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탁.
한 페이지도 못 읽고 사전을 덮었다. 깊은 한숨과 함께 사전을 원래 있던 자리에 두었다. 잡다한 물건을 올려놓고 쓰는 작은 서랍장 위, 책은 두 권뿐이다. 하나는 사전이고 다른 건 동화책이었다.
사전을 사러 서점에 갔을 때 표지가 익숙해서 눈길이 갔다. 어쩌면 내가 아는 단 한 권의 책일지도 몰랐기에 스스로에게 첫 선물을 했다.
홀린 듯 계산한 후로 줄곧 보관만 해 왔었는데 기분이 싱숭생숭해서인지 손이 갔다. 차가운 표정의 여왕이 그려진 표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얼음’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묘하게 그 사내가 연상됐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책장을 넘겼다. 글자는 아주 적었고 대부분이 삽화였다.
옛날, 눈 덮인 평원에 얼음 여왕이 살았다.
눈을 내리게 하고 움직이는 얼음 조각상을 만들며 지내던 그녀의 땅에 한 여행객이 찾아왔다. 여왕은 그와 대화를 나누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외로움이었다. 홀로 있을 땐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이 얼어붙은 심장을 녹였다.
온통 얼음인 세상에서 홀로 녹은 심장은 추위와 고통을 느꼈다. 그나마 여행객이 곁에 있으면 덜했지만, 항상 혼자였던 장소에 다시금 홀로 서면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아파왔다.
겁에 질린 여왕은 성 전체에 저주를 걸었다. 여행객이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나는 한 삽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대한 무도회장이었다. 정면 몇 계단 위의 넓은 단에 두 개의 의자가 보였다. 하나는 얼음 석상이 되어버린 여행객이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잠든 것처럼 앉아 있고, 옆은 여왕이었다.
여왕은 무표정으로 눈물만 흘렸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눈에 남아 그날 밤 잠들려고 감은 눈꺼풀 아래서 깜박거렸다.
* * *
퇴원 후 사흘째.
동화책으로 인한 싱숭생숭한 기분과 괴생물체나 다름없던 사내에 대한 염려가 다 떨어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일하러 나가겠다고 박명석에게 연락했다. 현장 사고 이후로 거의 열흘 만이었다.
마음 같아선 나에 대한 사내의 관심이 완전히 식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집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나는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오랜만에 나간 현장 분위기는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박명석은 철수 왔느냐고 평소처럼 반갑게 웃었지만, 뺨 언저리에 드리운 그림자까지 감추진 못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박명석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봅니까? 눈으로만 의문을 표하자 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말할 수 있다는 거 아는데 영 적응이 안 돼서. 이거 어쩐지 민망하네.”
헛기침을 한 그는 뒤늦게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그런 일이 있고 보름도 안 됐잖아. 죽음 언저리까지 갔다 오기도 했고, 어떻게 살았다고 해도 죽은 놈들이랑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태반인데 그걸 벌써 훌훌 털어내면 그게 더 이상하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 것치곤 바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돈이 절박하지 않은 놈은 없으니까.”
쓴웃음을 지은 그가 현장을 쭉 둘러봤다. 아닌 척 평소처럼 왁자하게 떠들고 있지만 은근한 불안이 석고 부스러기처럼 떨어졌다.
용식 같은 단기 아르바이트도 사실 드물었다. 아무리 돈이 귀해도 목숨보다 귀하진 않다. 이 판에서 사고는 드물지 않았다. 또 일의 특성상 일단 뭐든 벌어지면 반드시 사망자가 나왔다.
적은 인원이 죽으면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현장에서 가장 오래 구른 박명석의 눈이 어둑해졌다.
절박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 말엔 박명석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아내는 마소 중독 환자였다. 아픈 아내를 대신해 어린 딸을 키우고 가정을 부양하는 걸 일생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때 내 앞을 막아준 거. 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내가 없으면 내 아내의 명도 끝이야. 그럼… 내 딸은 세상에 혼자 남겨졌겠지.”
메마른 목소리로 토해낸 명석의 진심에, 몰래 챙긴 마정석의 존재가 두드러지는 걸 느꼈다. 낡은 점퍼의 안쪽 포켓. 실밥이 살짝 뜯어진 주머니에는 500만 크레딧이 훌쩍 넘는 마소 중독 연명치료에 필수 불가결한 마정석이 잠들어 있다.
나는 결국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늦지 않게 도움을… 받았잖습니까.”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무사했을 거라는 뜻이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어쩌면 다쳤을 수도 있고, 그럼 결과는 마찬가지야. 우린 싸우지 못하는 헌터 아닌가.”
나는 박명석이 전하려는 바를 바로 이해했다. F급을 부르는 이명은 도시마다 다르지만, 의미는 비슷하다.
사냥할 수 없는 헌터.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덮어씌워 내쫓는 것도 만만한 F급이다. 그렇게 한 번 낙인이 찍히면 다른 등급과 달리 F급은 회생의 여지가 없다.
