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운전사가 일생일대의 기술을 선보이며 휘청거리는 차체를 바로 세웠다. 이현수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소리쳤다.
“미쳤습니까?!”
왜 가만있다 발작이야?!
사결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응. 진짜 미쳤네….”
손 위로 드러난 뺨이 살짝 붉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의 피부색이 아니었다. 미쳤냐고 물었는데 순순히 인정하다니. 이 인간이 정말로 돌아버린 게 틀림없다. 이현수는 경악했다. 그가 전에 없이 당황해서 물었다.
“어, 어디가 아프신 겁니까. 혹시 죽을병에 걸리신 건 아니겠죠?!”
“뭔 헛소리야.”
사결이 냉정히 일갈하곤 고개를 홱 돌렸다. 여전히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그는 창밖의 풍경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단말기를 켜더니 화면 하나를 캡처하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창밖을 향해 턱을 괴었다. 한껏 분위기를 잡는 그의 옆, 차체 내부 벽면이 주먹 모양으로 움푹 패어 있었다.
“허.”
이현수의 폐에서 기어이 헛바람이 샜다.
* * *
“어이! 다들 밥 먹고 하지!”
“예!”
“철수, 너는 오늘도 편의점 도시락이냐?”
박명석의 물음에 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 도시락 두 개. 별다른 일이 없으면 여원의 식사는 점심이고 저녁이고 항상 같았다.
“같이 먹으러 가자. 내가 사 주마.”
“엇, 그럼 나도 사 주쇼!”
박명석 다음가는 고참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 눈치 없는 화상이!”
“아 거 조용히 하쇼.”
양쪽에서 뛰어든 다른 인부들이 고참의 팔을 하나씩 꿰차고 질질 끌어냈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
남자가 억울해했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괜찮습니다.”
깔끔하게 거절한 여원이 고개를 꾸뻑 숙이곤 멀어졌다. 그는 근처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밖에 놓인 플라스틱 테이블에 자리를 폈다.
젓가락을 몇 번 움직이자 도시락이 금방 동났다. 미련 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여원은 가장 먼저 현장으로 돌아왔다. 남은 시간에는 단말기를 봤다. 그는 요즘 사람답지 않게 단말기를 만지는 일이 드물었다.
배를 두드리며 돌아온 인부들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수군거렸다.
“결국 한 거 아녀?”
“뭐가.”
“아 뭐겄어. 그놈! 새로 온 과장!”
“하긴. 그 능글맞은 놈이 상대였으니… 이만하면 오래 버텼지.”
박명석이 버럭 화를 냈다.
“우리 철수는 그런 짓 안 해!”
“어씨, 놀래라. 간 떨어질 뻔했네.”
“…그보다 철수가 언제부터 박 반장댁 애가 됐소?”
박명석이 난쟁이 고릴라처럼 날뛰었다. 기겁한 인부들이 고래를 만난 고기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란은 여원에게도 전해졌다. 평소였으면 그래도 눈길이나 한번 줬을 텐데. 지금 그는 온 신경이 단말기에 쏠려 있었다.
‘답장이 안 오는군.’
사결이 200개가 넘는 문자를 보낼 동안 여원은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 역으로 서운해하기엔 염치없겠지.
사실 답장이 오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그가 손을 들어 귀를 가렸다. 귓불에 손톱만 한 문신이 떠올랐다. 멀리서 보면 피어싱으로 착각할 수 있을 크기였다. 그와 동시에 두 개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여기 오늘 회의 안건 정리해 둔 거니까 미리 좀 훑어보세요.]
[아 눈 뜨고 그냥 훑어만 보시라니까요.]
[사결 님. 길드장님. 저기요. …야.]
[야?]
[아니. 왜 ‘야’에만…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소리가 울렸지만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다. 맞은편의 대화는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차의 미세한 진동과 엔진 소리 외엔 더 들리는 게 없다.
어쩐지 영화관과 비슷했다.
