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사결은 충분히 예상했다. 처음부터 설득이 먹힐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의 망설임을 만들어내고 헌터들의 발을 붙잡아두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수해의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결과로 가능성을 증명했다.
본격적인 토벌이 시작되었고 사결은 그렇게 얻은 마정석의 대부분을 중화제로 가공해 그리샤에 유통했다.
소년은 그리샤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과 권위를 가진 자가 됐다. 삼초승달이라는 이름이 흐려질 만큼 강렬한 후광이었다. 그리샤의 모든 이들이 사결에게서 앞으로 나아갈 길을 봤다.
“새로운 그리샤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헌터들의 피와 희생 위에 세워졌다.”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최치택을 향한 적의는 선명해졌다. 떠나보낸 친구와 동료를 떠올린 것이다.
“그런데 제 안위 챙기자고 떠났던 놈들이 감히 그리샤의 마정석을 빼돌릴 생각을 해? 그것도 마약 따위를 만들기 위해서?”
“그, 그걸 어떻게…!”
경악해서 얼결에 말을 뱉은 최치택이 헉,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정석의 수요는 다양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분야는 세 가지. 하나는 마소 중독의 중화제, 다른 하나는 헌터 전용 마약의 재료, 마지막은 치료용 포션이다.
가장 비싸게 팔리는 건 포션이었다. 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데다 제조했을 때 실패 확률도 높아 뒷세계에선 손대지 않았다.
길드인 척하는 마피아 집단. 예를 들어 대도시 청왕의 위스퍼리 길드 같은 경우 선호하는 건 단연 마약이다. 일단 가성비가 좋다. 적은 양으로 비싸게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질 좋은 새로운 물건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
그런 놈들의 눈에 그리샤가 어떻게 비쳤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마정석이 무한히 솟아나는 분수 같았겠지. 그걸 우리라고 몰랐을 것 같나? 여태 그리샤 내에서 돌아다니던 쥐새끼들을 방치한 게 나태와 무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뒤늦게 모든 것을 알게 된 최치택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자신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저 더 큰 걸 낚기 위한 미끼였을 뿐. 발밑의 거대한 판의 형상이 비로소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샤의 마정석을 빼돌리던 청왕이 점점 욕심을 내기 시작했고 그 사업 확장을 위한 디딤돌로 자신을 심었다. 그걸 역으로 노린 그리샤의 쥐새끼 일망타진을 위한 첫 번째 단추. 그게 바로 저였다.
사결의 말이 이어질수록 장내의 분위기는 사정없이 얼어붙었다. 살기가 들끓었다. 그 모든 악의가 하나의 점이 되어 그에게 모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최치택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처음부터였어!’
맨 처음부터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 그걸 깨닫자 일전에 나눴던 모든 대화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다른 길드들도 다 같은 생각인가…. 뭐,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일단 내부회의를 거친 후에 연락드리겠네.”
내부회의는 최치택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뭐? 정의구현? …솔깃한데?”
그건 널 조져서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뜻이었다.
툭툭.
사결이 최치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감사를 표하지. 덕분에 내부에서 종양처럼 자라난 놈들까지 한꺼번에 걸러낼 수 있었다.”
* * *
“이 뒤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요즘 일이 좀 바빠서요.”
“알겠네. 걱정 할 일 없게 잘 처리하도록 하지.”
협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결은 꾸벅 인사하곤 그대로 몸을 돌려 청문회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등 뒤로 무수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강한 존경, 미약한 시기, 그 외 여러 복잡한 감정과 사유(事由)가 얽힌 시선.
그것들은 수은처럼 모호하고 타르처럼 진득하게 달라붙었으나 어느 것도 그의 걸음을 잡진 못했다.
옥상으로 향한 사결은 바닥의 H 마크를 가로질러 가장자리로 향했다. 그는 키보다 높게 자리한 난간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바람이 사납게 나부끼며 한 걸음 앞의 허공을 경고했다.
사결은 미리 챙겨둔 고글과 컨트롤러를 꺼내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큐브 형태의 드론을 손에 쥐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사장님!”
뒤늦게 사결의 행보를 듣고 뒤쫓아 올라온 이현수가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사결을 보고 경악해 소리쳤다.
“어디 가시려고요!”
“수해.”
아니 거길 왜. 아니 그보다 너 혼자?!
“야, 너 거기 안 서?!”
이현수가 존대고 나발이고 집어치우고 손을 뻗었다. 동시에 사결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뒷수습 잘 부탁한다.”
“이 미친 새끼야아아!”
마나를 머금은 큐브가 펼쳐지며 유선형의 드론으로 변했다. 인공적인 하얀 새가 그리샤의 빌딩 숲을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미로의 막다른 길. 독무벌이 살고 있는 직경 1.4km의 공략 포인트다.
