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그게 어쩌면 우유부단한 형태의 고백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새로운 공간에 적응한 후였고, 동준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저를 대했다.
다시 한 해가 갔다. 흰 꽃내음과 무성한 초목, 화려하고 덧없는 한때를 지나 이제 하얀 침묵의 계절이다.
머플러를 두르고 밖으로 나가자 찬 공기가 뺨에 달라붙었다. 전처럼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는다.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처음 만났던 날처럼 부드럽고 다정한 부름이었다. 카페 앞에 바짝 차를 댄 동준이 후다닥 뛰듯이 내리더니 보조석 문을 열어줬다. 어이가 없어 무표정하게 보자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부족함 없이 모신다고 했잖습니까.”
“말투. 안 어울린다.”
“응. 평소처럼 할게.”
냉큼 고개를 끄덕인 그가 춥다고 얼른 타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픽 웃고는 차에 탔다. 한참을 달려 이너시티 가장자리에 위치한 한적한 구획까지 이동했다. CCTV도, 도시를 순회하는 수비대도 없는 곳을 고른 티가 났다.
동준이 삼겹살과 함께 소주를 주문했다. 여원은 탄산이었다. 숯이 나오길 기다리는데 한쪽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왔다. 샐러드를 집던 여원의 젓가락질이 뚝 멎었다.
[미로는 출구가 있기에 미로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우린 길을 찾아낼 겁니다.]
[게이트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민간에 공표하고 이제 반년이 흘렀습니다. 논란과 우려는 잦아든 추세지만 시민들 마음에 불안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닐 겁니다. 다들 가슴에만 품고 있겠죠. 수해를 토벌해야 하는 영웅들에게 야유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전문가로 보이는 패널이 안경을 추어올렸다.
[그런데 아무 근거도 없이 우린 이겨내 보일 거다? 너무 무책임한 발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사결은 말없이 웃었다. 눈매가 날카롭게 굳은 비웃음이었다. 여원은 그 표정의 의미를 완벽하게 읽어냈다. 하는 거라곤 이런 자리에 나와 주둥아리나 놀리는 새끼가 별소릴 다 한다는 뜻이다.
여원만큼 정확하게 이해한 건 아니겠지만 대충 분위기를 읽은 패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멸망을 향해가는 분위기에 기겁한 MC가 전면에 나섰다.
[이, 이번에 지정된 공략 포인트는 2년 전과는 다른 종류라고 하던데요. 규모가 두 배에 달하고 마기 농도는 1.5배라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내부에 둥지를 튼 게 어떤 등급의 마물인지조차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황인데….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계신 방도가 있으십니까?]
[기밀이라 이런 자리에서 말씀드리긴 곤란하군요. 다만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2년 전 막혀버린 미로의 공략 포인트를 뚫어낸 게 누구였는지.]
그리샤에 자리를 잡은 이후, 사결의 소식은 원치 않아도 귀에 들려왔다. 그는 명실상부한 도시의 영웅이었다. 한 번 몰락한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소 중독 환자를 위해 최전선에서 토벌대를 이끌고 있다.
여원은 그린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남자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의외네.”
“뭐가?”
“너는 저런 데 관심 없을 줄 알았어.”
“관심 없다.”
동준이 낄낄거렸다.
“거짓말할 거면 그냥 침묵하라니까. 하긴 넌 입 다물어도 티 나긴 한다만.”
“…….”
여원이 물끄러미 동준을 봤다. 꼽등이보다 못한 걸 보는 눈이다. 뒤늦게 어째서 고기를 먹으러 왔는지 기억해 낸 그가 아차 했다.
“…제가 잠깐 주제도 모르고 헛소리를 했습니다.”
본전도 못 챙긴 동준이 쪼그라들었다. 그를 구해준 건 이두가 튼실한 직원이었다.
“숯 들어갑니다. 조심하세요.”
숯과 불판이 깔렸다. 동준은 이때다 싶어 고기를 구우며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기를 보자 여원의 마음도 누그러졌다. 그가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 그걸 본 동준도 한시름 놓고 젓가락질을 했다.
둘은 걸신들린 듯 고기를 먹어치웠다. 동준은 술을, 여원은 음료수를 마셨고 상 위엔 빈 병들이 가득했다. 예정된 수순으로 동준이 나가떨어졌다. 여원은 그의 단말기로 계산을 마치고 건장한 성인 남성을 훌쩍 안아 들었다.
“오오.”
“거 힘 좋네.”
구석진 자리에서 얼큰하게 취한 아저씨 무리가 박수쳤다. 여원은 고개만 꾸뻑 숙여 보이곤 가게를 나섰다.
동준을 보조석에 태운 후 운전대를 잡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답지 않게 감상에 젖었다. 과거 동준에게 주워져 지나온 길과 같았던 탓이다.
2년. 그동안 카페에만 충실했던 건 아니다. 동준의 것처럼 순수하고 찬란하진 못했으나 그에게도 이뤄야 할 게 있었다.
