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거대한 식물형 마물 세 마리가 그 한 번의 휘두름에 절명했다. 후- 긴 숨을 내쉰 그녀가 거대한 칼을 어깨에 얹었다. 다부진 근육이 꿈틀거리며 자기주장을 했다.
도전(刀錢)은 구시대에 ‘망나니 칼’이라고 불렸다. 죄인의 목을 벨 때 쓰던 그 칼이 맞다. 저 칼등에 떡이 되도록 맞아본 적이 있는 두 팀원은 얼른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바람과 불이 나와 시너지 효과를 냈다. 완벽하게 마물만 태운 불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마물이 전부 처리되자 두 사람이 어깨를 폈다.
“아 누님, 저희가 언제 놀았다고 그러십니까.”
“맞습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잡기도 많이 잡았습니다.”
“…너네는 그 입만 다물어도 인기가 많을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 인기 많습니다!”
그렇게 발끈하면 사실이라고 실토하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팀장은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시니컬하게 말했다.
“A급 헌터인 거 비밀로 하고 사귀는 사람이 생기면 인정해주지.”
“…….”
“…….”
두 사내가 격침당한 시점.
쿠구구궁!
쿠과광!
바닥이 진동하며 급이 다른 소리가 수해에 울려 퍼졌다. 팀장이 혀를 찼다.
“여전히 적당히를 모르시네.”
고개를 돌리자 멀리 숲 위로 삐쭉 솟은 얼음수정이 보였다. 2년 전의 얼음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저런 걸 아무렇지 않게 쓴다는 점에서 이미 S 상급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말석이긴 하지만 어쨌든 크레딧의 S급에 이름을 올린 팀장, 윤혜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디어에 나오는 사결의 모습은 이상적인 톱스타 그 자체였다. 이 도시의 가장 큰 미담을 가진 사람인데 S급이고 잘생겼다. 거기에 웃음까지 헤프다. 사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수의 업계종사자와 크레딧의 팀장급 이상은 안다. 그게 철저히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걸.
‘냉소적이고 인간 같지 않은 면을 억지로 덮은 느낌이었지.’
사결은 자기 울타리 안에 든 사람들에겐 잘 해줬다. 이현수는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적으로 꽤 괜찮은 상사였다. 그게 가식이라도 윤혜리는 딱히 상관없었다. 오히려 박애주의자를 표방했다면 일찌감치 다른 길드로 옮겼을 것이다.
그랬던 사결인데.
쿠구궁.
쿠르르.
지진이 난 듯 땅이 울리며 몇 개의 얼음수정이 더 솟구쳤다. 그 위에는 비행하는 드론과 거기 매달린 사결이 있었다.
‘눈에 살기 봐라.’
윤혜리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와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모습이다.
그는 어느 순간부턴가 누가 봐도 흠칫할 만큼 날이 섰다. 곁을 스쳐 지나다 마물에게서나 느낄 법한 살기에 식겁해서 칼 손잡이를 틀어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변했냐고 물으면 답하기 난감하긴 한데.’
손속이 잔인해졌다고 할까. 정확히는 과해졌다. 전 같았으면 단숨에 죽였을 마물을 일부러 잔혹하게 죽였다.
겉보기엔 딱히 변한 게 없다. 나사 하나 풀린 것처럼 나른하게 웃으며 돌아다니거나 저혈압도 없는 이현수의 저혈압 치료제를 자처하는 것까지.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윤혜리가 섬뜩하게 여기는 것도 이런 점이다.
‘바뀐 건 좀 더 근본적인 부분… 인가?’
본질이라는 거창한 말까지 쓰는 건 오버라도 뭔가 길드장을 정의하는 부분에 변화가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나, 그녀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인간미는 사라졌지만 사결은 여전히 좋은 상사였고, 일하는 데 문제도 없다. 돈은 착실하게 입금된다.
“굳이 정화에 한 손 거들겠다고 와 주시다니. 저희 길드장님도 사람 되셨네요.”
뭣 모르는 팀원의 말에 윤혜리는 웃음을 참았다. 사람이 됐다고? 그 반대다.
‘사람인 적 없던 짐승이 흉포한 괴물로 변한 거지.’
그 사결이 토벌도 아니고 정화에 나섰다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이현수가 부탁했다고? 저 인간이 그런 것에 순순히 움직일 인간이었으면 이현수가 가슴에 사표를 품고 다니지도 않았겠지.
윤혜리는 어렵지 않게 정답을 유추해냈다. 고삐가 들지 않는 짐승의 열을 빼기 위해 임시로 수해에 던져놓은 거라고.
“팀장님. 구경 그만하고 갑시다.”