수해에 산재한 블랙미스트는 헌터를 막아서는 거대한 벽처럼 자리했지만, 그것의 본질을 정확하게 설명하면 역시 벽보단 미로라고 사결은 생각했다.
공략을 시작한 날부터 오늘까지. 미로에 발을 들였던 무수한 삶과 희망이 길을 잃고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결은 미로의 길을 따라 빠르게 날았다. 목숨을 건 미친 곡예였다. 상공에는 경계가 없다. 올바른 길로 가고 있음에도 이따금 벽면에서 흘러나온 마기에 닿았는지 일시적으로 통제를 잃은 드론이 비틀거렸다.
보통은 적당한 속도로 비행하며 가능한 벽에 닿지 않게 주의하는 게 정석이다. 실수로라도 스치면 ‘추락사’라는 고등급 헌터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는 사인으로 죽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는 끝내 곡예비행으로 목적한 곳에 도달했다.
사결은 까마득한 아래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흑무(黑霧)를 내려다봤다. 그때 겨우겨우 버텨 여기까지 온 드론이 결국 오작동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힘을 잃는 그것을 먼저 놓았다.
아래로 떨어진 사결은 밑을 향해 전력을 다해 힘을 방출했다. 전력이란, 말 그대로 전력이었다.
콰아앙!
푸른 수해에 하얀 산이 솟구쳤다. 수십 개의 거대한 육각 수정 같은 얼음이 사방으로 솟구쳐 거대한 수정과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그 거대한 얼음산은 독무벌의 영역을 통째로 덮었다. 무수히 번식한 벌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전멸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검은 벽의 한곳이 무너지며 짙게 고여 있던 마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폭풍의 영향권엔 사결도 들어갔다.
“크윽.”
억지로 들춰진 마기가 스파크를 일으키며 번져가더니 서서히 옅어졌다. 할 일을 끝낸 사결이 얼음 수정 중 한 곳의 첨단에 누웠다. 그의 몸은 보랏빛으로 얼룩덜룩했다.
급성 마소 중독 증상이었다. 보기엔 심각해 보여도 크게 걱정할 건 아니었다. 마나가 마기를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니까.
멍든 것처럼 변한 손을 들어 본 그가 픽 하고 웃었다. 확률 높은 도박이긴 했지만, 도박은 도박이었다. 까딱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내성은 독무벌이 만든 마기의 안개를 상회했고 이렇게 살아남았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그가 팔을 옆으로 툭 떨어뜨렸다.
이번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다음에 또 막힌 부분을 만나면 그땐 이렇게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역시 더 깊은 수해로 나아가려면 귀환자가 필요하다.
“…….”
하지만 여원은 귀환자가 아니더라도 제게 필요했다.
필요해지고 말았다.
그걸 깨닫는 게 한발 늦었다. 딱 한발이었으나 여원을 놓쳤기에 너무 늦은 한발이었다.
오래지 않아 이현수를 필두로 한 크레딧의 헌터들이 나타났다.
경악한 그들의 머리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사결은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이 상황이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긴급 구호용 드론에 실려 돌아가는 사결의 몸을 진눈깨비가 감쌌다.
메마른 계절이 오고 있었다.
* * *
비공정 불시착 사건 이후 겨우 술렁거림이 잦아들었을 즈음 다시 한번 그리샤가 발칵 뒤집혔다.
포털사이트는 ‘미로’와 ‘사결’로 도배됐다. 작은 산에 필적할 크기의 거대한 얼음으로 독무벌을 일망타진하고 미로를 강제로 뚫어 수해 내부로의 새로운 진입로를 만들어냈다는 내용의 기사가 범람했다. 드론으로 찍은 사진에는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친 거대한 얼음 수정이 있었다.
주변을 날아다니는 개미만 한 헌터 때문에 그 거대함이 더욱 두드러졌다.
전문가들의 반응은 첨예하게 갈렸다.
이제껏 이렇게 강대하고 충만한 힘을 가진 헌터는 없었다. 그는 그리샤의 보물이자 나아가 온 인류의 보물이다!
이 새끼는 미친 새끼다. 블랙미스트 범위 전체를 얼려 게이트를 닫다니. 그게 가능한 지의 여부를 떠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거다. 짊어진 게 많은 사람이다. 이미 그의 목숨은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건 질타받아야 마땅할 행위다.
여론이 손을 들어준 건 전자였다. 안으로 들어갈 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검은 미로는 모든 그리샤 시민의 애간장을 끓였다. 소수의견으로 밀려난 후자는 적은 동조와 많은 까임을 얻었다.
사결은 급성 마소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헌터 전용 병원에 입원했다. 평소라면 후자가 까이는 걸 찾아보며 낄낄거렸을 그는 조용했다. 심해처럼 고요히 아직 불씨가 남은 재의 눈으로 그리샤의 도심지를 노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