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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를 잡는 방법 (19)화 (19/106)

19화

하도 어이가 없으니 화도 나지 않았다. 크라투스도 저런 말은 안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와는 거리가 먼 표현이었다.

어릴 땐 지저분한 말라깽이였고 그 후엔 몇 번의 탈피로 강인한 육체를 얻었으니까. 어떻게 봐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모욕하는 건가?’

시비를 걸어서 내 반응을 보려고?

서늘한 눈을 하자 사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잡았다.

“잘 들으세요.”

또 뭔데.

“귀엽다는 건 말입니다. 불현듯 귀엽다고 느끼면 그게 바로 귀여운 겁니다. 조금 전 내가 본 당신처럼요.”

“…….”

탁.

어깨에 있던 손을 쳐 내자 아픈 척 불쌍한 척은 다 하며 물러난다. 슬쩍 노려보자 어깨를 으쓱이더니 돌연 진지하게 말했다.

“기념일에 케이크를 사서 축하하는 풍조가 있긴 한데, 꼭 그날에만 먹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냥 먹고 싶을 때 먹는 거죠. 좋아하는 사람은 매일 먹기도 합니다.”

놀리려는 것도 아니고 떠보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의도도 없는 순수한 호감이 넘칠 듯 가득 차 있었다.

“모르는 게 있다면 또 물어봐도 좋습니다. 뭘 물어도 나는 웃지도 우습게 여기지도 않을 겁니다.”

진심으로 기분 좋다는 듯 사내가 활짝 웃었다.

“기뻐하긴 하겠죠. 당신이 내게 물어봤다는 것에.”

가슴께가 덜걱했다. 한 것도 없는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지며 이 사내에게 지금의 동요를 들켜선 안 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케이크…. 새 옷은 왜.”

케이크 먹으러 가는데 새 옷은 왜 사 왔냐는 뜻이다. 당황한 상태로 부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려다 보니 평소보다 훨씬 함축된 말이 튀어나왔다.

사내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카페는 후줄근한 차림으로 가면 눈에 띄어요. 사람들이 다 쳐다볼걸요? 운 나쁘면 쫓겨날 수도 있어요.”

그가 쇼핑백을 다시금 들이밀었다. 이번엔 순순히 받아들었다. 탈의실로 들어가면 일단 떨어질 수 있으니까.

겨우 분리된 공간에 들어서자 그제야 경직이 풀렸다. 긴 숨을 내쉬며 손에 난 식은땀을 작업복에 문질러 닦았다. 황량하고 좁은 간의 탈의실이 이렇게 안정적으로 느껴질 줄이야.

재차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악의가 낫다.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낫다. 나는 나를 향한 가시를 막고 견디는 법은 알지만, 호의를 대하는 법은 전혀 알지 못했다.

똑똑.

바늘에 찔린 듯 화들짝 놀랐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돌아보자 여전히 닫힌 문이 보였다.

“이것도 곧 접는다니까 서둘러요.”

“…….”

허술한 잠금을 다시금 확인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습관대로 상의부터 빠르게 벗는데 어떤 인부가 걸어둔 낡은 거울이 보였다.

모퉁이가 깨지고 손때가 묻은 플라스틱 거울이다. 본래 저렇게 쓰는 용도가 아닐 탁상용 거울에 본래 여기 있어선 안 될 스스로가 비쳤다. 여전히 무감한 표정이지만 행동은 허둥대는 멍청이의 손가락 사이로 종속의 계약이 살짝 보였다 감춰졌다.

순식간에 피가 식었다. 뱃멀미하듯 울렁거리던 감정이 싸늘해지며 동요가 사라졌다. 익숙한 무감함으로 무장한 채 밖으로 나오자 작업화는 어디 가고 못 보던 새 운동화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딱 맞았다. 발 사이즈 같은 건 말해준 적 없는데? 그런 뜻을 담아 남자를 봤지만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음, 완벽하네요.”

예술작품이라도 보는 눈이었다. 부담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점심 식사를 위해 사결이 나를 데려간 곳은 붉은 등과 격자창이 있는 이국적인 가게였다.

“여긴 하람의 전통음식을 파는 곳입니다. 혹시 향신료 같은 거 거북하십니까? 냄새가 많이 나는 편은 아닌데 아예 못 먹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향신료 들어간 것과 안 들어간 것. 종류별로 시키죠.”

음식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대체 몇 인분을 시킨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조금 질렸으나 사내가 웃음을 참으며 남는 건 포장하면 된다고 말해 겨우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음식은 사내의 말처럼 먹기 거북하지 않았다. 오히려 꽤 입맛에 맞았다. 게다가 종류는 많았지만, 생각보다 양은 적어서 남김없이 먹을 수 있었다. 사내가 습관처럼 턱을 괴며 웃었다.

