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6장. 불가해와 불가항력
분위기를 탔다.
그 일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여원이 힐긋 옆을 돌아봤다. 알몸으로 곤히 잠든 사내가 있었다. 어느새 창밖은 깜깜했다. 무채색 하늘 위로 쌀알 같은 별들이 떴다.
여원의 검은 눈동자에도 빛 부스러기가 옮겨왔다.
“…….”
그는 이 공간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고작 몇 시간 전 일인데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그 행위는 중간계로 돌아온 이후 마주한 무수한 의문 중에서도 단연 선두에 자리할 불가해였다.
* * *
“여원.”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간절했다. 안 그래도 힘이 들어가지 않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저항하지 않자 얼굴이 가까워졌다. 사결의 입술이 제 입술을 덮었다.
“…!”
영화관에서보다 깊고 오랜 입맞춤이었다. 호흡이 부족해지고 혀가 얼얼할 때까지 빨아대던 그가 이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옷을 벗겼다.
입술이 목덜미와 쇄골을 지나 우둘투둘한 상흔에서 멈췄다. 입술이 닿은 것까진 어떻게든 참았다. 하지만 혀가 상흔을 핥았을 땐 솔직히 도망치고 싶었는데,
“아프지 않습니까?”
그 한마디가 자신을 붙들었다.
아프지 않냐고? 생살을 뜯어낸 자국이다. 일을 저지를 땐 당연히 아팠다. 하지만 진정 아프고 괴로웠던 건 외려 이 자리가 멀쩡했던 때다.
종속의 계약을 새긴 후 지옥 같은 마왕성을 탈출하던 순간까지. 모든 날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아프냐고 물어본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걸 듣고서야 더는 아프지 않을 걸 알았다. 괜찮냐고 물으면 여전히 고민하겠지만 고통에 대해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상흔도 자신도 더는 아프지 않으며 오히려 암흑 같았던 삶 전체를 위로받은 기분이라고.
“혹시 아프면 말하세요. 말하기 싫으면 밀치세요. 그럼 바로 그만둘 테니까.”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모든 말이 다정했다. 온 신경이 자신에게 쏠린 게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 달군 돌이 들어앉은 것처럼 목이 갑갑하고 몸이 홧홧했다.
투우처럼 치받는 사내를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보듬어 안았다. 그때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그간 많이 외로웠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윽.”
서늘한 피부밑으로 맥박이 요동쳤다.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자신으로 인해 흥분한 숨소리가 자극적이었다. 그 모든 것이 경이롭고 기꺼웠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자신이 무엇을 말해도 사내가 들어주리란 걸. 생사여탈을 넘어선 어떤 것을 손에 쥔 기분이다.
관계를 갖는 내내 사결은 비굴했다. 자신이 실수로라도 밀어내면 당장 죽을 것처럼 굴었다. 나중엔 말과 몸이 따로 놀았다. 온갖 다디단 말들을 귀에 쏟아부으면서 행동은 점점 조급하고 여유가 없었다.
“여원. 날 봐요. 여길 좀 봐주세요.”
애원하는 거대한 몸에 짓눌린 채 열망하는 눈을 마주했다. 거기서 사내의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커튼 같은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고 이마와 눈이 훤히 드러났다. 미처 유지하지 못한 무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단단한 근육이 긴장으로 꿈틀거렸다. 평소에 하얗던 피부가 붉다. 완고하던 입술이 신음을 뱉었다.
자신이다.
그의 세상은 그 순간엔 정말 그런 형태를 띠고 있었다.
“하….”
옷을 입다 말고 여원이 입을 벌렸다. 몸을 가볍게 떨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 웃음은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종래엔 완전히 찌푸린 낯이 됐다.
“왜.”
세상모르고 잠든 사결을 돌아봤다.
“왜 하필 당신입니까.”
공허한 말은 그의 꿈속까지 닿지 못했다.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이 위를 향했다. 해의 흔적만 남아 분홍색과 쪽빛으로 변한 하늘. 그 아름다운 허공을 가로질러 흐트러진 머리칼에 닿았다.
건드려도 반응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도시 하나는 거뜬히 멸망시킬 수 있는 사람이 기절한 듯 잠에 취해 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원은 뻗어 나가려는 사고를 인위적으로 잘랐다.
대신 생각했다. 아버지의 죄에 아들은 책임이 없다.
하지만 아비의 죄를 이용해 그 피해자를 손에 넣으려 한다면, 과연 그 아들은 죄가 없다 할 수 있나.
그가 침대 위로 올라섰다. 체중을 싣지 않게 주의하며 사결의 위에 자리를 잡았다. 단단하고 마디진 손가락이 목을 감쌌다. 그리고 서서히 조이기 시작했다.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자 그다음은 물 흐르듯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그저 자신을 맡기기만 하면 됐다. 정말 죽일 셈이냐고 묻는다면 “글쎄”라고 하겠지만, 그런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갈 곳 잃은 증오가 지금도 갈비뼈 아래서 요동치고 있다.
“크…흑?”
압박감에 사결이 눈을 떴다. 괴롭게 일그러진 눈과 마주친 여원은 더 힘을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빼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굳었다.
