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목소리뿐인데 생글거리는 얼굴이 바로 앞에 보이는 듯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해독제처럼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악몽을 밀어냈다.
고요해진 머리와 심장이 신기했다. 아니, 머리는 고요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시끄럽다. 하지만 시끄러운 이유가 조금 전과 달랐다.
[연락을 받으신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네요. 역시 문자 보내는 법을 모르시는 겁니까?]
“보낼 줄 압니다. 문자.”
[…그건 의외군요. 정말입니까?]
미세하게 늦은 타이밍이 느껴졌다. 아마 내가 대답할 줄 몰랐던 거겠지.
훗, 하고 숨을 내쉬었다.
[방금 웃은 겁니까?]
“…….”
[웃었군요. 그렇죠?]
“잠시.”
화장실의 열린 문 너머로 걸린 거울을 봤다. 언제나 보던 무감각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아뇨. 웃지 않았습니다.”
[…지금 설마 거울 보고 확인해서 말한 겁니까?]
“예.”
단말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뒤이어 “진짜 귀엽…”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은 거겠지.
사결은 그러고도 한참을 떠들었다.
이번에도 화제는 온통 디저트와 반려동물에 대해서다. 꽤 좋아하는구나, 하면서도 나 역시 흥미가 있는 분야라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럼 앞으로는 답장 좀 주시겠습니까.”라는 말에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 건.
사결의 놀람이 단말기 너머로도 전해졌다. 하지만 그 놀람이 어디 내 것에 비할까.
거울이 있는 쪽은 보지 않았다. 틀림없이 얼빠진 낯이 있을 테니까.
[그 말은-]
“그러니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연락은-”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가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먼저 입을 열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아, 그러니까 문자에는 답할 테니 이런 연락은 삼가 달라는 겁니까?]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시간도 늦었는데 실례가 많았네요. 그럼 다음에-]
사내가 말을 늘였다. 연락을 끊으려는 기색이 느껴지기 무섭게 말이 튀어나왔다.
“문자는-”
하면서도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해도 됩니다.”
멀리, 차가 클랙슨을 울리며 지나갔다. 길게 늘어진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어둠과 적막이 드리운 단칸방까지 밀고 들어왔다.
불시에 들려온 강렬한 소리, 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 순간에 이미 뇌리에 닿아 각인된 소리.
[예. 다음에 문자 하겠습니다.]
연락이 끝났다. 단칸방이 다시 고요해졌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바로 잠들지 못하고 단말기를 만지작거렸다. 아까처럼 마음이 불편하거나 두렵진 않다. 편안하고 나른했다. 마치 사내의 여유가 자신에게도 옮아온 것 같다.
기본적으로 경직 상태인 자신과 달리 그는 항상 적당히 풀려 있었다. 신기한 사내였다. 만날 때마다 새로웠다. 오늘도 새로운 걸 알게 되지 않았나.
갈대처럼 하늘거리며 헤매던 생각은 돌고 돌아 그의 고백에서 멈췄다.
‘당신이 날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빈약한 자신의 어휘로는 비유할 말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건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은 기분.
방금 물을 마셨는데도 어쩐지 목이 탔다. 자자. 그만 생각하고 자자. 그렇게 눈을 감았을 때.
삑삑.
사결인가? 번개같이 화면을 확인했다.
머리가 차게 식었다. 눈에 익은 번호는 부유하던 나를 순식간에 땅에 붙들어 맸다.
[거, 받았으면 대답 좀 하쇼.]
“…예.”
시키는 대로 대답했는데 돌아온 건 한숨이다.
[그래. 돈 주는 놈이 갑이지.]
사내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경호원 셋은 죽었소. 각각 심장마비, 실족사, 병사요. 정확히는 누가 고의로 죽인 흔적이 보이오. 그 이상은 알아낼 수 없었어. 아주 깨끗해. 이렇게까지 깨끗할 수가 없는데.]
억양은 특유의 껄렁함이 남아 있었지만,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는 쓰레기와 주정뱅이, 쥐로 가득한 뒷골목의 정보상이었고 자신의 직업에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다른 이보다 비싼 금액에도 굳이 이 사내에게 일을 맡겼다.
“두 아이는.”
[지금부터 말하려고 했소. 먼저 아들 말인데-]
좀 더 이어진 정보상의 말은 끝내 끝맺어지지 못했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총성이 뒤따랐다. 주변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이런 씨발! 이봐, 듣고 있나? 내 나중에 다시 연락하겠소. 야, 이 개-!]
