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이쪽입니다. 난간 잡고 오시고 여기 지나면 턱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
“비공정이 처음이시면 통과할 때 조금 어지러울 수도 있어요. 약을 미리 먹어두는 걸 추천합니다. 먹는 것도 있고 패치도 있으니 선호하는 걸로 말해주세요.”
“…….”
저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이현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사결을 봤다. 아주 염병 천병을 떤다는 표정이었다.
“위험해요!”
사결이 여원을 확 당겼다. 얼결에 뒤로 물러난 귀환자의 등이 단단한 가슴팍에 닿았다. 무감한 눈이 의문을 표하자 사결이 안도하며 벽면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뾰족한 쇠였다. 자세히 보니 오래되어 튀어나온 부품이다.
“큰일 날 뻔했네요. 다쳤으면 제 마음이 더 아팠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결은 품에 들어온 여원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갑작스레 봉변을 당한 여원의 낯이 더욱 딱딱해졌다.
“이거 놓으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사결을 거칠게 밀쳤다. 사결은 세상 상처받은 표정으로 물러났지만, 또 완전히 멀어지진 않았다. 정확히는 주인한테 밀쳐진 강아지처럼 여원의 옆에 붙어 섰다.
‘환장… 아니 지랄….’
이현수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크루들이 일제히 어깨를 튕겨 올렸다. 뒷줄은 벌써부터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중이다.
‘저 입에서 무슨 소리가 퍼져 나갈지.’
그는 피지도 않는 담배가 당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결은 온 신경을 여원에게 집중했다. 여원이 거칠게 품을 빠져나오자 바로 기가 죽은 그는 머뭇거리며 여원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그 모습이 마치 비 맞고 처량한 비단뱀 한 마리처럼 보였다.
그렇게 느낀 건 여원만이 아니었다.
크루들은 눈을 의심했다. 지금 저기서 온갖 불쌍한 척은 다 하는 인간이 진짜 길드장인가?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엄이 줄줄 넘쳤던 그 사결이 맞나?
그러던 와중 뭔가 발견한 사결이 속상한 표정이 됐다. 그가 시무룩해서 여원의 손목을 조물거렸다.
“수건을 한 번 둘렀는데도 자국이 남았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세게 묶었죠? 구속하는데 얼음을 쓰는 게 아니었는데… 혹시 걷기 불편하진 않습니까?”
“…….”
이현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부정하기엔 이미 늦었다. 크루들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파래졌다가 하얘지는 안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 *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비공정의 크루가 굽신거리며 여원을 안내했다. 그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보던 이현수가 한숨을 삼켰다. 저건 사결이 입구에서 그 지랄을 떨었을 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런 건 입막음도 안 돼.’
그리샤에 소문이 어떻게 날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위가 아팠다. 사결은 길드 비공정에 누가 타도 저런 말은 쓰지 않았다. 협회장이 타면 ‘무임승차입니까?’라고 하고, 다른 대형길드 간부가 타면 ‘뭐야. 꺼져.’라고 하는 인간이었다.
“여기가 머무실 객실입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면 머리맡의 호출 벨을 누르거나 선내 전화를 이용해 주십시오!”
비공정의 크루들은 무뚝뚝하고 말 한마디 없는 사내를 상대로 쩔쩔맸다.
인위적이지만 어쨌든 활짝 웃는 그들과 뒷 세계의 조직 보스처럼 그늘진 분위기를 가진 사내의 조합은 블랙코미디에 가까웠다.
선수로 가기 직전에 있는 보안실. 선내 내부 감시 카메라와 연결된 모니터 앞에 사결과 이현수가 있었다. 4분할 모니터엔 방을 둘러보는 여원의 모습이 비쳤다.
거긴 본래 사결의 전용 객실이었다. 여느 호텔 스위트룸 못지않은 내부는 아늑하고 화려했다.
특히 벽면 하나를 차지한 통유리는 환상적이었다. 까마득하게 작아진 지상, 바로 옆을 흘러가는 구름, 가끔 무리 지어 날아가는 F급 새 마물까지. 누구나 눈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풍경이다.
그건 여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표정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그리고 사결은 그런 여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수가 싸늘하게 식은 낯으로 물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뭐가.”
