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자연히 하람과 이노스에서 헛걸음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이현수가 옳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속이 끓으며 침착함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다들 어느 정도 취한 와중 홀로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는지 유독 취한 인부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 왕년에 커다란 사업체를 운영했었다고! 어?! 내 밑에만 오십 명이 넘게 있었어. 사람 통솔하는 거. 그거 보통 일 아냐!”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아니, 그냥 하기로 했다. 더는 참을 이유도 없지 않나. 그런데 나보다 먼저 말을 얹은 사람이 있었다.
김철수였다.
“그렇죠. 그렇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수리의 사과 꼭지가 같이 흔들렸다.
“오, 역시 우리 철수는 알아주는구나!”
“예. 저도 군단을 통솔할 때 꽤나 애먹었거든요.”
놈이 눈을 휘며 웃었다. 입을 열자 지금 느끼는 심정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하하, 이런 미친.”
저거 귀환자 맞네!
“군단? 무슨 군-억!”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인부를 밀어냈다. 힘없이 밀린 인부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바닥에 모로 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주정뱅이들은 왁자하게 웃었다. 조금 덜 취한 이들만 저게 맞나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덜 취했을 뿐 술 들어간 건 매한가지라 그들도 자는 사람은 금방 잊고 다시 저들끼리 부어라 마셔라 했다.
“제 군단은… 마계… 읍.”
‘닥쳐라. 이 사과 새끼야!’
술이 올라 발갛게 익은 주정뱅이의 입에 아무거나 쑤셔 넣었다. 새우튀김이었다. 다행히 입맛에 맞았는지 움칠한 김철수가 우물우물 튀김을 씹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 생각이 없는 거다. 사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함정이니 유도심문이니 고민했던 게 다 부질없었다. 이현수도 그리샤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술 먹은 사과 새끼는 앞구르기를 하면서 봐도 귀환자였다.
다시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하는 이 사내가 어디로 튈지 몰라 식은땀이 흐르는 와중에도 자꾸 입매가 꿈틀꿈틀 위로 향했다.
“어, 과장님 언제 여기로 오셨대.”
“아이고, 오셨으면 또 한잔하셔야지.”
잔뜩 취한 이들이 술병을 들이밀었다. 생긋 웃으며 손끝으로 병을 밀어냈다. 상대적으로 덜 취한 사람들이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곤 달려들어 동료들을 끌어냈다. 뭐, 그런다고 눈이 벌게지고 혀가 꼬일 만큼 취한 것들이 들어먹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주변은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흐트러진 상과 쓰러진 술병을 보다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방이 엉망이군요.”
“예… 예?”
“여기서 계속 놀긴 좀 그렇겠네요. 옆방에 새로 상 봐두라고 했으니 그쪽으로 옮기죠.”
“아, 예!”
화낼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것에 안도한 인부들은 사결의 맘이 바뀔세라 서둘러 사람들을 옮겼다.
“이분은 완전히 취한 것 같으니 제가 집까지 잘 모셔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계산은 하고 갈 테니 다른 분들 뒤처리는 부탁드립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사결의 몸에 기대 늘어진 홍사과가 말했다.
“저 안 취했습니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입 트인 것만 봐도 취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가게 문 앞까지만 배웅하죠.”
그리고 축축 늘어지는 몸을 부축해 호텔까지 왔다.
‘문…문…. 우리 집 문은 어떻게 열었….’하고 중얼거리는 건 무시했다. 침대에 던지듯 눕히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넥타이를 길게 잡아 뺐다.
소파에 앉아 공들여 손에 넣은 사냥감을 응시했다.
사냥감은 은은히 휘감겨 있던 위압감을 벗은 채 정도 이상의 무방비함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턱선 아래 단단한 목덜미에 눈이 갔다. 느슨하게 벌어진 옷깃 사이로 살짝 드러난 쇄골도 그렇다. 그 도드라진 흔적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옷에 가려진 안쪽도 궁금해졌다. 저 밑의 피부도 목덜미처럼 단단할까. 아니면 분위기를 닮아 온갖 상흔으로 가득할까.
“흠.”
사결이 손을 들어 턱을 매만졌다.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 상흔은 곧 역사였다. 걸어온 발자취라고 해도 좋다. 잘하면 과묵하고 무덤덤한 이 사내의 사연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또 다르다. 거부할 수 없는 인력에 끌리듯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뜨끈한 체온과 선명한 맥박이 느껴졌다. 깨지 않을까 했는데 미동조차 없다.
사내의 목덜미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마치 사내 그 자체인 것처럼.