우당탕 소리와 함께 연락이 끊겼다.
“…….”
소란 때문인지 단칸방의 고요함이 더욱 두드러졌다. 형형한 눈으로 암흑뿐인 공간을 노려봤다.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살아있다.’
그자의 아들이 살아있다.
가슴에 검은 불길이 넘실거렸다. 저 아래 감옥에서부터 이어진 아주 오랜 증오였다.
* * *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시는 겁니까?]
“아, 또 왜.”
[도심, 그것도 남의 도시의 심부에서 드론이라니요. 미쳤습니까? 돌았습니까?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챙긴 걸 그렇게 쓰다니. 그게 무슨 스쿠터인 줄 아십니까? 게다가 하급 헌터 폭행까지. 하, 제가 기사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냐고요! 안 그래도 지금 할 일 많아서 집에도 못 가고 있는데!]
“그래서 왜 연락했는데.”
사결은 이현수의 말을 한 귀로도 듣지 않았다. 크레딧 길드 본부에서 야근 중이던 이현수는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봤다. 그러고는 능력을 개방했다. 그를 중심으로 온갖 물건들이 둥실거리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함께 야근하던 팀원들이 기겁했다.
[으악! 부길마!]
[참으십셔!]
[팀장님, 부길마 좀 말려요!]
사결이 비서 겸 경호원으로 데리고 다니는 이현수의 길드 내 정식 지위는 ‘부길드 마스터’였다.
다시 말해 사결이 없을 땐 사무직과 현장직 양쪽에서 가장 높은 권한을 가졌다는 뜻이다. 팀장 윤혜리가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팀장인 내가 부길마를 어떻게 막아. 하극상이다.]
[댁이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그냥 귀찮아서 핑계 대는 거지!]
뜨끔한 윤혜리가 되레 성을 냈다.
[이 새끼들이…!]
아까보다 더 큰 파열음이 들렸다. 이러다 길드 건물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사결이 단말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었다가 다시 가져왔다.
[헉, 어제 산 아이퐁 단말기가!]
[아니, 부길마님 말리라니까 왜 저희를 조지려고 들어요?!]
“하하. 개판이네.”
사결이 낮게 웃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기, 길마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부서진 물건은 이현수와 윤혜리 월급에서 까도록.”
[미, 미친- 악!]
더 듣지 않고 연락을 뚝 끊었다. 약 5분 후, 단말기가 다시 울었다. 이현수였다. 사결이 생글거리며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본론은?”
이현수는 잠깐 고민했다. 그냥 이 새끼 죽이고 천국 갈까. 죽이면 분명 지옥이 아니라 천국 문이 열릴 것 같은데.
“물론 이 시간에 연락할 만큼 급한 일이겠지?”
사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남이 들으면 마냥 봄바람 같은 몽글함만 느낄 테지만 그와 반평생을 함께한 이현수는 알 수 있었다. 봄기운에 가리운 채 몰래 스며든 날카로움을.
[이 시간이라도 듣고 싶으실 것 같은 안건이긴 합니다.]
“결과가 나왔군.”
[예, 확인했습니다.]
이현수는 답지 않게 뜸을 들였다. 정말 말하기 싫은데 억지로 말한다는 기색에서 사결은 이미 결과를 짐작했다.
[본명은 서여원. 올해 스물여덟. 백담 태생으로 귀환자가 맞습니다.]
“예쁘네.”
[예?]
“이름. 철수 같은 것보단 훨씬 어울려.”
[네, 뭐… 그렇겠죠.]
귀환자다. 이름이 김개똥이었어도 예쁘다고 했을 게 틀림없다.
[그것 말고도 전달사항이 있습니다.]
전달사항. 그것은 부길마인 그가 몇 개의 팀과 야근에 몰두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기만이 아니다. 현재 크레딧 길드 층 대부분이 불이 환했다. 간식을 사러 갔다 온 팀원이 퀭한 눈으로 커피를 나눠주며 말했다.
“도시 전체가 야근 중인 것 같아요.”
비유가 아니라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이현수는 생각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인데. 네 선에서 해결할 순 없는 건가?”
[네. 안 됩니다.]
“아, 또 뭔 일인데.”
[공략 포인트로 지정된 곳 있잖습니까.]
공략 포인트라는 말에 사결이 멈칫했다. 불길함이 발목을 휘감았다.
[헤스티아의 팀 하나가 멋대로 진입했다 몰살당했답니다.]
“그런데?”
[그… 팀원 전원이 A급이었고 리더는 신세영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