이명환의 마지막 흔적은 삼초승달 길드 본관에서 끊겼다. 전문가들은 게이트가 우후죽순 열리기 시작한 지점이 그 인근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백담에선 몰랐던 사실이다.
‘수해에 삼켜진 건 알았지만 설마 가장 깊은 심부에 있을 줄이야.’
당시엔 온갖 음모설이 나돌았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은 비난을 두려워해 도시의 뒷면으로 숨어들어 여전히 잘살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원은 드물게 비웃었다.
‘그런 짓을 한 놈이 비난 따위를 두려워할 리 없지.’
건물 내 음습한 공기, 작은 것도 크게 울리던 소리, 바닥의 마법진과 몸을 뒤틀며 죽어가던 사람들, 그 모든 걸 무감하게 지켜보던 사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자신을 그대로 얼려버릴 것 같던 게이트석까지.
그 모든 게 아직도 선명하다.
신호에 걸려 브레이크를 밟았다. 질리지도 않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겨울이 지나면 세 번째 벚꽃이 핀다.
이제 더는 보지 않는 사전에서 여원은 ‘미련’의 뜻을 떠올렸다. 깨끗하게 잊지 못한 마음이었던가.
은회색 나무에 달린 신호등에서 초록빛이 점멸했다. 뒤늦게 횡단보도 앞에 선 두 사람이 황급히 뛰기 시작했다. 어린 청년 둘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저들끼리 엎치락뒤치락하며 여원의 앞을 가로질렀다.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맞은편에 다다른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더니 슬쩍 손끝을 얽어 잡았다.
빵!
뒤차의 재촉에 겨우 액셀을 밟았다. 그새 거세진 눈발이 차창을 두드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의 안에도 은회색 나무가 있다. 실수로라도 눈에 들까 서둘러 고개를 돌리는 마음의 구석진 자리. 바짝 마른 가지에는 지금도 사결에 대한 미련이 꽃망울처럼 맺혀 있었다.
여원이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계속 그의 옆에 있었으면 이 한이 불식될 만큼 무언가 바뀔 수 있었을까. 가슴에 상흔을 가진 채로도 크라투스에 대한 걸 잊을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다. 과거 없는 미래는 오지 않는다. 부질없는 상상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
비어버린 여원의 시선이 도심의 불빛을 가로질러 먼 곳을 향했다. 충동이 꿈틀거린다. 백담에 있을 땐 그저 멀다 여겨졌던 곳이 그리샤에 오고서부턴 구체적인 목표로 변했다.
‘수해.’
그것도 틀림없는 심부였다.
부우웅.
차체가 점점 속도를 높였다. 심장의 박동도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저곳에 있는 무언가가 지금도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 *
크레딧의 A급 헌터들이 수해의 가장자리를 뛰어다녔다.
쿠궁.
콰지직.
거대한 검이 휘둘러지고 작은 번개가 쉼 없이 내리쳤다. 그들은 ‘정리조’였다. 이미 토벌이 완료되고 게이트 분석까지 끝나 도시에서 재생성 주기를 확보한 게이트를 처리하는 역할이었다.
사람들이 토벌대라고 하면 떠올리는 ‘토벌조’는 기본적으로 S급이 주축이 됐다. 토벌되지 않은 수해는 마기도 짙은 편인 데다가 토벌 후 정찰을 한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왔다. 그 때문에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화력이 필요했다.
바꿔 말해 도심의 게이트라면 모를까 한 번 토벌됐다곤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수해에서 A급 헌터들은 전쟁통에 갓 떨어진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였다.
그에 도전(刀錢)을 손에 든 헌터가 소리쳤다.
“힘들다고 징징대면 내 손에 먼저 뒤진다. 정신 똑바로 차려. 닫을 게이트가 아직 열 개나 남았다.”
“으아….”
바람 속성 팀원이 죽는소리를 냈다. 오늘 그들에게 할당된 게이트 수는 열여섯 개. 다른 도시들이 들었다면 기겁을 하겠지만 정리조에겐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오늘은 적은 편이다. 불 속성 동료가 물었다.
“오늘 길드장님 서쪽에 배치됐다며. 심심하다고 한마디 했다가 부길마한테 쫓겨 나왔다던데. 진짜냐?”
“어. 나도 그렇게 들었다.”
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이 다시 물었다.
“혼자서 열 개 닫는다던데 그것도 진짜냐?”
“진짜긴 한데 너 왜 아까부터 길드장이라고 하냐. 코드로 불러야지.”
“굳이 그럴 필요 있나?”
“우리 같은 쩌리와는 다르지. 귀한 몸이시잖냐.”
“…그러니까 왜?”
바람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감청되면 어떡할 건데. 다른 도시에서 암살자라도 보내면.”
수해는 엄연히 도시 밖이고 무법지대다. 도시 안과는 다르다. 가능성은 적지만 그럴 마음만 있으면 습격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불이 “글쎄다.”하고 뺨을 긁적였다.
“그럼 그 암살자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
차마 반박하지 못한 바람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팀장이 신경질을 내며 도전을 길게 휘둘렀다.
“놀지 말고 일해 짜식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