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여.”
평균연령 54.5세의 수뇌부들이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으으… 사결… 이 막돼먹은 새….”
퍽!
파들거리며 겨우 다시 눈을 떴던 헤스티아 부길마가 사결의 발길질 한 방에 다시 눈을 감았다.
“이 새끼는 정신 차리는 타이밍도 눈치가 없어.”
“…….”
침이라도 뱉을 기세로 미간을 찌푸린 사결이 좌중을 둘러보며 웃었다.
“다들 앉으시죠. 왜 그러고 계십니까.”
너 때문에. 새끼야. 너 때문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커흐흠.”
“어흠.”
사람들은 기침을 하며 날아간 의자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이현수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크레딧 길드는 토벌에서 빠지겠습니다.”
부길마를 두들겨 팰 때까지도 지켜보기만 하던 이들이 웅성거리며 크게 동요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며 언성을 높이는 이도 있었다.
헤스티아를 빼는 게 아니라 크레딧이 빠지겠다는 것. 그건 토벌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 말은 그리샤를 버리겠다는 겁니까?”
한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 굳은 어조로 물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사결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직접 언급하진 않지만 적어도 알 사람은 알지 않습니까. 다 망해가던 그리샤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웅성거림이 멎었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리샤의 1위 길드는 크레딧이지만, 20년 전엔 아니었다. 그땐 삼초승달이라는 초거대 길드가 도시의 전반을 지배했다.
게이트의 독점, 높은 게이트 이용료와 마정석을 처분했을 때의 수수료, 비공정의 입출항을 위한 포탑의 관리권까지. 본래 협회가 해야 했을 일을 대신하고 수입도 가로챘다. 그럼에도 뭐라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시민들 사이에선 그리샤의 삼초승달이라고 해야 할지, 삼초승달의 그리샤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삼초승달 소속이 아닌 헌터 및 길드들은 웃을 수 없었다. 당시 대형 길드조차 삼초승달에 비하면 호랑이와 들개 수준으로 체급 차가 났다.
그런 삼초승달을 통째로 갈아 수해 토벌의 기반을 마련한 게 당시 일곱 살이던 사결이었다.
“그리샤를 재건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수해의 토벌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소년이 회의장에서 말했다.
“세운 게 저니 원한다면 버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도 어른이었던 참석자들은 똥 씹은 표정이 됐다.
‘빌어먹을. 어릴 적이랑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이군.’
‘저 괴물의 후견인이 되려고 했다니.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지.’
왕이 된 소년은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한 행보를 보였다. 그는 모든 후견인을 거절했고 허튼 수를 부리는 자들은 철저히 짓밟았다. 그리고 제게 남겨진 모든 인력과 재화, 정보를 갈아 그리샤의 재건에 힘썼다.
비웃음은 소리 없이 잦아들었다. 조금 더 지나자 도시 전체가 사결의 이름을 연호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리샤는 서서히 옛 영광을 되찾았다. 사결은 기다렸다는 듯 껍데기만 남은 삼초승달을 미련 없이 해체하고, 무자본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길드를 창설했다.
그게 바로 크레딧 길드다.
세상에서 믿을 건 돈뿐. 현금과 같은 신뢰를 보여주겠다는 포부였다. 애송이나 할 소리다. 그럼에도 이번엔 누구 하나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크레딧 길드는 밑바닥부터 치고 올라와 정상에 섰다. 신생 길드라고 무시하는 자는 없었다. 수해 토벌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제 가장자리 숲은 색이 완전히 돌아왔다. 청량한 연녹색. 중간계의 색이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생각했다. 사결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저 사람이라면 될지도 몰라.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리샤에서 사결의 지지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런 사결이 토벌대장 자리를 사퇴하고 토벌대원들 간의 불화를 언급하면 그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엄청날 것이다. 어쩌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사결은 확실히 경고한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잊지 마십시오. 이번 토벌의 총책임자이자 최종명령권자는 접니다.”
그는 군주였다. 나머지는 그가 쓰는 체스 말에 지나지 않았다.
헤스티아를 지지하진 않았지만 내심 불만을 품고 있던 몇몇 길드가 찔끔했다.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 이런 일에선 허언을 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지금 협박하는 겁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협박 맞다는 대답이 돌아올 테니까.
사결은 진심이었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토벌에서 빠지고 크레딧 길드 하나만으로 개별공략을 할 생각이다. 전엔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귀환자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크레딧 길드의 저력은 바닥부터 직접 키운 그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일단 진정하십시오. 크레딧 길드장.”
“다들 초조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요. 벌써 한 달째 미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눈치를 보던 길드장들이 일제히 손을 내둘렀다. 아들뻘밖에 안 될 사결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퍽 처량하다.
“한 달.”
사결이 당당히 선언했다.
“그 안에 크레딧 길드에서 책임지고 통로를 뚫어 보이죠. 그러니 미로의 벽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마십시오.”
