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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를 잡는 방법 (36)화 (36/106)

36화

주재영의 걸음도 따라 멈췄다. 여원이 물끄러미 청년을 봤다. 그보다 몇 센티 키가 크고 몸이 좋고 남회색의 맞춤 양복이 잘 어울렸으며-

‘지금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걸 줄 수 있는 사람.’

원래는 아니었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여원은 흐릿하게 떠오르는 어떤 사내의 잔재를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며 주재영을 응시했다.

“왜 멈췄어요? 아, 혹시 집에 커피 없어요? 그럼 내가 사줄게요. 믹스가 좋아요, 원두가 좋아요?”

여원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주재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치 빠르게 그는 여원이 평소와 다른 걸 알아차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쉽사리 내뱉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다는 것.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고민했지만 결국 하지 못할 만큼 여원에게 있어선 굉장히 중요하고 간절한 말이라는 것도.

이것 참. 이렇게 나오면 참기 힘들어지는데.

주재영은 습관처럼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형,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요. 나 그만 만나겠다는 말만 아니면 다 들어줄게요.”

“네가.”

일단 말문을 열자 그 뒷말이 자연히 따라 나왔다.

“날 사줬으면 해.”

무거운 추에 달려 끌려 나온 내장 같다. 여원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그 말을 역하게 느꼈다.

“예?”

마주 선 주재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놀란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요.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

“하하…. 와, 아니 이건 진짜.”

주재영이 여원의 팔을 쥐었다. 조금 주춤거리면서도 피하지 않는다. 그 반응에 주재영은 방금 자신이 들은 게 환청이 아닌 걸 실감했다. 그의 입이 귀에 걸렸다.

“미친 씨발! 아, 오해 마세요.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전 오히려 이쪽이 더 취향이에요. 그래도 역시 놀랍긴 하네요! 형은 그럴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사람 보는 눈은 뛰어나다고 자부했는데 앞으론 좀 겸손해져야겠어요, 농담처럼 실실거리는 말에도 여원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한 주제에 여전히 금욕적이고 단정한 얼굴이다. 그래서 더 꼴렸다.

가면을 벗어던진 주재영이 비릿하게 웃었다.

“얼마를 원하는데요?”

“1,540만 크레딧.”

“음? 별로 비싼 것도 아닌데 꽤나 구체적이네요?”

여원은 침묵했다. 주재영이 흠, 하고 말했다.

“뭐 상관없죠. 형이 그 돈을 어디 쓸 건지는 관심 없어요. 내가 관심 있는 건 이 얼굴과-”

뺨을 쥐고 있던 주재영의 손이 위로 올라와 여원의 앞머리를 걷었다. 여원은 움찔했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주재영이 픽 웃었다.

“-몸뚱어리거든.”

그가 벼락같이 여원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하얗게 드러난 이가 단단한 목덜미를 깨물었다. 다른 손은 심장 부근의 가슴팍을 농밀하게 더듬었다.

“?!”

여원이 주재영을 세게 밀치며 뒤로 물러났다. 역시 귀엽네. 만족스럽게 웃은 주재영은 경계하는 짐승에게 하듯 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방금의 반응만으로 그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원해서 저런 말을 한 건 아니라는 것. 주재영의 입장에선 푼돈이나 다름없는 1,540만 크레딧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

그 두 가지가 낼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결박된 채 여원이 제 발등에 뺨을 비볐다.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강인한 몸이 싱싱하게 펄떡인다. 거친 숨을 몰아쉬느라 흉근이 오르내리고 배의 근육이 꽉 조였다 풀리길 반복했다.

거기에 고통을 견디려 살짝 찌푸려진 미간과 어떻게든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단정한 얼굴까지.

주재영의 아랫도리가 부풀었다. 상상 속에선 이미 갈 데까지 간 그가 배부른 짐승처럼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때 병실에서 살짝 보긴 했는데, 정말로 한쪽 유두가 없네요.”

“…….”

“그래서 더 기대돼요.”

두 달이나 주변을 맴돌아도 여지를 주지 않던 물고기였다. 어떻게 낚아야 할지 미끼를 거는 단계부터 애를 먹이던 녀석이 이상하게 요 며칠 순순하더니 갑자기 제 발로 어항에 들어왔다.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나 마음에 걸리는 점은 몇 가지 있었지만, 주재영은 쿨하게 넘겼다. 일단 들어온 이상 도망칠 방도는 없다. 물러나봤자 어항의 반대편이다.

“일정은 제가 편한 날로 잡아도 되겠죠?”

“…빠를수록 좋아.”

여원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주재영이 재차 소리 내어 웃었다.

“돈은 어떻게 드릴까요.”

“전액 현금으로. 날 만나는 날 가지고 와 줬으면 좋겠다.”

“좋아요. 그럼 연락드릴게요.”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주재영이 말했다.

“아, 그 전에 잠깐.”

여원의 손목을 쥔 그가 옆의 좁은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다. 고작 몇 걸음 만에 명도와 채도가 바뀌었다. 한낮에도 햇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건물과 그 건물 사이 틈새, 피치 못하여 존재하는 듯한 공간.

잡힌 팔에 힘이 들어갔다. 주재영이 그런 여원을 벽에 밀치며 앞을 가로막았다.

“선금 정도는 주시죠. 다음에 볼 땐 1,540만 크레딧을 현찰로 받게 되실 텐데.”

“…….”

“형, 그 돈 받고 나랑 한 번 자면 두 번 다신 안 볼 생각이잖아요.”