“맞아요. 다음 타깃 열리기까지 이제 10분도 안 남았습니다.”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윤혜리가 도전을 횡으로 휘둘렀다. 영역 경계에서 일어난 소란에 정찰을 나온 짐승형 마물이 반으로 갈라져 절명했다.
때맞춰 근처의 다른 게이트를 처리한 두 팀원이 합류했다. 긴 도신을 가진 쌍검을 쓰는 헌터와 번개를 다루는 헌터였다.
“가자.”
다섯 명이 한 팀인 윤혜리 부대가 수해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 *
사결이 수해를 찾은 건 점심 무렵이었다. 할당된 일을 끝냈을 땐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 전체에 길게 끌리듯 분홍색과 푸른색이 번졌다. 백일몽을 꾸다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박인 그가 수해 너머를 응시했다.
온몸이 마물의 피로 범벅이었다. 얼음을 쓴 건 초반 몇 번뿐. 이내 드론에서 뛰어내린 사결은 맨손으로 마물을 때려잡았다. 보스 격인 마수도 마찬가지. 뿔을 부러뜨리고 그 뿔로 심장을 찔렀다.
그렇게 열 개의 게이트를 닫았다. 사결이 손에 묻은 피를 닦으려다 미간을 찌푸렸다. 옷도 피에 절어 닦을 곳이 없었다. 짧게 혀를 찬 그는 변형된 풀에 손끝만 대충 닦아 단말기를 조작했다.
“나다. 끝났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처리반을 보내겠습니다.]
이걸로 자신이 할 일은 완전히 끝났다. 사결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드론을 타고 수해의 안쪽으로 나아갔다.
오래지 않아 남부 경계선이 보였다. 토벌대가 사용하는 드론에는 이미 공략된 미로의 라인이 입력되어 있다. 이것도 2년 새 개량된 부분이었다. 그냥 잡고만 있어도 드론이 알아서 움직여 수해 내부의 미로를 따라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2년… 벌써 2년인가.’
손에 힘을 주는 것 외엔 할 게 없어서인지 그의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2년 전 사결이 막힌 미로에 구멍을 뚫었던 대사건 이후, 그리샤에선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있었다.
마물에 대한 게 아니라 마정석을 외부로 빼돌려 마약을 제조하던 일당에 대한 검거 작전이었다. 주 세력이 헌터인 만큼 수비대와 헌터의 대규모 합동작전이 이루어졌고 세력은 일망타진됐다.
작전 과정에서 과잉진압으로 피의자 다수가 사망했지만 그리 주목을 받진 못했다. 큰 이슈에 가려진 탓이다.
헤스티아 길드에서 귀환자를 찾았다.
온 그리샤가 들썩였다. 이제 미로의 막다른 길이 나타나도 걱정할 게 없다며 매스컴은 연일 기사를 쏟아냈다.
사결은 잠깐 사나운 눈을 했으나 D급이라는 걸 전해 듣곤 ‘하, 하여간 등신 새끼.’하고 말았다. 사결과 크레딧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득 찬 배길수는 사결이 귀환자를 찾는다는 것까진 알았으나 자세한 정황을 유추하지는 못했다.
그냥 사결이 찾으니까. 그가 원하는 걸 먼저 손에 넣고 싶었을 뿐이다.
‘뭔지 몰라도 귀환자로 블랙미스트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거지? 오케이. 당장 찾아와!’
‘하하하! 귀환자다! 내가 먼저 찾았어. 내가 사결을 이겼다!’
멍청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사결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헝클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조사하면 귀환자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강함이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점이 특히 경멸스러웠다.
드론이 작게 흔들렸다. 사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술 취한 듯 비틀거린 드론이 겨우 원상태로 돌아왔다. 사결의 눈이 어두워졌다. 개량된 드론이 현장에 정식으로 발 들인 건 1년 전이고, 신식 드론에서 구식 드론과 비슷한 현상이 보고되기 시작한 건 반년 전부터였다.
기기 결함은 아니었다.
드론을 비롯한 디바이스들이 개량됐지만, 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수해의 마기 또한 짙어진 탓이다.
‘이러면 안쪽에서 구형 모델은 아예 먹통이겠군.’
헌터용 단말기는 아직 진척이 느리다. 아무래도 연구팀을 닦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결은 양옆으로 늘어선 마기의 벽을 응시했다.
마물과 수해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경고했다. 이대로라면 A 하급이 발들일 수 없는 지점이 머지않았다고. 사결은 드물게 동의했다. 현장의 최전선에서 뛰는 그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반드시 귀환자가 필요하지.’
굵은 가시가 내장을 파고들었다. 2년 전 심어진 가시는 닳는 일도 없이 툭하면 그를 들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