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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를 잡는 방법 (39)화 (39/106)

39화

잠깐 생각하다 몸에서 힘을 풀었다. 내가 바닥에 축 늘어지자 그도 더는 힘을 주지 않았다. 대신 옆에 떨어져 있던 수건을 주워 두 조각으로 찢었다.

‘뭐지. 힘자랑인가. 그건 방금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굳이?’

사결은 두 조각난 수건을 하나씩 내 손목에 넓게 감싸 동여맸다. 잘 묶였는지 확인도 했다.

“…?”

사아아.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 지켜보는데 손목에 하얀 서리가 모여들었다. 수건으로 감싼 손목 위로 두꺼운 얼음 족쇄가 만들어졌다. 농도 짙은 마나가 느껴졌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부서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허벅지는 바닥에 붙고 손목도 머리 위로 고정됐다. 수건의 목적은 동상 방지였다. 이쪽에도 공간이 있긴 하지만 혹시 차가울까 싶어 둘러준 거다.

얼음으로 하는 고문이라면 이골이 났다. 솔직히 그걸로 당할 수 있는 짓은 다 당해본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괜찮다는 뜻은 아니다. 얼음은 지금도 신물이 났다.

그런데 고작 수건 한 겹.

얇은 천 쪼가리 한 장이 덧대졌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아무렇지 않아졌다. 전혀 차갑지도 아프지도 않다.

혼란스러운 건 나만이 아니었다. 사결이 여태 본 적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대체 왜 가만히 있는 겁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러게. 왜일까. 당신 말마따나,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대답 없이 보기만 하자 손목에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목덜미를 거칠게 당겼다. 쐐기 같은 시선이 꽂혔다. 주재영이 입을 댔던 자리였다.

안 봐도 뻔했다. 새겨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붉은 잇자국이 피부에 선명하겠지.

“…그 새끼랑 잤습니까?”

“아직은.”

아직 아니지만 그러려고 했다. 숨겨진 뒷말을 못 알아들을 만큼 눈치 없는 사내는 아니었다.

콰직.

얼굴 옆의 바닥이 푹 파였다. 나는 꿈쩍하지 않았다. 내가 마계에서 겪었던 일에 비하면 지금 당하는 짓은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불시에 고개를 숙였다.

“윽.”

차가운 이가 몇 번 자리를 바꾸어 목덜미를 잘근거렸다. 고통은 미약했다. 그보다 생소한 감각이 등허리를 오르내렸다. 고정된 몸에 힘이 들어가며 어깨가 굳었다.

입술이 부드러운 살갗을 빨아올리고 이가 그 아래 단단한 근육을 잘근거렸다. 지금 입에 물린 부분이 성감대라도 된 것처럼 허리 밑은 단숨에 뻐근해졌다.

카드득.

손가락이 바닥을 긁었다. 낡은 장판이 저항 없이 패였다. 사결은 한참을 공들여 물고 빤 후에야 떨어졌다.

“돈 때문입니까?”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 빚이라도 있는 겁니까?”

나는 실소했다. 빚이라고 한다면 빚일 것이다.

그것도 영혼이 걸린 아주 막대한 채무였다. 허망하게 웃는데 앞이 조용했다. 고개를 들자 사결이 홀린 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내 입가에 머물러 있었다. 그때 알았다. 그의 앞에서 웃은 게 지금이 처음이라는 걸.

“없다는 거. 이미 알고 있잖습니까?”

살짝 비꼬는 말이었다. 많은 것이 함의된 말이기도 했다.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뭔가 알았구나, 표정이 생각을 대변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필요하면 제게 말하세요. 1,540만이 아니라 1억 5천만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

사아아.

침묵이 길어지자 떠돌던 얼음 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공기가 얼어붙고 옷 위로 서리가 내렸다. 사결의 손에도 찬기가 모였다.

“왜.”

내뻗던 손이 멈칫하더니 허공에서 멈췄다. 감정의 동요는 힘의 발현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어되지 않는 손으로 날 잡을 순 없었는지 사결이 주먹 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왜 내 돈은 안 되고 그 새끼 돈은 되는데.”

눈에서 살기가 넘실거리는데 이상하게도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울까 봐 공간도 만들어주고 수건까지 둘러준 사람이 저렇게 말해봤자지.

사결은 포기하지 않고 닦달했다.

“그보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역시 도청?”

“피차일반 아닙니까.”

일그러진 그의 표정이 답을 대신했다.

“엿들은 건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이렇게 말을 잘했던가. 분노를 원동력 삼아서인지 말이 아주 술술 나왔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 인간이 상대일 땐 항상 그랬던 것 같은데.’

