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사결은 곧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보통 경계 표시를 위해 토벌한 곳마다 베이스캠프를 옮겼지만, 이번은 예외였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사결도 그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서 새로운 막다른 길을 응시했다.
흑무벌의 영역보다 훨씬 옅은 색이라 덜 위협적으로 보였다. 블랙미스트라는 말도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저기 삼켜진 A급 헌터만 벌써 열이 넘었다.
한참이나 아래를 내려다보며 주변을 선회하던 사결은 이내 드론을 돌렸다.
전처럼 해결해볼까.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이현수가 걸렸다. 유능하고 되바라진 부길마는 또 돌발행동을 하면 이번에야말로 사표 쓸 거라며 단단히 못 박았다. 다른 때처럼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급성 마소 중독에 걸렸을 때, 사결은 오랜만에 이현수가 우는 걸 봤다. 코흘리개였던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의료진이 괜찮다고 해도 사결이 곧 죽을 것처럼 굴었다.
이미 길드를 나간 사람에게 연락해 제발 상태만 좀 봐 달라 사정사정하는 목소리가 병실까지 들렸다. 그 꼴을 다시 보면 소름이 돋아 죽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미친 짓을 다시 할 생각은 없지만.’
그땐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사결은 길드 건물 상층부에 자리한 집으로 돌아왔다. 복층으로 이루어진 펜트하우스였다. 수영장까지 딸린 넓은 테라스에선 구 도심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사결은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곧장 욕실로 갔다.
한껏 뒤집어쓴 피는 오는 길에 이미 말라붙어 핏자국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옷은 속옷까지 전부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물줄기를 틀자 한동안 붉은 물이 하수구로 흘렀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사결은 물부터 들이켰다. 500mL 페트병을 통째로 비우고 병은 구겨 던졌다. 그물처럼 생긴 통에 빈 병이 쏙 들어갔다.
물기도 닦지 않은 알몸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테이블엔 양주 몇 병과 술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길게 등을 기댄 그가 단말기를 조작했다. 실내의 조명이 간접등 하나만 남기고 전부 꺼졌다. 하얀 벽면은 스크린으로 바뀌었고,
[……!]
[소리. 참지 말고 들려줘요.]
살색으로 가득한 화면이 비쳤다. 자신의 방을 녹화한 비공정의 CCTV 화면이었다. 거구의 신데렐라는 유리구두 대신 섹스 비디오를 남겼다.
[좋아요? 좋은 거 맞죠?]
화면 안에선 2년 전의 자신이 등신처럼 속삭였다. 입가에 비웃음을 띤 사결이 양주를 땄다. 얼음도 넣지 않은 주홍빛 액체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는 본래 도수 높은 술은 잘 마시지 않았다. 알코올이 주는 몽롱함도, 필름이 끊기는 것도 혐오했다. 몸을 살짝 덥히는 수준이 딱 좋았다.
사결은 이 음험한 기록을 손에 넣은 이후, 항상 만취에 가깝게 마시며 처음부터 끝까지 화면을 응시했다.
이성이 멀어지면 본능이 날뛴다. 동시에 그날의 광경이 저 화면보다 선명하게 뇌리로 떠올랐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품에 안고 있는 것이다.
열기를 품고 땀에 젖은 피부를. 그 단단한 몸뚱이를.
[그…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신음이었다. 색기라곤 없이 끙끙 앓는 소리라 외려 미치도록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경직된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깨물고, 다시 그 자리를 핥았다.
집착에 가깝게 가슴을 주무르다 하나뿐인 유두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짓눌린 남자는 단단하고 강했다.
제게 여러 표정과 감정을 보여줬던 것처럼. 이때의 행위 또한 사내가 제게 안겨준 것에 가까웠다. 갑피에 싸여 있던 짐승의 배는 상상 이상으로 부드럽고 야릇했다. 한 번 손에 쥐자 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고,
[……!]
이제 와선 갑피를 부숴서라도 손에 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결이 빈 잔을 내려놨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손에 쥐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으로 여원을 범했다. 머릿속 사내는 검은 구속구로 관절마다 죄 고정되어 부자유했고 은색으로 빛나는 철제 틀에 묶여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사결은 그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일부러 고통을 주려는 것처럼 내부를 파고들었다. 참고 참다 튀어나온 낮은 신음에 흥분하면서.
삑삑.