“어때요?”

어떠냐니. 뭐가.

그러다 당연히 음식이겠거니 했다. 맛있었다고 대답하려는데 사내가 한발 빨랐다.

“나요. 이만하면 만나볼 만하지 않아요?”

“…….”

“여태 겪은 건 그냥 맛보기였구나 싶을 만큼 잘해줄게요.”

그는 말을 하면서도 나를 가만히 관찰했다. 먹잇감을 가늠하는 사냥꾼과 같다. 여기서 더 건드려볼까 아니면 이쯤에서 물러날까 고민하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나죠.”

아직은 아니라고 판단한 사냥꾼이 슬쩍 몸을 물렸다.

“케이크를 먹고 싶어 했죠? 종류별로 다 사줄게요. 그거 말고도 시키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시켜도 됩니다. 아니면 아예 카페를 사줄까요?” 

농담처럼 던졌지만 저 말은 진담이었다. 아니, 내가 원하면 농담이 진담이 될 거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대답 없이 빤히 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가진 게 돈뿐이라서.”

세상 태평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그냥 보는 것뿐인 내 마음에 여유와 나른함이 스밀 만큼.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부탁하면.”

그럼 어떻게 할 겁니까.

끝까지 묻진 않았지만, 의미는 확실히 전달됐다. 사내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말씀하신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냐에 따라 다를 것 같군요.”

물끄러미 보자 그가 뒷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잘난 척하고 이런 말 하면 좀 깨긴 한데, 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볼게요.’처럼 불확실한 말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넌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지. 꿰뚫을 것 같은 시선이 그렇게 말해왔다. 나는 드물게 후회했다. 왜 그런 말을 꺼냈을까.

“무슨 일인지 힌트라도 줄 수 없습니까?”

슬쩍 한 발 앞으로 내디뎠던 사내는

“그럼 더 친해질 때까지 기다려야겠군요.”

내가 반응이 없자 또 순식간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손가락이 움찔 오므라들었다. 감질났다. 여태 겪어본 적 없는 초조함이 갈비뼈 안쪽에서 싹을 틔웠다. 조용히 도망치고자 결심했던 병원에서의 밤과 꼭 같은 기분이었다.

* * *

테라스가 붙은 카페는 한산했다. 우리는 따로 떨어진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사내는 음료를 가지고 돌아와 검은 건 자기가 가져가고 크림으로 뒤덮인 컵은 내 앞에 놔 줬다.

마시니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나는 단숨에 반을 비웠다.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맛있어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또 웃는다. 계속 생각했지만 웃음이 헤픈 사내였다.

“마시고 있어요.”

다시 일어난 사내가 이번엔 케이크를 가져왔다. 왜 따로 주문했나 했더니 양 때문이었다. 양손에 든 쟁반 가득 먹을 게 담겨 있었다. 카운터에서 질린 시선이 느껴졌다.

“이렇게 많이는 못 먹습니다.”

“남으면 포장하면 되죠. 집 가서 먹어요. 먹을 때마다 내 생각 해주면 더 좋고.”

“…….”

케이크는 반절이 한계였다. 포크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똑바로 봤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솔직하게.”

솔직하게 대답해라.

“그럼요.”

“거짓말은.”

거짓말은 하지 마.

“물론이죠. 어떻게, 맹세라도 할까요?”

사내의 태도는 여전히 가벼웠다. 나만. 나만이 무거운 마음으로 테이블 위에서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제게 뭘 원하는 겁니까.”

“그걸 아직도 물으시다니 제 진심이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아 슬프군요. 계속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한눈에 반했다고. 그래서 당신이 저를 덮쳤을 때 솔직히 기뻤습니다.”

카운터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이쪽을 보는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날 철수 씨는 정말 귀여웠어요. 얼마나 귀여웠냐면 그냥 눈 딱 감고 이대로 납치할까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죠.”

“그만.”

“왜요. 농담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질려버렸다.

‘차라리 도끼를 들고 최전선에 서는 게 낫지.’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다가온 손가락이 귓불을 스쳤다.

“귀가 붉어졌네요?”

나도 모르게 유리창을 확인했다. 거울이 아닌 통유리로는 귀의 색 같은 건 분간이 되지 않았다.

“…머리를 내려도 사과 같네.”

“?”

“농담입니다. 귀 안 붉어졌어요.”

이 새끼가?

도끼눈을 뜨자 사내가 엄살을 떨었다.

“이제 안 놀릴 테니까 그런 표정은 그만두시죠. 무서워 죽겠네.”

말은 무섭다면서 전혀 무서워하는 기색이 아니다. 싱글싱글 웃는 낯을 마주하자 첫날의 아득함이 다시 몰려왔다.

“그래도 한눈에 반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사내가 돌연 진지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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