문지르고 있자니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옥죄는 기분이다. 어이가 없어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럼에도 끝내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그의 상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다 두 번째 단추가 풀리고 가슴팍에 우그러진 종이 같은 흔적이 얼핏 보였을 때, 거짓말처럼 눈을 뜬 김철수가 사결의 손목을 확 잡아채더니 단숨에 몸을 뒤집어 그를 깔아뭉갰다.
거대한 산이 배 위에 자리한 느낌이다. 혹은 핏빛 짐승에게 덮쳐지는 기분도 좀 났다. 보통 내 포지션은 반대였는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이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 상황을 성적으로 해석한 아랫도리가 서려고 했다. 사결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일어났습니까?”
대답이 없다. 술이 덜 깼는지 잠이 덜 깼는지 모르지만 눈의 초점이 흐리다. 이건 이것대로 퇴폐미가 있다. 입맛을 다시며 느긋하게 감상했다.
제 발로 손안에 들어온 김철수는 멍한 표정으로 사결을 내려다보다 몇 번 헛손질 끝에 단추를 여미더니 옆으로 픽 쓰러져 눈을 감았다. 사결이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뭘 하나 싶어 지켜봤더니 풀었던 단추 채우기라.
“옷은 벗기지 말라. 이겁니까?”
흠, 하고 이번엔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달칵달칵 소리가 나고 앞섶이 열리는데 여전히 시체처럼 늘어져 있다.
“하하. 바지는 또 괜찮아?”
생글생글 웃으며 속옷까지 벗기고 이불을 덮어줬다. 솔직히 불끈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의식 없는 사람 붙들고 뭔가 하는 건 취향에 안 맞는다.
그렇다고 옆에서 얌전히 잠만 잔다?
“그건 재미없지.”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했다. 물기를 대충 닦고 전라인 채로 그 옆으로 기어들어 갔다. 내일 아침 눈떴을 때, 이 사내가 보일 반응을 상상하자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모로 누워 잠든 사내의 옆면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가슴팍에 분명 뭔가 있었다. 의식이 무의식에 반쯤 파묻히고도 몽롱하게 일어나 셔츠를 여며야 할 만큼 감추고픈 무언가가.
“내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데 말이야. 이번만 참아볼게.”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해. 김철수 씨.
* * *
눈꺼풀에 닿는 햇살에 눈을 떴다.
찌푸린 눈을 몇 번 껌벅이다 말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낯선 장소였다.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상체를 숙였다. 머리가 좀 아프긴 한데 술을 많이 마시면 그럴 수 있다고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일어났어. 자기?”
“……?!”
우당탕!
기겁해서 몸이 튕겨 올랐다. 침대 헤드에 바짝 붙어 옆을 봤다. 그러자 처음보다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길게 누워 있었다.
홀딱 벗은 채로.
순간 머릿속이 검게 물들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없어.’
하반신이 황량했다. 상의는 자기 전 그대로였지만 아래는 완전히 맨몸이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가. 자연스럽게 추측하려는 뇌를 억지로 멈춰 세웠다.
“왜 그런 반응입니까. 설마 기억 안 난다고 하진 않겠죠. 어제 우리 꽤나 재미난 시간을 보냈잖아요?”
우지직.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꽤 비싼 원목일 텐데요.”
마음이 아니라 손에 닿았던 침대 헤드가 박살 나는 소리였다.
황급히 손을 뗐다. 나무 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처참한 침대 헤드가 지금 내 심정을 대변했다.
거짓말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 누가 뇌에 가위질한 것처럼 기억이 없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분명 술을 진탕 마시고, 그리고…
“철수 씨가 이렇게-”
그가 내 양 손목을 잡아 제 위로 이끌었다. 몸이 휘청이며 그 위로 넘어졌다. 반사적으로 사내의 얼굴 양옆을 짚었다.
“-제 손목을 세게 잡더니 막 온몸으로 덮쳐 눌렀는데.”
뇌리로 떠오른 어떤 장면이 반투명한 필름처럼 지금 상황 위로 겹쳐졌다.
굳은 표정의 사결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실 웃을 것 같던 사내가 당황과 혼란을 감추지 못했다. 정확히 지금과 같은 구도였고 배경과 옷도 일치했다.
내 반응을 확인한 사결이 해사하게 웃었다.
“아, 기억났어요?”
“…….”
“꽤 놀랐습니다. 과묵하고 숫기도 없던 사람이 이상한 곳에서 적극적이더군요. 잡아먹히는 짐승의 기분을 간접 체험했다고 할까요? 하하, 아니지. 직접 체험인가?”
“…….”
여느 때와 전혀 다른 어느 날 아침. 벌거벗은 인생의 매운맛이 눈앞에서 생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