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4장. 마의 수해
여원의 단말기가 깜박였다. 연락이 아닌 메시지. 사결이었다.
<지금쯤 일이 끝났을 것 같아 연락했습니다.>
오늘 여원이 새벽에 나온다는 건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 말라고 한 이후, 사결은 정말 음성 연락을 시도하지 않았다. 딱 음성 연락만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문자는 여원이 질려 할 만큼 쏟아냈다. 힐긋 시선을 내린 그가 쌓인 문자의 개수를 확인했다. 한 번도 지우지 않은 문자는 벌써 200개에 달했다.
눈을 게슴츠레 뜬 여원이 화면을 보는 사이 실시간으로 문자가 갱신됐다.
<오늘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저번의 카페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갑자기 만나자고?
여원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단말기만 만지작거리는 사이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러니까 어떤 놈팡이가 케이크 사준다고 해도 따라가지 마세요.>
이건 뭔…
“형! 잘 지냈어요? 몸은 좀 괜찮아요?”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놈팡이가 나타났다. 여원은 주재영을 물끄러미 봤다. 이유를 알지 못한 주재영이 싱글거렸다.
“너무 오랜만이긴 한데, 설마 제 얼굴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뻔했다. 여원은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주재영은 개의치 않고 여원을 쫓아왔다. 주재영에게 여원은 깔아보고 싶은 상대인 건 여전하지만, 지금은 그것 말고도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후처리과 과장이 아닌 그는 더 이상 여기 올 이유가 없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안절부절못하는 협회의 양복들이 보였다. 그들은 덩치 좋은 가드에 막혀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개인 경호원인가.’
설마 과장직에서 밀려난 데 앙심을 품고….
“병원에 형이랑 같이 있던 남자 말인데,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어요?”
사결에 대한 화제에 멈칫한 여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정말 처음 만난 거 맞아요?”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흠, 하며 주재영이 여원에게 바짝 붙어 섰다. 설령 저 말이 전부 사실이라 해도 뭔가 더 있었다.
“둘이 혹시 잤어요?”
“…!”
단단한 몸이 굳어졌다. 슬쩍 등허리에 손을 올린 주재영이 은근히 문질렀지만 반응은 없다.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이다. 주재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직 거기까진 안 간 건가.
“안… 잤습니다.”
삐걱거리며 말한 여원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아, 이런.
입매를 비릿하게 말아 올린 주재영은 더 쫓아가지 않았다. 저런 타입은 너무 밀어붙이면 역효과다. 그는 일단 섹스가 아직이라는 걸 확인한 걸로 만족했다.
“크레딧 길드의 사결이란 말이지.”
시야에서 여원이 사라진 후, 주재영도 다시 차에 탔다. 세단이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시선은 창밖을 향했지만 흘러가는 풍경을 보는 건 아니었다.
간호사에게 쫓겨난 후 함께 쫓겨난 사내가 어디론가 연락을 넣었다. 그러자 허둥지둥 달려온 헌터 협회의 인간들이 놈이 아닌 자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굽실거리는 건 여전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기름기 가득하던 면상에 그날은 기름 대신 식은땀이 가득했다.
‘나,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저분이랑 엮이면 안 됩니다!’
무언가 깨달은 주재영이 사내를 다시 봤다. 그는 주재영이 반쯤 내몰리듯 병원을 벗어나는 내내 생글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이후 주재영은 남자에 대해 따로 알아봤다. 처음엔 믿지 못했다. 생각보다 거물이었던 탓이다.
‘그리샤? 크레딧 길드? 아니 그런 대도시의 길드장이 여긴 왜 와? 잘못 안 거 아냐?’
그때 양복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를 둘러쌌다.
잠깐 긴장했지만 이내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맨 앞의 덩치가 익숙했다. 양복 무리의 선두에 선 자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도련님.’
그의 아버지가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주재영은 그대로 본가로 끌려갔다.
기다리고 있던 시의원은 주재영을 보자마자 재떨이를 던졌다. 무슨 망나니짓을 하고 다녀도 그의 편을 들어줬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노호를 토했다.
‘네가 제정신이냐?! 이 미친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온갖 욕설과 함께 주재영은 그대로 가택에 감금당했다.
주재영은 아버지의 반응을 보고서야 사내가 진짜 크레딧 길드의 주인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사결.
