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이런 상황에서조차 담담하다니. 속이 울컥거렸다. 막말로 저가 맞았지 내가 맞았나? 그런데 뭐 저렇게 담담해?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유는 모르지만 속이 배배 꼬인 사결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말주변이 없는 여원은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대신 딱 한 마디를 힘주어 던졌다.
“사결.”
우악스럽게 힘이 들어간 손이 순식간에 풀렸다. 이미 기절한 B급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결이 여원을 돌아봤다. 살면서 골백번도 더 들은 이름이다. 그런데 저 입에서 나오니 완전 다른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 괴리감이 사결의 귀를 파고들었다.
“한 번만.”
“?”
“한 번만 더 불러주면 안 됩니까. 방금 살짝 설 뻔했는데.”
“…….”
여원은 보았다. 지켜보던 이들이 짜게 식는 것을.
손을 들어 얼굴을 덮은 그가 세상 모든 시름을 어깨에 얹은 사람처럼 말했다.
“수습할 자신은 있는 겁니까.”
사결은 어깨를 으쓱였다.
수습.
그 말에 의외로 정신을 차린 사람이 있었다. 카페 직원이었다. 그의 모습이 카운터 밑으로 사라졌다. 분명 협회에 신고하는 거다.
학생들은 여전히 숨을 죽이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사결에게 던졌다.
‘새로 각성한 헌터인가? B급을 저렇게 쉽게 제압했으면 A급 육체강화계? 와, 우리 도시에도 드디어 A급 헌터가 나오는 거?’
‘멍청아, 당연히 조만간 다른 도시로 가겠지.’
B급과 같이 온 여자는 그가 죽은 줄 알고 울먹이며 어깨를 흔들었다. 희미한 진동에 기절했던 B급이 정신을 차렸다.
“너… 이 새끼… 이런 짓을 하고도….”
육체강화계라 그런가 회복이 빨랐다. 사결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B급의 얼굴을 발로 후려 깠다.
“꺄악!”
허공에 뜬 B급의 몸이 멀리 날아갔다. 테이블이 뒤집히며 근처는 난장판이 됐다.
그 결에 B급과 가까이 있던 여자가 휘말렸다. 손가락에 옷이 걸렸는지 딸려간 몸이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여원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여자가 중심을 잡도록 도왔다.
“아, 감… 감사합니다.”
“떨어져.”
사결이 으르렁거렸다. 방금 좀 괜찮아졌던 기분이 다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서슬 퍼런 기세로 다가왔다. 여자와 떨어진 여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사결의 기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여원은 난감했다. 저를 윽박지르던 B급부터 무력으로 현장을 장악한 사결까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모를 일의 연속이었다.
‘오지 말라고 한 사람이 잔뜩 날이 선 채로 찾아왔는데 왜 기분이 좋았을까.’
그는 가장 큰 의문을 접어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당장은 이 사태와 눈앞의 미친놈을 어떻게 하는 게 먼저였다.
‘사건에 휘말리면 안 돼.’
백담에 머무는 동안 눈에 띄어선 안 된다. 협회와 얽히는 일이나 범죄는 더더욱 피해야 했다.
여원이 맞은편에 선 사내를 봤다. 떨어지라는 말 이후 어떤 말도 없다. 분명 자신이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완고한 눈이었다. 원하는 말을 듣지 않는 이상 한 걸음도 떼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망설이던 여원은 입을 여는 대신 손을 뻗었다. 그가 사결의 팔을 잡아끌었다.
나가서 이야기하죠.
여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결은 분명히 들었다.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린다 싶더니 뿌리라도 내린 듯 묵직하게 섰던 발이 거짓말처럼 떨어졌다. 그는 저를 이끄는 사내를 따라 순순히 카페를 나섰다.
지금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 * *
크라투스를 만나기 전, 여원은 마계의 변방을 다스리는 영주였다.
절벽을 등진 작은 땅은 용암지대와 마수의 숲, 독초로 가득한 평원에 둘러싸여 있었다. ‘녀석’을 만난 건 평원에서다.
분기마다 있는 전쟁이 끝나고 찾아온 짧은 평화의 틈새. 갑옷을 걸치고 잔뜩 들떠 이동하는 기사단과 마주쳤다.
전쟁도 끝났는데 어딜 가는 거지. 호기심에 이유를 묻자 야생마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정 시기가 되면 이 근방의 평원을 찾아옵니다. 어둠 속성에 치유능력까지 있는 귀한 녀석들이죠. 운이 좋다면 마계 제일의 명마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말을 기를 생각은 없다. 여원이 그들을 따라간 건 어디까지나 구경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 걸음은 헛되지 않았다. 노을이 내려앉은 평원에서 넘실거리는 그림자 갈기를 가진 아름다운 말의 질주를 볼 수 있었다. 스펜타의 상위 종인 레프타였다.
