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못 갑니다.”
여원은 말주변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직관적으로 전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차갑고 삭막한 화물칸에서 오래도록 정리한 생각이 그를 닮은 담담한 말투로 흘러나왔다.
“…어째서요.”
사결이 일그러진 낯으로 물었다. 어느새 꽉 쥔 손이 부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다.
그리샤가 멸망하던 날. 그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소중한 것이 수해에 삼켜졌다. 사결은 그날부터 눈먼 경주마가 되어 수해의 심부를 향했다.
험하고 더러운 일? 그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일? 그게 뭐 어떻다고.
그는 정말 앞만 봤다. 그리샤 전체를 이용해 그린 아주 거대한 그림이 슬슬 완성 단계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가지 마요.”
단 한순간.
찰나에 가까운 한순간이었지만 그는 수해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당신만이 날 구원해 줄 수 있어.”
그건 명백한 애원이었다.
사결이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내뱉은 말이라는 게 티가 났다. 그가 멍청이처럼 침묵했다. 평소엔 기름칠한 듯 잘만 굴러가던 혀가 뻣뻣해졌다.
여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거의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웃음에 잠깐 넋을 잃었던 사결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위험하니까 일단 거기서 떨어지세요.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전부 설명할 수 있으니까….”
“아뇨. 당신이 진심이라는 건 압니다. 처음엔 아니었지만, 지금은 나를 좋아하게 됐다는 것도.”
여원이 사결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듯 사결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입 모양과 혼잡한 소음의 틈새에서 찾은 목소리의 조각으로 의미를 유추했다.
“아마 나도 당신과 비슷할 겁니다.”
분명 거의 맞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어진 여원의 말에 확신이 사라졌다. 사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입까지 살짝 벌어졌다.
“그럼-!”
“하지만 삼초승달은 안 돼.”
여원은 빛나는 희망을 보여줬다가 또 금방 거두었다. 희망이 사라진 자리엔 짙은 절망이 차올랐다.
“다신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귀에 들리는 건 거친 바람 소리뿐이다. 그럼에도 사결은 음절 하나 놓치지 않고 완벽히 이해했다. 철판에 발자국이 남을 만큼 강하게 바닥을 박찬 그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비공정 밖의 허공으로 몸을 던진 여원이 사결의 발치에 작은 공허를 만들어 박았다. 손바닥만 한 검은 덩어리에 거침없던 발이 묶였다. 사결은 더 이상 쫓아가지 못했다. 이를 악문 사결이 손을 뻗었다.
얼음으로 할 수 있는 공격은 많았다. 뾰족하고 작은 수정을 총알처럼 쏘아댈 수도 있고 기다란 창을 만들어 꿰뚫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대상을 얼려버리는 간단한 방법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그것도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진 사람을 다치지 않게 붙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콰자작!
얼음이 소용돌이처럼 여원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뱀보다는 용에 가까운 형상이다. 그렇게 뻗어 나간 얼음은 풍압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 부서졌다. 산산조각이 난 덩어리가 흩어졌다. 여원은 의외의 조력이라 생각하며 얼음 조각을 밟아 떨어지는 속도를 줄였다.
쿠궁. 쿠구구.
얼음 조각이 산에 떨어지고.
“여원!!”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외침이 비공정과 함께 멀어졌다.
* * *
크레딧 소속 비공정이 불시착했다.
심지어 도시 밖도 아니고 격벽 안쪽의 산림지대였다. 비공정에 타고 있던 헌터들의 활약으로 착륙 자체는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사상자도 없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 속 짙은 회색빛 연기를 끌며 아래로 내려온 비공정은 ‘추락’ 그 자체였다.
외곽 주민들에 의해 신고가 전해졌다. 근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소방인력과 장비가 출동했다. 소식은 핫라인으로 전해졌다. 사색이 되어 크레딧 길드에 연락을 취한 시장은 해당 비공정에 길드장이 타고 있었다는 말을 듣곤 그대로 졸도했다.
“나도 졸도하고 싶다….”
그리고 그 모든 뒷수습은 크레딧의 부길드 마스터이자 사결의 비공식 따까리인 이현수의 몫이었다. 그리샤의 땅에 발 디딘 후, 대략 엿새의 시간을 뒷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잠을 거의 못 자는 건 기본이고 식사는 샌드위치 이외엔 먹지 못했다. 씻는 시간도 아끼느라 샤워는 나흘 만에 딱 한 번 했다. 그것도 5분 컷이다.
수습도 수습이지만 길드장의 안위에 대해 찔러보는 것도 문제다. 사결이 부상 하나 없이 건재하다고 공표했음에도 뒤에선 쉴 새 없는 연락이 날아들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탓이다. 길드장이 등장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가 괜찮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걸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것도 업무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이현수의 형상을 한 좀비가 만들어지는 동안, 사결은 반 실종상태였다. 왜 ‘반’이냐면 이 인간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연락은 받아서다. 처음엔 사태의 뒷수습이 싫어서 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결은 임야를 헤매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너무 잘 아는 이현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단말기를 거쳐 전해진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음울했다. 하나 그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별다를 것도 없다 여길 수준이었지만, 이현수는 아니었다.