대도시 그리샤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크레딧 길드의 주인. 이 시대의 패자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내. 그가 친히 이런 시골 촌구석까지 왕림한 것이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과 같은 먹이를 노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주재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그 사실을 알게 됐을 때부터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분노? 아니다. 그깟 하잘것없는 것보단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뱃속이 욱신거리며 쑤셨다. 가만히 있다가도 미친 사람처럼 입매가 올라가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상대가 감히 대적하지 못할 거물이라는 걸 알고 나면 보통은 겁을 먹고 꼬리를 만다. 주재영은 그러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에 나사가 하나씩 빠진 그는 전혀 다른 포인트에서 생각했다.
‘그리샤의 왕이라는 사결. 그런 놈이 노리는 구멍을 내가 먼저 맛보는 거지!’
씨이이이발!
미쳤어. 존나 좋아.
상상만으로도 살짝 가 버렸다. 팬티가 조금 젖은 것을 느낀 주재영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본래도 탐스럽던 과실이었다. 그런 게 지금은 세상에 다시없을 향기를 풍기며 조용히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
‘정보원에 의하면 비공정이 새로 정박했다고 했지. 아주 가는 건 아닐 거고… 그리샤에 급한 일이 생겼나 보군.’
정체를 몰랐으면 모를까 아는 이상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사결은 모종의 이유로 곧 백담을 떠난다. 사내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닐 테니 곧 돌아오겠지만, 여기서 그리샤까진 비공정으로도 꼬박 사흘이 넘게 걸린다.
사흘. 과실을 수확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 * *
해가 정수리에 떴다.
오늘 현장 집합 시간은 새벽이었다. 빠듯하게 하면 점심 전에 돌아갈 수 있는 작업이었다. 박명석의 독려도 오늘은 필요 없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다 똑같다. 오랜만에 단합한 인부들이 으쌰으쌰 해서 결국 11시 반에 작업이 끝났다.
뿌듯한 표정의 인부들은 장비를 정리하고 5분 만에 사라졌다.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데….
‘사람 발걸음에 흩어지는 바퀴벌레 같군.’
여원도 원래는 그중 한 마리가 되어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일의 마무리 단계에 날아온 문자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오늘 잠깐 볼 수 있을까요? 저번의 카페 앞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작업복을 벗긴 했지만 땀도 흘렸고 먼지도 묻었는데 지금이라도 가지 못한다고 할까.’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혹시 중요한 일일 수도 있으니 만나 볼까.’
여러모로 고민하는 손에 작은 돌멩이가 잡혔다. 새끼 스펜타의 마정석이었다. 원래는 정보상을 통해 팔아 현금을 챙길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계속 쥐고만 있었다.
달그락.
온기를 품은 마정석이 손안에서 굴렀다. 중간계에선 마소 중독치료를 위한 중화제의 재료로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마정석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다. 마계 출신인 여원의 손에 있다면 더욱 그렇다.
예를 들면 도청용 마법을 옷깃에 새긴다던가.
“…어이가 없군.”
여원은 고민하는 스스로가 어색하고 이상했다. 기껏 얻은 마정석으로 그딴 쓸데없는 짓을 한다? 중간계에 돌아온 직후였다면 생각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고민한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라도 사내의 진실을 확인해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확인하고 싶다.’
확인해서 어쩔 건데.
‘그가 정말 다른 속셈 없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 접근한 거라면….’
그런 거면?
“…….”
생각은 그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깊이 갈등했지만 여원의 걸음은 결국 집이 아닌 카페로 향했다. 착실히 버스를 타고 인도를 가로질렀다. 이제 슬슬 눈에 익은 풍경 가운데서 생각했다.
‘혹시 나는 사내를 만나고 싶었던 건가?’
“철수 씨! 여깁니다!”
여원을 발견한 사결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손끝이 움직거렸다. 사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색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사내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그림처럼 굳었다. 옆을 지나던 꼬마가 그런 사내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래도 움직임이 없다.
역시 안 하던 짓은 하는 게 아니다. 민망함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제야 다시 움직인 사내가 반쯤 뛰듯이 다가왔다.
“이렇게 반가워하시다니! 저 보고 싶었습니까?!”
자문했던 물음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여원은 물끄러미 사내를 올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듣고 알았다. 그렇구나. 자신은 사내를 만나고 싶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