“제가 마지막으로 본 게 귀환자를 기절시켜 납치하려던 장면이었는데요. 솔직히 백담이랑 그리샤를 오가며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데, 저도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간의 한을 담아 쏘아붙이는 진심 어린 말에는 아무리 사결이라도 살짝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뭐였는지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일이 잘 풀렸는데 왜 자꾸 추궁이야. 게다가 직전까지 같이 있었으면서 뭔. 그럴 거면 내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말리지 그랬냐.”
“어? 여기 뭐가 떨어졌네요.”
이현수가 앞코로 사결의 발치를 툭툭 두드렸다.
“어이.”
“…….”
“어이가 없네. 진짜. 아니, 솔직히 그때 안 보냈으면 주재영인가 하는 새끼 죽였을 거잖아요.”
부정하지 못한 사결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한숨을 쉰 이현수가 손을 내밀었다.
“주사기나 주세요. 안 썼으면 남았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이현수는 긴박했던 한 시간 전 상황을 떠올렸다. 갑자기 방 안이 소리 없이 조용해져 그는 사결이 주사기를 쓴 줄만 알았다.
이제 자신을 부르려나. 저 남자 많이 무겁겠지. 빌어먹을 고용주는 힘도 훨씬 세면서 분명 나한테 짊어지라고 할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며 꿍얼거리고 있는데 사결이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뭐에 홀린 표정이었다. 이현수는 그때까지만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평생 갚아야 할 빚의 무게를 조금 덜어내려는 마음 반, 함께 해 온 시절의 의리 반으로 한 번은 말렸지만 그도 실은 알고 있었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선까지 와 버린 후라는 걸.
누구보다 일을 온건하게 처리하고 싶었던 건 다름 아닌 사결이었다. 이현수는 입맛이 썼다. 그의 뒤를 멀쩡히 뒤따르는 여원을 보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그는 근래 들어 가장 크게 경악했다. 다시 생각해도 충격적인 장면에 고개를 저은 이현수가 재촉하듯 손을 흔들었다. 사결이 무심히 말했다.
“깨졌다.”
“뭐가요.”
“뭐긴 뭐야 주사기지.”
눈을 깜박였다. 뒤늦게 이해한 이현수가 경악했다.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오늘 여러 사람 상대로 찔릴 짓을 한 사결은 이번에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S급한테까지 통하는 약은 돈 준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수량 자체가 잘 없단 말입니다. 청왕까지 가서 겨우 구해 온 걸…!”
“네 돈도 아니고 내 돈으로 사 왔잖아.”
“길드 돈으로 사 왔습니다!”
“그러니까 내 돈이지.”
“…….”
익숙하게 포기한 이현수가 지끈거리는 골머리를 부여잡았다.
“일은 잘 풀린 겁니까?”
“모르겠다.”
“그 상황에서 설득하셨잖습니까. 그것만 해도 솔직히 대단한 건 맞죠.”
이건 진심이다. 말아먹다 못해 살얼음판이던 분위기에서 합의를 이루어 내다니. 그것도 성격파탄자의 대표 격인 우리 사장님이!
“그보다 대체 그건 무슨 상황이었던 겁니까? 설마 다짜고짜 문 부수고 들어가서 겁박하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정확히 그런 짓을 했던 사결이 입을 다물었다. 눈치로는 그리샤 제일인 이현수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카나리아니 뭐니 하더니 그걸 못 참고.”
“반성하고 있으니까 그만하지?”
“반성은 무슨. 사장님이 그런 걸 할 사람이었으면….”
타박하던 이현수는 풀 죽은 사결을 보고 기겁해 말을 늘였다.
‘뭐야. 왜 저래.’
당황스럽다 못해 소름이 돋았다. 아니 이 인간이 이럴 인간이 아닌데? 이다음엔 당연히 “우리 현수 요즘 퇴사하고 싶나 봐?”라거나 “우리 현수 오늘따라 혓바닥이 기네. 잘라줘?”라고 해야 하는데.
“알고 있었어.”
“예?”
“내가 귀환자를 노리고 접근했다는 걸 그가 알고 있었다고.”
“…….”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대략 10초가 필요했다.
“잠, 잠깐만요. 그런데도 순순히 따라온 겁니까?”
“그래.”
대답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20년 가까이 함께한 이현수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10년 치 놀랄 걸 오늘 다 놀라는 것 같다.
“대체 어떻게…?”
“모르겠다.”
으지직.
사결의 손가락이 철로 만든 의자의 등받이를 파고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르겠어.”
이현수는 한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여원과 갈라져 모니터룸으로 이동한 후, 사결의 시선은 단 한 번도 모니터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