정곡을 찔렀다. 이런 쪽으론 잔뼈가 굵다 못해 사골이 된 주재영은 확신했다.

눈앞의 사내는 이런 일이 처음이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성 경험도 없는 사내가 같은 사내에게 몸을 팔아야 할 만큼 돈이 급하고 절실했을 뿐이다.

‘미친 거 아냐?’

무슨 걸어 다니는 페로몬이냐고. 주재영의 숨이 거칠어졌다. 사내는 그가 바라는 이상 그 자체였다. 주재영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긁어모아 사람의 형상으로 빚으면, 아마 그와 같을 것이다.

그런 사내를 손에 넣기 위해선 얼마든지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은 그게 너무 힘들었다.

한 입만 먹을까.

많이도 말고 맛만 보는 정도라면.

주재영이 이번엔 숨기지 않고 입맛을 다셨다.

삑삑.

여원의 단말기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여원의 눈이 흔들리는 걸 주재영은 놓치지 않았다.

그가 손바닥을 들어 단말기를 덮었다. 연락을 종료하는 범용 모션이었다. 잠깐 잠잠해졌던 단말기가 다시 삑삑거렸다. 방금과 같은 번호였다.

“형, 단말기 빼서 주머니에 넣어요.”

주재영이 말했다. 명령조였다. 망설이던 여원은 시키는 대로 했다. 삑삑거리는 소리가 둔해졌다. 만족스럽게 웃은 그가 고개를 숙였다. 굳은 여원의 귓불을 잘근 깨문 그가 속삭였다.

“난 손대지 않을 테니까 직접 상의 들어 올려서 나한테 보여줘요. 그게 형이 내게 주는 계약금이에요.”

잠깐 갈등하던 여원이 스스로 옷자락을 쥐었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다.

속은 달랐다. 평소처럼 감정이 평온하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다. 거리가 가까워서일까. 응시하는 시선이 역겨웠다. 사결. 그 사내는 혀를 섞었는데도 싫지 않았는데.

꾹.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이상한 데서 그를 떠올린 여원이 입술을 씹었다. 그 반응에 주재영만 더욱 신이 났다.

‘차라리 빨리하고 끝내자.’

하지만 옷자락을 쥔 손가락은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여름이었다면 분명 쉽게 까 올렸을 옷자락이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결국 아주 느리게 상의를 쇄골까지 올렸다. 긴장으로 꿈틀거리는 복근과 도드라진 흉근이 찬 공기에 드러났다.

주재영은 갈등했다. 그냥 운전사 시켜서 돈 가져오라고 하고 이대로 넘어트릴까? 일생일대의 고민이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동네도 마음에 들지 않고 골목은 더더욱 별로다. 고대하던 음식을 이렇게 즐기는 건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몇 달을 고대한 몸이다. 야외라곤 해도 이런 더러운 장소에서, 그것도 단순히 뒷구멍만 쑤시는 걸로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가치 있는 것에는 그만한 공을 들여야 하는 법.

“주문 제작해 둔 링을 하나밖에 못 쓴다는 건 아쉽지만… 뭐, 다른 곳에라도 달면 되니까요. 저번엔 얼핏 봐서 몰랐는데 문신도 있었군요.”

여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로서는 드문 동요였다. 하지만 온 정신이 두툼한 가슴팍에 쏠린 주재영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원이 옷을 잡아 내린 후에도 그의 시선은 가슴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흔적만 남긴 했는데 그래서 더 섹시해요.”

“…….”

“약속은 약속이니 오늘은 이만 갈게요. 대신 다음에 만날 땐 2천 크레딧을 가져오죠. 한 번만 자겠다면 그것도 상관없어요.”

거짓말이다. 미쳤다고 이런 취향인 몸을 한 번만 갖겠나.

섹스 동영상을 촬영해 협박해도 되고, 약을 써도 되고, 아무튼 질릴 때까지 가지고 놀 방법이야 많았다. 이건 그냥 탐스러운 먹잇감을 최상의 상태로 먹기 위한 숙성작업이다.

“연락할게요. 형.”

아직도 삑삑거리는 단말기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뿐이다. 자신에게 저런 말을 했다는 건 크레딧 길드장과도 끝났다고 봐야 했다. 아쉽긴 하다. 사귈 때 먹었으면 더 짜릿했을 텐데. 뭐, 뒤끝이 없다는 장점도 있으니까.

골목을 나선 주재영이 운전사에게 연락했다.

“접니다. 아까 거기로 오세요.”

오래지 않아 세단이 미끄러지듯 와 섰다. 여원은 골목을 나와 이미 자기 집으로 들어간 후였다. 그 자리를 유심히 보던 그는 미련을 버리고 차문을 열었다.

퍽!

“윽?!”

그런데 손잡이에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두 사람이 내렸다.

“…어?”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주재영의 안면에 주먹이 꽂혔다.

“꺽!”

밟힌 개구리 같은 소리를 낸 그가 땅을 굴렀다. 폭력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살벌한 소리가 골목을 메웠다. 사결은 주재영을 지근지근 밟았다. 치명상이 되지 않을 곳만 정확히 노려 힘 조절까지 했다.

그래서 주재영은 마물을 터트려 죽일 수 있는 다리에 열 번이나 밟히고도 저항할 수 있었다.

쿠웅.

주변의 중력이 변했다. 사결과 이현수는 거인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을 앞으로 뻗은 주재영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부어터진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당신… 쿨럭, 미쳤어?!”

사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무시당한 주재영이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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