사결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들기 직전 있었던 일들이 구식 필름처럼 뇌리를 스쳤다.
사결이 입을 벌렸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괴롭다는 감각 뒤에 비로소 여원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사결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여원의 옆으로 얼핏 보이는 창밖은 온통 어둠이다. 비공정에서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 외엔 달빛과 별빛뿐.
마지막으로 다시 여원에게로 시선을 둔 사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살고자 날뛰려는 본능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원한다면 이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쯤 그에겐 어렵지 않다. 팔목만 얼려 부서뜨려도 상황은 단숨에 뒤집힐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방법은 많다. 하지만 사결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걸 본 여원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해방된 사결이 기침을 토했을 때,
콰앙!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우르르 몰려 들어온 사내들이 여원을 사결에게서 떼어내 포박했다. 저항은 없었다. 사결이 쉰 목소리로 멈추라고 소리쳤다. 아니, 소리쳤다고 생각했을 뿐 그의 목에선 색색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젠장. 성대를 다쳤나?’
괜찮으냐고 사방에서 묻는 걸 뿌리친 사결이 맨발로 바닥을 디뎠다. 어디론가 끌려가는 여원을 쫓아 방을 나선 그는 몇 걸음 못 가 비틀거리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산소가 부족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길드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크루가 그런 사결을 부축했다. 소속은 비공정이지만 그 또한 엄연한 헌터였고, 전투 인원이었다. 사결이 그의 멱살을 잡아채며 윽박질렀다.
“어디로 데려갔지?!”
비록 끔찍하게 갈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왔다.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화물칸입니다. 헌터를 구속할만한 장비가 거기밖에 없거든요.”
태연히 걸어온 이현수가 반대쪽 팔을 부축했다. 사결이 눈을 부릅떴다.
“감압도, 온도조절도 되는 곳입니다. 객실만큼 쾌적하진 않겠습니다만 헌터인 이상 죽지는 않겠죠. 일단 옷부터 입으세요.”
“이현수!”
부축을 뿌리친 사결이 이번엔 이현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머리를 식히십시오. 방금 죽을 뻔했다는 자각은 있는 겁니까?”
이현수는 냉정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사결만큼이나 거세고 격렬했다.
“현장에서 사살하지 않은 것만 해도 저답지 않은 명령이었다는 걸 알아주시면 좋겠군요. 만약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하면 그땐 장담할 수 없습니다.”
“너 미쳤어?!”
“제정신입니다. 당신이야말로 미쳤습니까? 목이 졸리는데 뭘 답지 않게 가만히 있습니까.”
“…….”
“빨리 냉정을 찾으세요.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부터가 정상은 아니니까.”
사결은 그제야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봤다. 확실히 평소의 자신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목이 졸렸으면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대로 팔을 얼려 부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상대가 여원이라서다. 동요를 무표정 아래로 감춘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을 마주한 순간, 머릿속이 온통 그로 꽉 차버렸다.
“그렇군. 네 말이 맞다.”
이현수의 말에 틀린 건 없다. 귀환자가 아무리 귀해도 자기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다.
‘진짜 죽으려고 했어.’
사결은 뒤늦은 섬뜩함을 느꼈다. 조금 전 상황에 대한 게 반, 지금 자신이 느끼는 낯선 감정에 대한 게 나머지 반이었다. 사결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이현수가 부축했다. 이번엔 뿌리치지 않았다.
“이제 됐습니다. 길드장님은 내가 모실 테니 다들 현장으로 가 보세요.”
“아, 알겠습니다.”
크루 입장에선 까마득하게 높으신 두 분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새우처럼 끼어있던 헌터가 반색하며 뛰어갔다.
사결은 방으로 돌아가 옷부터 입었다. 사람 꼴이 되어 다시 밖으로 나온 그가 멍이 든 게 분명한 목을 매만졌다.
“선인장이 된 것 같군.”
정확히는 메말라 죽어가는 선인장이 된 것 같다. 다른 식물들과 달리 평생 갈급해 본 적도, 아쉬워해 본 적도 없는 물 한 방울에 생사가 걸린 기분. 가장 큰 문제는 물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자신을 죽이려다 미수에 그치고 화물칸에 끌려갔다는 거다.
“…정신 놓지 마세요.”
이현수가 드물게 진심으로 걱정했다. 사결은 연신 피식거렸다.
“정신 차리라고 방금 말했습니다. 아예 넋을 놓아버리시면 어떡합니까.”
“난 지금 냉정하니까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퍽이나 그러시겠네요.”
이 인간이 결국 정신을 놨구나. 그는 한탄과 함께 확신을 얻었다. 하긴 제정신이라면 귀환자고 나발이고 자기 목을 조른 상대를 그냥 뒀을 리 없다.
그 사이 두 사람의 발은 어느새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보안실이었다. 이현수의 부축에서 벗어나 바로 선 사결이 반쯤 뛰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눈이 무수한 모니터 가운데 화물칸의 화면을 바로 찾아냈다.
여원은 헌터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갑을 찬 채 짐승처럼 철벽에 묶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