단말기의 단조로운 벨 소리가 농밀한 상념을 방해했다. 혀를 차면서도 사결은 습관처럼 번호를 확인했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 하지만 기억에 있다. 얼마 전 막대한 돈을 쥐여준 뒷골목 정보상이었다.
“뭐냐.”
사결은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지만, 의뢰를 받는 입장에선 모를 수가 없다. 잔뜩 긴장한 사내가 공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의뢰하신 분을 찾았습니다.]
단번에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멈칫한 그가 한 번도 누른 적 없는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계속해봐.”
[3구역의 이프리트라는 카페에서 2년 전부터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찾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사결이 찾은 정보상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힘들게 찾았다는 건 공치사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추적을 방해했다는 뜻이다. 여원이 도심지에 있음이 밝혀지자 그 누군가의 정체도 함께 부상했다.
“수고했다. 잔금은 내일 중으로 보내지.”
연락을 끊은 사결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분명 회색 천장을 보는데 눈앞이 붉다. 분노의 색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크레딧의 힘과 자본력이 따라붙은 추적이다. 아무리 잘 숨었어도 심부라면 몇 주, 외곽지역이라도 몇 달 내로 결과가 나와야 했다.
그런데 2년이 다 되도록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여원이 어디 깊은 산중에 숨어 자연인의 삶을 살고 있거나 일을 맡은 이현수가 의도적으로 감췄거나.
이제껏 사결은 전자라고 여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이런 것에 놈이 배신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현수는 여원의 존재를 숨겼다.
깨닫고 나니 그림이 보였다. 어쩌면 본인은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원은 내 목을 조른 전적이 있고, 내가 답지 않게 집착하니 불안요소는 가능한 치우고 싶었겠지.’
수해가 완전히 토벌될 때까지 사결은 완전무결한 리더로 있어야 한다. 그게 멀리 보면 사결을 위하는 길이다. 적어도 이현수는 그렇게 믿었을 터.
‘빌어먹을 새끼.’
이현수는 사결에게 빚이 있었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갚을 수 없는 빚이다.
어릴 적엔 악에 받쳐 네 인생을 바쳐서라도 갚으라고 윽박질렀고 머리가 커선 굳이 그걸 철회하는 게 더 이상해 내버려 뒀다. 그에 대한 화제는 사결도 이현수도 꺼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평소엔 잊고 살았다.
‘20년쯤 붙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느슨해진 면도 있고….’
이참에 한 번 되짚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쨌든 실마리를 잡자 사결은 이현수의 생각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막힌 미로가 나타나기 전까지 A급 이상의 귀환자를 찾는다면 그걸로 됐다. 못 찾는다고 해도 시간은 많은 것을 불식시키는 법. 그때쯤 길드장의 상태를 봐서 보고하자. …라고 생각했겠지.
삑삑.
단말기로 정보상의 증빙자료가 도착했다. 거기엔 하얀 셔츠 차림에 검은 앞치마를 두른 여원이 2년 전과 다름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사결이 나른하게 웃었다. 그 또한 2년 전과 같은 살벌한 웃음이었다.
그가 어딘가로 연락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입니까.]
이현수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튀어와.”
[…….]
평소라면 뭐라 한 마디 개겨 보겠는데 목소리만으로도 느껴지는 살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현수는 눈치껏 수그렸다. 퇴근했던 그는 급하게 차를 몰아 길드 건물에 있는 사결의 집으로 왔다.
이현수가 오는 동안 술을 마시던 사결은 그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자마자 양주병을 집어 던졌다. 병은 이현수의 바로 옆 벽면에 부딪혔다.
“…!!”
콰장창!
두꺼운 파편과 황금빛 액체가 거칠게 흩뿌려졌다. 이현수는 의외의 상황에 굳었다. 이렇게까지 분노한 사결은 상대한 적이 없었다.
“카페 이프리트의 사장.”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해한 이현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그다웠다.
“자의로 판단하지 마. 네 인생이 어떻게 내게 저당 잡혔는지 벌써 잊었나?”
“…….”
“내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면 너와 내 비율은 정확히 반씩이다.”
사결의 검지가 제 가슴팍을 쿡 찔렀다.
“누설한 놈과.”
그 손가락이 다시 맞은편의 이현수를 향했다.
“밀고한 놈.”
끔찍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로 내려앉았다. 한참 후 사결이 그에게서 등 돌리며 명령했다.
“당장 가서 동준부터 확보해.”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