왜 그런지 몰랐지만 그냥 넘어갔다. 이 인간이 얽혀서 생긴 의문이 어디 한 둘이던가. 그보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귀환자. 당신은 그게 필요했던 것뿐이죠.”

내가 아니라.

마저 나오려던 뒷말이 목에 걸렸다.

사결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모양새가 들끓는 감정을 삭이는 모양새다. 한층 냉정한 표정이 된 그가 말했다.

“정말 다 아는군.”

“…….”

“그래서 결국 나와 같이 갈 생각은 없다. 그런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사결은 더 묻지 않고 단말기를 켰다. 연락한 상대는 이현수였다. 곧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계단을 뛰어 내려온 사내가 문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으로 넘어진 철문과 방 안의 상황을 목도한 그의 안색이 하얗게 떴다.

“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내놔.”

그러거나 말거나 사결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현수는 제 고용주가 뭘 요구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아. 빌어먹을.

“진심이십니까?”

“내놓으라고 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사결이 손끝을 까닥였다. 안 내놓으면 무력으로라도 가져가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갈등하던 사내가 품에서 작은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여원은 바로 알아봤다. 저건 주사기 케이스다.

아버지를 잃고 백담 헌터 협회 관계자들에게 인계됐을 때 그들이 자신에게 썼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그땐 은색이었고 지금 건 검은색이지만….’ 

“조금만 쓰셔야 합니다. 조금만! 효과가 강력해서 일단 맞으면 S급도 반나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물건이라고요.”

“나도 알아.”

“알긴 뭘 알아. 눈탱이가 맛이 갔는-”

“이현수.”

“…….”

사결이 손을 까닥였다. 나와 사결을 번갈아 힐긋거린 이현수가 앓는 소리를 내며 케이스를 내밀었다.

“확신하십니까.”

케이스 반대편을 꽉 움켜쥔 그가 물었다.

“지금 선택을 후회 안 할 자신이 있으시냔 말입니다.”

사결은 대답 없이 강탈하듯 케이스를 가져갔다. 안에서 나온 건 역시나 주사기였다. 과거엔 못 봤던 주사기 안의 내용물도 볼 수 있었다. 안에 든 액체는 연푸른색이었고 정체불명의 빛 입자가 떠다녔다.

‘예쁘네.’

담담하게 생각하는 사이 사결이 내 팔에 바늘을 들이밀었다.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체념하고 늘어져 있는데 살가죽을 찌른 바늘이 더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내 눈을 보던 사결이 중얼거렸다.

“빌어먹게 예쁘고 아득하네.”

“?”

주사기 얘긴가?

사결은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상했다. 차갑던 표정이 어느새 절벽 끄트머리에 선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 말 있잖습니까. 인생을 살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는 말. 하루에 열두 번씩 하는 커피를 마실지 술을 마실지 고민하는 자질구레한 선택 말고, 한 길을 선택하면 죽을 때까지 다른 길은 갈 수 없는 그런 갈림길 말입니다.”

주사기를 잡지 않은 손이 위로 올라와 내 턱을 쥐었다.

“제가 지금 거기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손길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하도 조심스러워서 섣불리 만졌다간 뭉개지는 꽃이 된 기분이었다. 뭐, 이런 상황에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런 건 딱 질색인데 말이죠.”

혼잣말 같지 않은 혼잣말에서 희미한 후회가 전해졌다. 나는 모르는 과거의 편린이었다. 고개를 틀어 옆을 보니 이현수의 낯빛이 어둑해져 있었다.

“이현수. 나가.”

이현수는 순순히 따랐다. 인기척이 계단을 따라 멀어지자 사결이 주사기를 내던졌다. 벽에 부딪힌 주사기는 허망하리만치 쉽게 깨졌다.

허벅지와 손목을 구속하고 있던 얼음도 산산이 부서졌다. 얼떨떨하게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사결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른다. 거기까진 듣지 못했으니까.

다만 단순한 명예욕이나 금전을 노리고 수해의 심부에 들어가고자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 걸 이유로 대기에 그는 너무 깊고 어두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결은 결국 원하던 걸 강제로 취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순순히 당해주는 척 그를 역이용하려던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이었다.

그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세상 불쌍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매번 나른하게 웃거나 낄낄거리며 마물을 맨손으로 잡던 사내가 약한 표정을 짓자 그 효과는 배가 됐다. 속이 아까보다 훨씬 불편해졌다.

“한 번만.”

언제나 당당했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조심스럽게 내 옷자락을 쥔 손은 그보다 더 크게 떨리고 있었다.

“제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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