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여원의 시선이 비명을 쫓아 돌아갔다. 사결은 속으로만 욕하며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은 라인 너머 게이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타다닥.
발소리만 들으면 강아지였지만 그런 귀여운 생명체가 게이트 너머에서 나올 리 없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차량과 소화전을 박살 내며 모습을 드러낸 건 물소 사이즈의 거대한 늑대였다. 검은 몸통엔 이마부터 꼬리까지 붓으로 그린 듯 흰 줄이 그어져 있었다.
‘흰 줄 늑대로군.’
크르르르!
녀석의 앞발과 입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등급은 C였나?’
이쪽을 발견한 늑대는 사납게 목을 울리더니 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노란 눈이 새 사냥감에 대한 잔혹한 기대감으로 빛났다.
그 순간, 사결은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깨달았다.
그가 동행을 곁눈질했다. 마물이 달려오는데도 여전히 무표정하다. 사결은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이쯤 되니 사내가 정말 자신을 감출 생각이 있는 건가 의심이 될 정도다.
무감하게 늑대를 보던 여원이 사결에게로 눈을 돌렸다. 왜 웃어. 내뱉어지지 않은 질문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이름은 잘 기억 안 나는데 저 마물, C급일 겁니다.”
“…?”
“그런 녀석이 저렇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데 F급이라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
뒤늦게 낭패한 기색이다. 사결은 학습하듯 사내의 표정을 배워갔다.
“앞으로도 계속 등급을 속일 생각이시다면 염두에 두는 편이 좋겠군요.”
그가 긴 다리를 뻗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새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흰 줄 늑대가 입을 쩍 벌렸다. 노리는 건 보다 가까이 있는 사결이었다. 주먹을 움켜쥔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움직임으로 늑대의 옆통수를 후려쳤다.
퍽!
머리가 날아간 늑대는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사결과 여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몸을 틀어 피했다.
촤자작.
한참을 밀려난 늑대는 차량 두 대를 헤집고서야 비로소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원의 낯에 그늘이 졌다. 늑대의 피야 사결이 옆으로 후려쳐 한 방울도 묻지 않았지만 몸은 다르다. 자신은 분명 그 경로에 있었고 방금 움직임은 F급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뭘 그렇게 내외하십니까. 병실에서 대화할 때 이미 들켰는데.”
여원은 여느 때처럼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 텀은 평소보다 짧았다.
“…등급은 속이지 않았다고 했을 텐데요.”
“제가 그걸 믿었을 믿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안 믿었단 말이야?
무감한 눈이 전혀 무감하지 못한 동요를 품고 물어왔다. 사결은 명치를 꽉 조였다. 웃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반면 여원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사결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을 거라고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그의 경험은 마계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그의 말을 의심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노예처럼 끌려가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크라투스와 여원의 기준. 다른 마족들의 눈에 비친 그는 마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강자였다. 그가 개를 보고 고양이라고 하면 당사자인 개도 야옹 하고 울 정도의 권세였다.
물론 여원은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있다면 마지막 탈출을 시도했던 그때뿐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흘러간 생각이 가슴의 상흔에 닿았다.
이미 아물어 밋밋하게 차오른 살이 욱신거렸다. 누군가 팔목을 잡아 왔다. 여원의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낯선 것을 보듯 붙잡힌 팔을 봤다.
주인의 의지에 반하는 사지(四肢)를 사지라고 할 수 있나?
“남이 자신의 말을 쉽게 믿는다고 생각하면 남의 말도 쉽게 믿었겠군요. 앞으론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바로 그 남이자 말을 듣지 않는 사지보다도 훨씬 낯선 사내가 말했다.
“우왓, 이게 뭐야?”
“마, 마물이잖아! 야, 가까이 가지 마!”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결은 잡은 팔을 그대로 이끌었다.
“자리를 다시 옮겨야겠군요.”
자연스럽게 앞장선 사결이 여상한 투로 말했다.
“정 그렇게 불편하면 헌터 지인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세요. 제 마음을 강요하는 이기적이고 매너 없는 짓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여원은 잠깐 생각한 후에야 저 말이 아까 하려던 말의 연장선임을 알았다. 잡힌 팔이 흔들렸다. 꼭 제 마음과 같이.
“단말기 번호 알려줄래요?”
망설이고 머뭇거렸으나 여원은 결국 팔을 내밀었다. 사결은 끝까지 다정하게 웃으며 여원에게 자신의 단말기를 맡겼다. 긴 손가락은 조금 거칠었다. 하지만 손끝의 움직임은 깃털처럼 가볍고 섬세했다.