사결의 목소리는 병충해로 메말라 부서지는 식물의 잎사귀 같은 느낌을 주었다. 행성의 공허에 몸을 던지는 늙은 잠수부 같기도 했다. 불길한 가정이 연달아 떠올랐다.
그럼에도 그는 차마 당장 돌아오라고 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이대로 연락을 끊고 어쩌면 다시 받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결국 이현수는 하고픈 모든 말들을 억누를 채 평소와 다름없는 척을 하며 잔소리를 했다. 본인은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으면서 사결에겐 제발 밥은 먹고 잠은 주무시라 애걸복걸했다.
사결은 그러겠다고 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나흘이 지났다.
청문회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현수는 밑져야 본전인 심정으로 사결에게 연락했다.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이번에도 불발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려는데.
[뭐냐.]
익숙한 목소리가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현수는 쌓인 많은 말들을 억누르고 미끼부터 던졌다.
[내일 모레가 청문회입니다.]
[…그래.]
대답은 그게 다였다.
다행히 사결은 청문회 전날 나타났다. 수염은 깎지 않아 지저분하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몸은 씻지 않아 꾀죄죄했다. 산적이나 다름없는 외향에 길드 프런트를 지키던 직원들이 경악했다.
이현수는 드물게 한숨 대신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를 얼른 안으로 들여보냈다. 두 시간이 넘게 씻고 나서야 사결은 모두가 알던 길드장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살이 빠졌는지 눈자위가 조금 퀭했다. 턱선도 전보다 날카로워졌다.
예전의 능글맞음과 여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지금의 그는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침부터 기자들이 길드 건물 앞에서 진을 쳤다. 사결은 옥상에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도시 중심부에 자리한 헌터 협회 건물까지 헬기로 이동할 셈이었다.
“드론 여분 있지? 가져와.”
“…10분 전에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 저희는 헬기로 이동할 겁니다.”
그런데 왜 드론을 내놓으래. 이현수가 불길한 마음에 되물었다. 사결이 내민 손을 까닥였다.
“알아. 닥치고 내놔.”
상사가 까라는 데 별수가 있나. 결국 그는 드론을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사결이 건네받은 큐브를 주머니에 넣음과 동시에 멀리서 헬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친 돌풍과 함께 착륙한 헬기는 필요한 사람을 싣자마자 다시 날아올랐다. 길드 건물 앞에 집결했던 사람들은 닭 쫓던 개가 됐다. 헌터 협회 건물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도 헬기를 보곤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저렇게 몰려들어서야 민간에 공개하지 않는 의미가 없지 않나?”
“말은 흘러나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도 딱히 상관없죠. 저희에게 나쁠 게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헤드셋을 던지듯 벗은 두 사람이 경호원들의 안내를 따라 이동했다. S급과 A 상급 헌터를 A급들이 경호하는 모양새였지만 익숙한 두 사람은 웃지 않았다.
최상층인 130층에서 두 칸 모자란 128층이 오늘의 청문회장이었다. 반원을 그리는 거대한 통유리 너머로 그리샤의 심장부가 내려다보이는 곳.
보통 청문회가 넓지만 밀폐된 곳이나 약식 법정에 의자를 잔뜩 가져다 놓고 진행되는 걸 생각해보면 이례적이라고 해도 좋은 호사다.
이것 참. 배려를 다 해주고.
비공정 사태 이후 기본적으로 저기압 상태라 비유적으로도 현상적으로도 주변에 서릿발을 날리는 사결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걸 본 몇몇이 흠칫해선 헛기침했다.
청문회장에는 사결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현수가 빠르게 면면들을 훑었다. 대형 길드는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출석했고, 중형 길드의 길드장도 몇 사람 보였다.
그리샤 재건 때부터 있었던 오래된 길드는 중형 길드라도 자리를 내어 준 모양이었다. 의외라면 헤스티아 길드장이었다. 어지간한 자리엔 부길드마스터를 내보내는 중년의 사내가 진짜 싫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웩, 하며 혀를 내민다.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평소 행실을 생각해보면 길드장보단 구시대의 폭력배 두목에 더 가깝긴 하다.
‘잔혹한 성정에 폭력적이고 충동적이지.’
사결에 대한 열등감은 덤이다. 하지만 적어도 멍청이는 아니었다. 이 자리에 나왔다는 건 이번 청문회의 진의를 안다는 뜻이었다.
다시금 내부의 면면을 훑어본 이현수가 가드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끼익.
청문회장의 문이 닫혔다. 바깥에 남은 그는 그제야 긴 숨을 내쉬었다. 청문회는 이제 시작이지만 그로선 커다란 짐 하나를 다 옮긴 기분이었다.
“대기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경호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현수는 걱정하지 않았다. 헤스티아 길드장이 무작정 돌진하는 투우라면 사결은 슬라임이었다. 찔러도 그냥 흐물거리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달려들어 질식사시키는 괴물.
물론 좋은 의미도 있다. 평소엔 한량이지만 필요할 땐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리더십 강한 길드장이 되니까.
‘제발 사고를 쳐도 수습 가능한 정도로 치길.’
그래서 그가 걱정하는 건 청문회가 아니었다. 슬라임이 가져간, 목적을 알 수 없는 드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