“.......”
회의가 끝났다. 만신창이가 된 헤스티아 부길마가 가장 먼저 실려 나갔다. 다른 길드장들도 사결의 눈치를 보다 하나둘 자리를 떴다.
남은 건 협회 소속 간부들과 제조업계 길드 ‘아뮬렛’의 길드장 방석환뿐이었다.
“크레딧 길드장.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오.”
그는 사결의 깽판에 유일하게 휩쓸리지 않은 사람이다. 사결이 의도적으로 그가 있는 곳을 피해서다.
“영감님.”
뚱한 표정의 사결이 그를 영감님이라고 부르자 옆에 앉아 있던 청년이 발끈했다.
“그 무슨 무례한 말입니까? 예의를 갖춰 주십시오. 크레딧 길드장.”
본인은 스스로가 꽤 위협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S급 헌터가 보기엔 왈왈거리는 강아지였다.
“못 보던 얼굴인데. 뭐 이런 하찮은 햇병아리를 데리고 다니십니까.”
“뭐?!”
청년이 발끈했다. 방석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 후계자로 낙점한 아이일세.”
“이게요?”
“크레딧 길드장! 다시 말하지만 예의를-”
“수현아, 먼저 나가 있거라.”
“…예.”
청년이 터덜터덜 회의장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넓은 공간엔 이현수와 사결 그리고 방석환만 남았다.
“아무리 아뮬렛 길드가 회색지대라지만, 저런 성격으로는 오래 살기 힘들 겁니다.”
“자네가 잘 좀 봐 주게.”
“대놓고 청탁이십니까. 그것도 맨입으로?”
“이번 달 가공 재고가 아직이던가? 내 덤을 듬뿍 얹어주지.”
“저놈 손자의 손자까지 지켜봐 드리도록 하죠.”
“끌끌끌.”
방석환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이 젊은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공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리더였고, 사적으로도 어울릴 만한 성격이었다. 이현수는 그런 노인을 언제나 경악과 존경의 시선으로 봤다.
어디 예뻐할 사람이 없어서 이딴 걸 다 예뻐하지.
“현수야, 너도 나가 있어라.”
이현수는 옳다구나 자리를 떴다. 사결의 옆에서 문을 열고 나가기까지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정말로 둘만 남게 되자 사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죄송합니다. 평소엔 저렇게까지 무례하지 않은데.”
“기분 나쁘다고 주려던 덤을 빼진 않네. 날 그런 소인배로 봤는가?”
“아닙니다.”
사결은 냉큼 부정했고 방석환은 웃었다.
“자네한텐 항상 감사하고 있네. 자네가 살린 목숨이 몇인지 그리샤에서 그걸 모르는 이는 없어. 하지만 세상 간사한 게 사람이라고… 이제 좀 살만해지니까 자꾸 다른 게 눈에 들어오는 게지. 그러니 부디 너무 마음 상해 말게.”
“괜찮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기대한 적 없으니 실망도 하지 않지요.”
“…….”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전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어요.”
거짓말이다. 그도 하얗고 말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어머니가 붙들렸고 자신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어머니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고통받았을 때부터 서서히 이렇게 되어 버렸다.
사결은 구질구질하게 설명하는 대신 웃음으로 뭉뚱그렸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그가 방석환을 두고 몸을 돌렸다. 세월에 혼탁해진 눈이 가장 눈부신 날의 청년을 보았다. 어깨는 떡 벌어졌고 등은 곧았으며 걸음은 당당했다. 두려울 것이 없는 왕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방석환의 눈엔 울고 있는 작은 어린아이가 보였다.
“거짓말하지 마요. 어머니가 그 저택에 있었을 리 없어요. 거기 계속 살았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요!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요?”
그때 방석환은 뭔가 말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알았다. 어디까지나 예상일뿐이지만 그의 예상이 맞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걸.
소년의 어머니는 아마 지하에 있었을 것이다. 저택 밑. 아주 깊고 깊은 지하 연구시설에.
“거짓말이라고 해!”
어쩌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산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것도.
그는 작디작은 몸을 품에 안았다. 울음으로 젖었던 가슴팍이 지금도 아릿한데 그게 벌써 20년 전이다.
“자네, 연애는 하나?”
걸음을 멈춘 사결이 뒤를 돌아봤다. 그의 입매가 스르륵 말려 올라갔다. 눈이 반달처럼 휘고 매끈한 뺨에선 빛이 나는 것 같다. 사결의 얼굴이 환해졌다. 방석환의 입이 벌어졌다.
“예.”
“그, 그런가? 그럼 되었네.”
사결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곤 문을 나섰다. 방석환은 어쩐지 힘이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가 주름진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눈물이 찔끔 나오려 했다. 방석환은 늙으니 주책이라며 아무도 듣지 않는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