법률상 일반인들이 하는 일을 하기도 어렵고 허가도 잘 나지 않는다. 요즘 시대에 도시 내에서 굶주려 죽는 사람이 나온다면 누가 믿을까.
그러나 F급들은 도시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헌터에 섞일 수도 없고, 시민에 속할 수도 없다. 박명석은 항상 그 사실을 서글퍼 했지만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담담했다.
나는 평생 이방인이었다. 멍투성이에 비쩍 곯은 어린애였던 때부터 귀환자가 된 지금까지. 나는 늘 삶으로부터 유리되었고, 내 세계가 아닌 세상을 부유(浮游)했다.
어디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어디에도 완전히 발붙이지 못했다. 항상 한 뼘 정도 벌어진 틈을 느낄 때마다 답할 사람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삼초승달과 이씨 가문 가주의 죽음을 내 눈으로 확인하면 안주할 수 있을까? 삼초승달 길드를 찾으라던 저주와 같은 말을 떨쳐낼 수 있을까?
떠올리자 또 심장이 끓는다. 무덤이 있다면 침이라도 뱉어야 이 열기가 식을 것 같았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로 사람을 붙들어 뒀네. 오늘 후처리과에 새로운 과장이 인사발령 돼서 단체 회식 한다는데. 얼른 일하고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과장이 오든 부장이 오든 관심 없는데 묘하게 신경 거슬렸다.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데 박명석은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신발 안에 숨어든 가시처럼 꺼림칙했던 예감의 정체는 퇴근길에 밝혀졌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후처리과 과장을 맡게 된 사결이라고 합니다.”
평소 현장에 나올 때마다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고 다니던 협회의 정직원들이 열렬히 박수를 쳤다. 인부들은 흐린 눈으로 그런 양복쟁이와 젊은 과장을 번갈아 봤다. 박명석은 드디어 미스터리가 풀렸다는 듯 탄식했다.
“그런 외곽지역에 대뜸 나타나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새로 온 과장이었구만.”
나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때 웅성거리는 인부들 틈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리샤의 크레딧 길드 길드장이랑 이름이 같으시네요?”
흠칫했다. 사결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초거대 도시 ‘그리샤’와 그곳의 명실상부 1위 길드인 ‘크레딧’은 들어봤다. 설마….
눈을 가늘게 뜨고 반응을 주시했다.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답했다.
“개명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존경하는 분이라서요.”
저 미ㅊ… 아니, ‘애초에 저걸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있나?’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당황하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럴 수 있지’라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정확히는 농담으로 받아들였고, 양복쟁이들은 의심할 생각도 없는 듯했다. 사결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백담에 살면서 그분과 얽힐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분은 제가 자기 이름으로 개명한 줄도 모를 텐데요.”
이건 진짜 농담 같은 어조였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거대도시의 첫째가는 길드의 수장이 이런 변방 소도시의 후처리과 과장으로 오는 것보단 개명이 더 현실성 있었다. 정확히는 그냥 농담처럼 던지기 좋은 말이었다. 세상에 동명이인이 한둘도 아니고.
‘내가 예민한 거겠지. 여긴 중간계다.’
“인사는 이거면 됐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죠. 제가 아주 크게 한턱내겠습니다.”
“오오!”
협회 직원들과 인부들은 처음으로 한마음이 되어 우르르 몰려나갔다. 나만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정확히는 나와 사결만이 자리에 남아 있었다. 협회 직원들이 새 과장을 의식해 이쪽을 힐금거렸다. 시선의 대상이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안 가십니까?”
안 간다. 내가 미쳤다고 거길 가나. 아무 말 없이 짜게 식은 눈을 하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다음엔 내가 당신 집 문 앞에 있을 텐데?”
…아니 이 미친놈아.
사납게 눈을 치떴다. 사내는 위축되는 기색도 없이 싱글싱글 웃을 뿐이었다.
“내게 왜 이러는 겁니까.”
“음, 그 이유를 여기서 말해도 됩니까? 전 상관없지만, 철수 씨는 싫어하실 것 같은데요.”
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나는 마음을 비웠다. 마족이랑 미친놈은 진지하게 상대할수록 손해다. 그냥 무시하자.
이제 말 안 섞을 거다. 네가 먼저 꺼지기 전엔 움직일 생각도 없다. 그런 의지를 피력하자 한숨을 쉰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겠지, 하고 지켜본 게 무색하게 쭉 밀고 들어오더니 내 귓가에 입술을 붙인다.
“말했잖아요. 반했다고.”
“……!”
눈이 서서히 크게 뜨였다. 사내의 어깨너머로 멀찍이 서서 이쪽을 살피던 협회 직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그가 허둥거리며 몸을 돌렸다. 직속 상사의 불륜현장을 목도한 사람 같은 반응이다.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해명하기도 전에 직원은 도망치듯 일행을 따라갔다. 오해는 정정하지 못했고 그 오해는 오래지 않아 후처리과 전체에 퍼질 게 틀림없었다.
절망하는 내 앞에 사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야, 이렇게 보니까 표정이 보이네. 처음부터 가까이서 볼 걸 그랬나.”
그 순간 결심했다.
‘죽이자.’