“…….”
그때를 떠올린 여원의 심장이 다시 널을 뛰듯 들썩였다.
그게 무슨 행위인지 알고는 있었다. 아니, 알고만 있었다. 남이 하는 것도 본 적이 없어 순수하게 지식만으로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접 겪는 건 전혀 달랐다.
질척거렸고 뜨거웠으며 묘하게 아랫배가 당겼다.
[어서 오십시오. 크레딧 길드장님. 회의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단정한 여성의 목소리가 사색 사이로 끼어들었다. 주변이 꽤 웅성거리는 걸로 봐선 사람이 많은 곳인 것 같았다. 그런데 크레딧 길드장이라니.
‘그때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군.’
가슴 한편이 싸늘해지는 걸 애써 억눌렀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꼭 내가 이유인 건 아닐 것이다. 여원은 그렇게 되뇌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정석은 주머니 안을 굴러다녔다. 어쩐지 진정하지 못해 계속 건드려 댄 탓이다. 사결이 덮치듯 입을 맞춰 왔을 때도 그는 마정석을 쥐고 있었다.
처음 겪어보는 성적 자극에 혼이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모르게 사결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내내 쥐고 있던 마정석은 사결의 코트 목깃에 스며들었다. 이제 그는 사결의 목소리와 그 주변 소리까지 원한다면 전부 들을 수 있게 됐다.
‘아니었다면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자.’
그렇게 생각한 여원의 몸이 돌연 굳어졌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지?’
삑삑.
고장 난 것처럼 삐걱거리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단말기를 눌렀다. 문자 알림음이 아니었다는 건 누르고 나서야 알았다.
[이렇게 빨리 받다니. 별일이군.]
“…….”
정보상이었다. 바로 입을 다물자 눈치 하나는 귀신같은 그가 킬킬거렸다.
[날 걱정한 건 아니겠고… 아, 설마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었나. 누구? 사귀는 사람?]
“사귀진 않습니다.”
사내는 고백했지만, 자신은 수락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귀는 건 아니다. 방금 흔들린 심장이 더 크게 덜걱거렸다. 여원은 저도 모르게 덧붙였다.
“아직은.”
그 뜻을 알아차린 정보상이 큰 소리로 웃었다.
[으하하! 당신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이잖나.]
“…….”
[크흠, 저번의 이야기를 마저 하지. 그 아들 말인데, 사실 꽤 유명한 이야기요. 혹시 크레딧 길드라고 들어봤소?]
* * *
대부분 도시에서 헌터 협회는 도시 중앙에 위치했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도시 어디에서 게이트가 열려도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이 크고 높은 빌딩이 건재하는 한 이 도시는 평화로울 것이다, 라는.
그리샤의 헌터 협회는 도시의 서쪽에 치우쳐져 있었다. 그들이 반골이라 도시 구석에 이런 거대한 건물을 세운 건 아니다. 20년 전엔 이곳이 그리샤의 중심이었다.
그날의 참사는 인간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대도시의 절반이 속절없이 쓸려갔다. 협회는 무력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고작 도시의 반절을 지키는 게 한계였다. 그나마도 무수한 희생이 따랐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침식당한 부분을 잘라냈다.
대신 마물의 해일이 잠잠해진 후 수해에서 가장 먼 동쪽의 격벽 너머에 원형의 격벽을 하나 더 세웠다. 말이 격벽이지 새로운 도시를 하나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완성된 후엔 맞닿은 격벽의 중간을 터 기존의 도시와 연결했다. 그렇게 그리샤는 아름답고 거대한 원형의 도시에서 ‘찌그러진 호리병의 도시’가 됐다.
전부 저 빌어먹을 수해 때문이었다.
“저 나무들은 그렇게 봤는데도 어떻게 볼 때마다 역겨운지. 확 불태워버리고 싶네.”
“습관처럼 태클을 걸고 싶은데 그 말엔 동감이군요.”