하나하나 번호를 눌러가는 여원의 움직임에서 사결은 어쩐지 눈을 뗄 수 없었다.
* * *
낮에도 해가 잘 들지 않는 지하 단칸방은 밤이 되면 빛 한 점 없는 칠흑의 공간이 됐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누운 채 최근의 일상을 되짚어봤다.
‘일상.’
단어가 입천장에 눌어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눈 뜨면 현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 가끔 서점에 가거나 밀항을 위한 준비를 하는 날도 있었지만 거기까지도 크게 보면 일상의 일부였다.
사결은 그런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송곳이었다. 그것도 속을 헤집고 가죽을 벌리려 드는 날붙이에 가깝다. 그럼에도 덮어놓고 밀어내지 못했다. 그 날붙이가 호의와 호감으로 가득했던 탓이다.
“…….”
왼쪽 팔목을 봤다. 조금 전까지 삑삑 울려대다 반응이 없자 조용해졌다. 조용하니 더 신경이 쓰인다. 망설이다 화면을 열었다.
‘읽지 않음’이라고 적힌 붉은 글씨 아래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여태 온 메시지라곤 일 관련으로 박명석에게서 온 게 다였다. 그 전부를 합쳐도 방금 오 분 새 이 남자에게서 온 메시지의 반도 되지 않는다.
<집은 잘 들어갔어요. 자기?>
<싫다고 안 하면 계속 자기라고 부를 겁니다?>
대답이 없자 약간의 텀이 생겼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건방지게 굴지 않을 테니 뭐라도 대답해줘요. ㅇ 하나만이라도 쳐서 보내줘요. ㅠ>
<실례합니다. 혹시 김철수 씨 단말기 아닙니까? 아니라면 아니라고->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철수 씨. 싫으시다면 먼저 연락 안 하겠습니다.>
<대답이 없는 건 계속 연락해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혹시 메시지 사용법을 모르시는 건 아니죠?>
<…설마 정말 그래요?>
아무래도 사결은 내가 메시지를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또 한동안 말이 없다가 몇 분 뒤에 마지막 문자가 찍혔다.
<다음에 볼 때 알려드려야겠군요.>
‘다음이라.’
과연 다음이 있을까?
당연히 있겠지. 그 사내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자리를 만들 것이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사내의 시선은 항상 나를 향해 있었다. 함께 있는 내내 그랬다.
악의와 살기로 가득한 시선은 익숙했지만 사내가 보내는 것과 같은 막연한 애정은 굉장히 낯설었다.
“…….”
낯설었지만 그걸 알아보지 못할 만큼 둔하진 않다.
한숨을 쉬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이런 복잡한 심경에 잠이 올 리 없었다. 뒤척거리다 결국 일어나 불을 켰다. 구석에 놓여 있던 생수를 들이켰다.
경험상 이런 때 억지로 잠을 청하면 좋지 않은 꿈을 꿀 가능성이 컸다. 예를 들면… 하얗고 시리고 잔혹한 재앙의 꿈을. 언제나 악몽은 태연히 찾아와 나를 옭아맸다.
‘쓸데없는 생각.’
빙룡인 크라투스는 전체적으로 하얀색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그는 온통 검었다. 검고 어두웠으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절망과 고통 그 자체였다.
‘예니스.’
타르처럼 독한 냄새가 나는 손가락이 내 뺨과 목을 쥐었다.
“허억.”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손을 들어 가슴팍을 할퀴었다. 오히려 더 아프고 괴롭기만 했다.
당연하다. 모든 게 그대로다. 변한 게 없는 데 나아졌을 리 없다. 쥔 사람은 없어도 내 목의 목줄이 그대로인 것처럼.
내 몸은 중간계에 있는데 심장과 영혼은 여전히 마계에 남아 있다.
삑삑.
그때, 거짓말처럼 단말기가 울렸다. 메시지가 아니라 연락이었다.
사결.
딱 한 번 발음해본 이름을 입안에서 읊조렸다. 그러자 주인의 얼굴이 같이 떠올랐다. 생글거리던 미소, 여유 넘치는 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말과 행동. 하나씩 솟아난 생각들이 크라투스의 자리를 밀어내고 뇌리를 차지했다.
떨림과 고통이 가셨다. 악몽을 이렇게 빠르게 떨쳐낸 적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 와중에도 단말기는 끈질기게 울려댔다. 나는 홀린 듯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단말기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도 대답이 없으셔서 단말기가 고장 난 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