특히 맨 앞에 선 개체는 누가 봐도 우두머리임을 알 수 있는 녀석이었다. 다른 레프타보다 1.5배는 컸고 갈기의 질이나 몸의 윤기도 남달랐다.
녀석은 무리의 우두머리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무리를 버리고 강아지처럼 여원에게 따라붙었다.
그때 기사들의 허탈한 표정이란. 그러고 보니 강아지를 키우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 그런 생각을 읽은 것처럼 준마는 머리를 들이밀며 정말 강아지라도 된 듯 애교를 피웠다.
여원은 녀석을 애완용으로 길렀고 나름 귀여워했다.
“왜 말이 없으십니까.”
사내는 한창 애교에 물이 올랐던 레프타를 떠올리게 했다. 제 눈이 잘못되거나 제 뇌가 이상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게 틀림없었다.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 제 생각이요?”
“…….”
확실히 닮은 구석이 있다.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지만 제 말은 듣는다는 것. 문제가 생기면 애교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
“이해합니다. 눈 감으면 앞에 아른거릴 만큼 잘나긴 했죠. 제가.”
여원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뻔뻔함까지.
뭐라 대답할 마음도 들지 않아 빤히 보자 사결이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입니다. 그때 들은 걸 무시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길이었는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상황이 곤란해 보여서요. 제가 괜한 참견을 한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여원은 정처 없이 걸었다. 사결은 그런 여원의 옆에 나란히 섰다. 사람 없는 곳을 찾아 걷다 보니 통제된 구역 근처까지 왔다. 일터에서 매번 보던 붉은 금지선이 익숙했다. 그 앞에 선 사결이 여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그렇게 부담스럽습니까?”
“…….”
“그래도 싫은 건 아니죠?”
“아닙니다.”
여원은 즉답하고 자신이 즉답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다행이네요.”
사내가 활짝 웃었다. 꽃처럼 피어나는 미소에 여원의 입이 꾹 다물렸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지금 그는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흔들림을 누구보다 기민하게 알아차린 사결이 슬그머니 말을 이었다.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어요.”
“……!”
“당신이 날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생각과 열망이 나쁜 건 아니잖습니까.”
하나씩 예시를 들 때마다 사결은 여원에게 가까워졌다. 팔 두 개는 들어갈 것 같던 서로의 틈새가 두 뼘으로 좁혀들었다. 여원은 물러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담담한 눈빛으로 사결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건 겉보기뿐이다. 가까이 선 사결의 눈엔 쉼 없는 파문이 보였다.
동요하고 있구나. 확신을 얻은 사결의 입매가 나른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가 여원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놀라면서도 반응이 늦다. 뒤늦게 후드득 새처럼 고개를 흔든 여원이 뒤로 물러났다.
“저도 모르게 그만… 싫으셨습니까?”
사결은 재미난 가설을 하나 떠올렸다.
‘살기나 적의에만 본능적으로 대응하고 순수한 호의에는 무방비한가.’
프로젝트 스노우 화이트의 마지막 시도는 약 20년 전이다. 이 사람이 그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 귀환자라면 지옥 같은 마계에서 20년 가까이 살다 생환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결은 눈앞의 사내가 무척 준수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들이 악과 독으로 차 있다는 세계에서 20년이나 살다 왔는데, 이 정도면 굉장히 사교적이고 자연스러운 거지.’
그럼 그럼.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인 사결이 이번엔 한 걸음 물러났다. 정황증거는 여럿이다. 그는 이미 여원이 귀환자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철수 씨, 하나만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
“제가 싫은 건 아니죠?”
여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결은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부담스럽다면 그렇지 않은 선까지 물러나 있겠습니다. 그냥 같이 밥이나 먹는 사이부터 시작해도 좋고 가벼운 친구 같은 관계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관계는 당신이 정의하세요. 그걸 바꾸도록 노력하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무기질적인 여원의 표정에 미미한 파문이 일었다. 사결은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도 싫으니 그냥 완전히 사라지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론 이건 새빨간 거짓말.
정말로 거절하면 미련 넘치게 질척거리며 플랜 B(납치)를 시행할 생각이다. 그래도 나름의 확신은 있었다. 이 순간에 이런 말을 하면 무작정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리란 확신.
사결은 여원의 마음에 걸릴 단어를 섬세하게 골랐다.
“어떠-”
“으아악!”
“아악!”
아 또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