“뭐냐. 기분 나쁘게.”
“…….”
아니. 동조를 해 줘도.
통유리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층을 올랐다. 협회 건물에 의해 그늘이 진 빈민가를 지나면 바로 거대한 격벽이었고, 격벽 너머는 마물이 득시글거리는 수해였다.
구어어.
긴 목을 가진 공룡 형태의 마수가 검푸른 잎사귀 사이로 솟구쳤다. 입에는 짐승형 마물이 물려있었다. 피를 흩뿌리며 절명한 마물이 마수의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식사를 마친 놈이 다시 빼곡한 나무들 사이로 잠겨 들었다.
수만 개의 잎사귀가 흔들렸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 같다. 검푸르게 일렁이는 나무의 바다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이 광경을 거의 매일 봤다. 볼 때마다 사결은 심부에 잠들어 있을 목적을 상기했다. 20년째 변화가 없는 수해 덕에 그의 기억은 마모되지도 잊히지도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목적한 층에 멈췄다. 문이 열리자 짧은 복도가 나왔다. 양쪽은 하얀 벽이었다. 문은 맞은편의 하나뿐이다. 앞을 지키고 있던 덩치 둘이 사결을 보곤 허리를 숙였다.
사결은 그러거나 말거나 큰 보폭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경호원이 문을 열었다. 내부는 거대한 회의실이었다. 넓적한 원을 그리는 회의용 책상이 빼곡했다. 좌중을 둘러 본 사결이 빈자리에 앉았다. 옆에는 이현수가 착석했다.
좋게 말해 비서 겸 경호원이고 사실은 어딜 가든 따라붙는 귀찮은 금붕어 똥이었지만 그의 길드 내 공식 직위는 부길드마스터였다.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현수를 보고 픽 웃은 사결이 몇몇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들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기겁해서 고개를 숙이거나 먼 곳을 봤다.
헤스티아의 헛짓거리를 알고 있었거나 몰랐어도 짐작 정도는 하고 있던 게 분명한 놈들이다.
사결은 해사하게 웃으며-
“다들 미쳤지 아주?”
그대로 깽판을 쳤다.
“뭘 잘했다고 무게 잡고 앉아 있어? 배길수 어딨어! 배길수 당장 나오라 그래!!”
“으아악!”
“저 미친 새끼!”
“야! 잡아! 말려!”
바닥과 벽면이 얼어붙고 허공에 수십 개의 얼음칼이 솟았다. 뒤늦게 정신 차리고 말려 보겠다고 덤빈 이들은 사결에게 멱살이 잡혀 벽에 처박히듯 던져졌다.
이현수는 해탈한 표정으로 평온한 정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옆으로 협회의 수뇌부와 대형 길드의 길드장들이 날아다녔다. 으르렁거리며 짐승처럼 날뛰던 사결의 눈에 낮은 포복으로 피신하던 헤스티아 길드 부길마가 들어왔다.
얼어붙은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길마가 와서 넙죽 대가리를 박아도 모자란 안건에 부길마가 기어 나와?!”
네가 이럴 걸 알아서 안 온 게 아닐까.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타깃이 된 부길마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깐.”
“잠깐은 개뿔. 이리와 이 새끼야!”
와장창!
콰앙!
마흔에 가까운 나이의 우락부락한 사내가 뒤늦게 대항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사결이 손을 휘둘렀다. 불꽃을 두르고 달려들었던 헤스티아 부길마가 반대편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축 늘어진 덩치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꼴사납게 기절한 사내를 보고도 사결은 분이 가시지 않았다.
이 별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깜찍한 문자를 보내는 제 귀환자를 두고 여기까지 와야 했다니. 정수리에서 얼음이 솟을 지경이다.
사결은 면면들을 돌아보며 진심을 담아 경고했다.
“또 이딴 일로 나를 방해하면.”
그땐 이 정도론 안 끝나.
걸레짝이 된 수뇌부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