렇게 흔들 리 없었다.
여원의 앞에선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여유 있는 척을 했지만, 사실 저와 비슷한 느낌에 적잖이 놀랐던 동준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지금 그가 마주한 건 과거였다.
동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걸레짝에 가까운 모습으로 눈 내리던 시골길을 걸어가던 모습이 뇌리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